〈 2화 〉 EP1. 아드리옴 요새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어요”
이런 늦은 밤에 생활관을 찾아올 손님은 한 명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아리따운 여인이 방에 들어섰다.
“한잔하려고”
어깨에 일본도를 걸터 맨 건방진 자세.
짚을 엮어 만든 커다란 삿갓.
제멋대로 풀어헤쳐진 단발의 검은 머리칼.
속옷과 다름없는 자유로운 차림.
그 위 걸쳐있는 꽃무늬 천쪼가리는 흡사 허리를 묶지 않은 유카타를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손님이다.
미즈하라 레이코.
야릇한 몸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다니는 이 누님의 이름이다.
‘언제 봐도 이질적이구만. 이름도 그렇고..참 일본인 같단 말이지’
중세 서양풍 판타지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외모.
게다가 몇 없는 동양인이라 그런가.
처음 만날 때부터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졌던 여자였다.
“어떤걸로 드려요?”
“그 있잖아. 코..뭐시기 들어간거”
“콜라요?”
“그래그래 그거”
그녀가 또각거리며 다가와 우용의 앞에 앉았다.
구두가 웬 말인가.
우용이 그녀의 발 언저리를 훑어보았다.
그럼 그렇지. 투박한 나막신이다.
“언제 봐도 재밌는 인테리어네”
레이코가 우용의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쪽 세계에선 흔해요”
“분명 바..라고 했던가?”
“맞아요. 저처럼 조주하는 사람은 바텐더, 라고 부르고요”
‘미끼’의 삶은 풍족하다.
아니, 미끼를 떠나서. 이곳의 남성은 재정적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원하는 것은 거의 다 가질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
덕분에 이것저것 방에 들여와 자유롭게 인테리어 할 수 있었다.
우용은 과거 한국에서 일했던 모던 바의 모습을 자신의 방에 재현했다.
물론, 현대적인 자재가 없는 만큼 대충 흉내 낸 것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꽤나 평이 좋은 편이었다.
방문자들은 하나같이 ‘신선하다’며 칭찬하곤 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으응. 천천히 해”
그가 선반에서 갈색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팔각과 같은 갖가지 향초와 허브를 우려낸 농축액이다.
여기에 탄산수의 역할을 하는 오베르크 지방의 샘물을 적절히 섞으면 대강 콜라와 비슷한 음료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이계의 싸구려 증류주를 아무거나 혼합하면 지구에서 마시던 칵테일, ‘잭콕’을 흉내 낼 수 있다.
“흐음…”
레이코는 턱을 괴고 음료를 만드는 우용을 지켜보았다.
“즐거워 보이네”
“그야 재밌게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돌아가고 싶어?”
그녀의 물음에 잠시간 적막이 찾아왔다.
우용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돌아가고 싶은가?
“글쎄요. 큰 미련은 없는데…”
딱히 미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립과 함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그렇다 할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불만을 말하자면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유롭지 못한 건 짜증이 좀 나네요”
“그래? 자유로워지면 뭘 하고 싶은데?”
“일단 동정부터 때야죠”
우용의 답에 레이코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변방 시골에서 주점이나 하려고 했죠”
“굳이 시골에서?”
“촌구석만의 감성이 있다고요. 그 외, 그런 거 있잖아요. 구석탱이에 위치한, 아는 사람들만 가는 별 볼일 없는 술집. 그렇기에 더욱 돈독해지는 점주와 손님의 관계”
“아아, 뭔지 알 거 같아. 매일 오는 단골손님이 ‘늘 먹던 거’라며 멋들어지게 주문한다던가”
“그리고 구석 한켠에선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이 제 몸통만 한 오크 맥주잔을 들고 파앙하며 건배하는 거죠. 그러면서 맥주 절반 정도는 바닥에 흘리고. 그런 호탕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달까“
막연하게 꿈꿨던 일종의 로망이었다.
그리고 이 낯선 세계에선 맘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다.
물론 몸이 자유롭다는 가정 하에.
“우용과 얘기하면 재밌네”
부드럽게 미소 짓는 레이코.
그 미모에 절로 아랫도리가 반응했다.
“이게 삼십 대 중후반의 무르익은 색기인가”
“야... 속마음이 튀어나온 거 같은데?”
“아뿔싸”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음료가 완성되었다.
우용에게 술잔을 받아든 레이코가 음료의 향을 맡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향을 즐기다 이내 한 모금 음미한다.
“흐응~ 언제나 재밌는 맛이야. 발상이 참 대단해”
“지구의 것을 재현한다고 고생 좀 했다고요”
“한 번 가보고 싶은걸. 지구”
술과 함께하는 잔잔한 대화는 힐링이다.
과거 바에서 일했던 생활을 떠올리며 우용도 술잔을 홀짝였다.
“말주변도 좋고, 수완도 좋고, 여자한테 인기 좀 있었겠는데. 어째서 동정인 거야?”
“당신네들 때문이잖아요”
“아니, 여기 오기 전에 말이야”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 그리됐네요”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시간이 흐른 것뿐.
분명 여성 손님과의 크고 작은 이벤트는 많았으나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다.
직원과 손님 간의 스캔들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니까.
워낙 세계가 좁다 보니 사고 한번 치면 다시 직장을 구하기가 굉장히 힘들다.그래서 더욱 몸가짐에 신중을 가했을 뿐.
‘바텐더’란 그런 직업이다.
“그래도 제가 동정인 덕에 이런 맛있는 술도 얻어 먹는거 아닙니까”
“음음. 그 점은 인정할 수 밖에”
만약.
동정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소환될 일은 없었겠지.
조금씩 술잔을 비우며 우용이 생각에 잠겼다.
‘참 기구한 세계’
세계정세에 대해선 빠삭한 편이었다.
그야 이 기구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모로 알아봤었으니까.
절멸 수준에 가깝게 남성이 사라진 세상.
인간 남성의 정액은 이계의 유일한 번식 수단이었고, 종족 간 쟁탈전은 아주 오랜 기간 계속 되어왔다.
언제나 우위를 점해온 건 마족이었다.
마족이란 본래 마나의 은총을 받은 자들.
이에 더해 높은 신체 재생력을 갖췄으니 자연스레 인간령, 발렌시아는 열세에 몰렸다.
그러던 와중, 금기에 손을 댄 인간령 마도 협회의 수뇌부가 이계의 남성을 소환하는 마법을 성공시켰다.
부족한 남성 인력을 이계인으로 충당하자는 취지였다.
그 결과 여러 ‘조건’을 갖춘 지구의 남성들이 이곳으로 소환되었다.
조건이란 무엇인가.
수려한 외모, 발달한 운동신경과 두뇌, 평균치를 아득히 넘는 성기.
‘그리고 동정’
우월한 유전자는 번식에 있어 유리할 뿐 아니라 마물들을 꾀어내기에도 적합했다. 이에 더해 동정이면 아주 그냥 환장한다.
아무튼 이렇게 소환된 남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역할이 주어진다.
번식을 위한 정액 싸개.
그리고 우용처럼 마물 사냥을 위한 미끼.
미끼의 경우 최전선 요새에서 군인 및 훈령병들과 함께 상주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내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죄다 불가항력이었지’
인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성은 철저한 관리 속에서 살아갔다.
마법의 습득은 금지.
모든 전투 마법은 여성만이 교육받았고, 남성은 극진한 대접과 과보호 속에서 갇혀 살아가야 했다.
누구는 상품을 찍어내듯이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어 임신을 시켜야 했다.
누구는 동정을 잃지 않도록 성기에 마법으로 된 족쇄가 걸렸다. 오로지 미끼로서 효율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시팔. 차라리 정액 싸개였으면 얼마나 좋아”
“또 속마음이 들리네 우용”
여튼, 우용의 눈에는 전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생각하다 보니 갑작스레 화가 치밀었다.
문득 어제의 아라크네가 떠올랐다.
“레이코 씨”
그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왜 이리들 싸울까요”
“그야 마물들이 무분별하게 인간 남성을 착취했고, 우린 멸종 위기에 놓였으니까”
“아뇨아뇨. 이곳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어요”
레이코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근 5년간 마물을 꾀어내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뭔지 알아요? 모두가 욕심쟁이는 아니라는 겁니다. 정작 인간 남성을 마구잡이로 착취하려 드는 마물은 얼마 안 돼요”
“또 그 소리를 하는구나”
“어제만 해도요. 그 아라크네는 그저 남편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강우용. 잡생각은 버려. 마물과 인간. 둘 사이 감정의 골은 너무나도 깊어졌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거 알잖아.”
레이코가 듣기 싫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너 말야. 여태 눈 감고 넘어갔다만.. 앞으로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레이코는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우용이 마물들을 살려 보내려 한다는 것을.
“주의하라는 거야. 임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푸하하하!”
우용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되레 충고가 날아오자 화가 치밀었다.
“임무에 지장이 생기면 뭐 어쩌게요? 어제 거미년처럼 목이라도 댕강 썰게요? 전 귀한 몸 아닌었던가요?”
“…”
“그리고 제가 아무나 돌려보내는 줄 알아요? 악의 없는 자들만…”
“거기까지 해. 넌 어디까지나 우리의 필요로 소환된 이계인이야. 무한한 관용은 없어”
“하하…”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을의 입장이라면 을이었으니까.
아무리 남성이 귀하다지만, 자신의 위치를 자중하자면 사실상 강제로 징집된 외국인 노동자와 다름없었다.
“그러게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전 자유를 잃은 노예니까요”
호화스러운 곳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노예.
이 기구한 세계답게 참 역설적이다.
“뭐가 그리 화가 나는데?”
“그저, 금방이라도 대화했던 여편네들의 목이 썰려나가는 걸 눈앞에서 보는 게 버거울 뿐입니다”
우용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백보 양보해서 이 멍청한 싸움에 휘말린 건 그렇다 칠게요. 그런데 설마 섹스를 컨트롤 당할 줄이야. 탈동정을 코앞에 두고 쑤셔 박지 못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데요”
“그냥 번식자가 되고 싶은 거잖아”
“예리하네요 레이코 씨. 사실 정액 싸개로 살아갈 수 없는 제 비루한 인생이 제일 화가 납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싸우려다가도 농담으로 침착하게 화제를 돌린다.
과연 대단한 수완이었다.
이러한 우용이 레이코는 가끔 버거웠다.
능숙한 말장난에 놀아나는 것 같았으니까.
건방진 연하 같으니라고. 레이코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후우..우용. 그래서 너흴 위로하려고 ‘달래꽃’을 준비했잖아. 그건 왜 맨날 거절하는 거야. 이유나 들어보자”
미끼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역시 자지에 걸린 주술이었다. 보지에 넣으려 하면 무형의 힘이 발동해 물리적으로 삽입을 저지했으니까.
그런 미끼를 위해 선별된 성처리반이 따로 있었다.
대딸, 펠라치오, 파이즈리 등등. 성관계를 제외한 방법으로 미끼의 성처리를 돕는 것이 직업인 여자들.
이곳에선 그들을 ‘달래꽃’이라 불렀다.
우용의 방에도 주기적으로 찾아왔었다.
그러나 그는 매사 거절해왔다.
“낭만이 없잖아요. 전 의외로 그런 거 중요시 여긴다고요”
“에휴 진짜. 바보 같네”
레이코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손사래쳤다.
“적어도 그런 행위는 제가 하고 싶은 여자랑 하고 싶은걸요. 예를 들면…”
우용이 음흉한 미소로 그녈 바라보았다.
“레이코 씨라던가”
“뭐..뭣?”
갑작스레 대화를 외설적으로 유도하자 당황하는 그녀.
“아주 그냥 윗사람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아얏”
레이코가 말을 돌리며 우용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았다.
“아뇨아뇨 레이코씨. 당신 같은 매력적인 여자를 알고 있는 이상, 다른 여자는 쉽게 눈에 안 들어와요. 이거 진심”
“무슨 그런 말을…하아, 저질스럽고 진부한 멘트. 실망이야”
태연한 척 술잔을 내려놓는 레이코.
허나 우용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그야 이곳은 남자가 없어 미쳐 돌아가는 세계였으니까.
“아쉽네요. 꽤 노력한 건데…”
취기가 올랐다.
그녀 곁으로 다가가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뭐야?.. 흐웁!!”
그가 레이코의 목덜미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으훕..읍..우음..잠깐..흐읍…”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우용은 거칠게 혀를 집어넣어 그녀의 구강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으훕..흐음..우음,,”
윗니를 훑다가 타액을 맛보고,
설소대로 혀를 집어넣다 아랫니를 훑고.
“흐음…웁…”
“쩝…추릅…”
처음엔 당황해 저항하더니 이내 얌전해진 레이코.
달콤한 허브향과 쌉쌀한 알코올 맛이 났다.
“푸하~”
“하아…하아…”
띠동갑 연상과의 진한 키스.
배덕한 짜릿함이 뇌리에 전해졌다.
돌발행동치곤 성공적이다.
“이 족쇄만 아니었어도..당장이라도 당신을 덮칠 텐데”
“하아.. 그만해 우용. 더 하면 진심으로 화날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레이코. 사실은 좋으면서”
경칭이 생략된 호칭.
여느 때보다 더욱 건방진 말투.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많았다.
“당신이라면 풀 수 있잖아. 이거”
우용이 그녀의 손을 단단해진 자신의 분신으로 이끌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날 범죄자로 만들고 싶은 거야?”
“어떻게 안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