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양단 (2)
이번에도 한여름이 빨랐다.
휙-
그녀는 품속에 있던 완드를 꺼내 들고 진상에게 겨눴다.
“어쭈 한 대 치시게? 잘 생각해. 목구녕으로 숨쉬기 싫으면.”
한여름이 완드를 앞으로 쑤욱 내밀며 위협을 가하자, 진상의 표정이 신문지마냥 꾸깃꾸깃 구겨진다.
“이이···! 너 내일부터 이 던전에 발 한 발자국 못 내밀 거다. 에라잇, 퉤!”
진상은 지갑에서 오만 원 한 장을 꺼내 허공에 던지고는, 힐러를 데리고 사라졌다. 부들부들거리는 그의 발걸음에서 상당한 분노가 느껴졌다.
한여름은 땅에 떨어진 오만 원을 주워 왕호에게 건넸다.
“왕호님! 저런 놈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어딜 가나 또라이는 있잖아요. 그래도 팁은 많이 주네요.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고맙습니다. 장사하다 보면 진상은 자주 만나는데요 뭘. 저 정도면 상당히 심한 수준이긴 하지만······. 근데, 여름님 말 잘하시네요. 너무 구수해서 누룽지 먹는 줄 알았습니다.”
“아··· 저 원래 막 욕 즐기고 그런 여자 아니에요! 껄떡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지원이가 알려준 거예요! 이렇게 하면 싹 달아나거든요.”
한여름이 손사래를 마구 치며 말했다.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진 상태였다.
“지원님이요? 말 수가 많이 없으시던데··· 의외네요.”
“친해지면 말 많이 해요. 고등학교 때 같이 유학 떠났는데, 드센 외국 애들 앞에서도 절 많이 지켜줬어요. 지원이는 말도 잘하고··· 손도 꽤 매워요. 깡이 어마어마하거든요. 둘 다 비슷한 시기에 각성하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왕호는 자신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종구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목숨이라도 나눌 것 같았던 친구들이었지만, 세상 너무 바삐 사느라 연락이 끊겨버린 지 오래였다.
‘동창회나 한번 나가볼까?’
이제는 자기장사를 하니, 반나절 정도는 시간을 뺄 수 있을 거다.
“어? 창모님 언제 오셨어요?”
한여름이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강창모를 발견하고 놀란다.
“아, 여름님께서 속사포로 쏟아낼 때부터 있었습니다. 정말 감동··· 이었습니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통쾌했습니다.”
“윽, 이러다 욕쟁이로 오해받겠네요······. 아, 창모님 그 길드 매니저랑 말한 거는 어떻게 됐어요?”
“그쪽에선 당장 계약하자고 했는데, 제가 좀 더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이랑도 비교해봐야죠. 더 큰 길드에서 컨택이 올 수도 있고요.”
“잘하셨어요! 창모님두 잘 되면 좋겠네요. 우리 모두 꽃길만 걸어요 헤헤.”
한여름이 배시시 웃었다.
저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소름 돋는 멘트가 나왔는지,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
3시가 되자 김지원이 합류했고, 왕호는 밥차의 셔터를 내리고 던전으로 들어갔다.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강창모는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어제는 과할 정도로 투지가 넘쳤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쾅댄다.
왕호가 데려온 실버폭스와 눈이 마주친다.
그르르르-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그래도 예전처럼 눈을 아래로 내리깔진 않았다. 정신을 다잡고 방어자세를 취한다.
‘어젠 뭐였지?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어제는 지옥의 광전사가 자신의 몸에 빙의된 것만 같았다. 레벨 500의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도 달라붙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지금 만나면 꽁지 빠지게 도망칠 거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처음이 가장 어렵지, 뭐든지 한 번 해내고 나면 별거 없다고 느낀다. 심리적인 안정감이 찾아오면서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다.
강창모는 지금 그 과정속에 놓여있었다. 실버폭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 순 없었지만, 그들의 공격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호는 그러한 창모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했다.
‘버프 시간이 끝났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한 마리씩 데려왔다. 강창모가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다.
점점 강창모에게도 여유가 생기자, 그때부턴 다중 사냥을 시작했다.
.
.
.
끼양- 끼양-
세 마리의 실버폭스가 귀를 바짝 세운 채, 강창모를 노려본다. 강창모는 이를 꽉 깨물고는 방패를 몸쪽으로 바짝 붙였다.
실버폭스는 강창모를 뛰어넘어 마법사들을 공격하려 했지만, 강창모의 방패를 맞고 번번이 날아가기 일쑤였다.
그르르릉- 탓-!
실버폭스 하나가 점프한다.
“스매쉬!”
그걸 본 강창모는 재빨리 스킬을 사용한다.
쾅-!
강창모의 방패가 공중에 뜬 실버폭스를 정확히 가격했다.
끼이잉-
실버폭스는 대가리를 얻어맞고는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파이어 볼!”
한여름이 멀리서 불덩이를 날린다.
슈우웅- 펑-!
불덩이는 정확히 날아간 실버폭스를 맞추고,
화르륵-
실버폭스의 은색 털은 잿빛으로 타들어 간다.
왕호는 하릴없이 그 광경을 지켜만 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마나석을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달콤하기 이를 데 없다. 조금은 미안할 정도다. 그래서 오늘은 주전부리를 좀 만들어왔다.
달콤함을 좋아하는 그녀들을 위해, 커스터드 크림이 잔뜩 들어있는 슈를 한입 크기로 만들어왔다. 강창모를 위해서는 마른오징어를 버터에 구운 버터구이 오징어를 만들었다. 마요네즈에 청양고추를 넣어 만든 특제 소스를 찍어 먹으면, 이만한 주전부리가 또 없다.
이렇게라도 도움을 줘야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편해야 마나석을 편히 꿀꺽할 수 있다.
‘돈이다 돈!’
왕호의 침샘에 침이 가득 고인다.
마나석은 곧 돈! 타들어 가는 실버폭스가 왕호의 눈에는 자꾸만 돈으로 보였다.
히죽히죽-
왕호의 입꼬리가 점점 하늘을 향한다.
후다다닥-
왕호는 재빨리 죽어버린 실버폭스에게 다가가 배를 가른다. 마나석을 챙기고 다시 실버폭스 무리를 찾으러 던전을 휘젓는다.
키야아악-
실버폭스가 달려든다.
“스매쉬!” 퍽-!
방패에 맞고 날아간다.
“파이어 볼!” 화르륵-
기절한 채로 불에 탄다.
주욱-
왕호는 배를 가른다.
사냥은 너무도 순탄하게 흘러갔다. 지루하리만큼 반복의 연속. 강창모는 완전히 실버폭스에게 적응한 상태였다. 잘하면 어제처럼 피떡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앙-
김지원이 커스터드 슈를 한입에 집어넣었다.
쫘압쫘압-
“으아아, 느므 달코해여. 지짜 마이따!”
입안으로 찐득한 크림이 잔뜩 튀어나와 제대로 발음할 수가 없다.
강창모도 버터구이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사냥을 즐겼다. 맛도 맛이지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식감이 가히 일품이다.
왕호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행복하게 먹어주는 파티원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들과의 인연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었다. 브레이크 타임마다 이런 식으로 레이드를 뛴다면···
‘흐흐흐’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사람들이 왜 투잡을 뛰는지 알 것 같았다.
반복된 행동으로 파티원들의 감각은 무뎌져만 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을 위협할 무언가는 전혀 없었으니까······.
왕호네 파티는 실버폭스를 찾으러 더욱 깊숙이 들어갈 뿐이었다.
그때,
킁킁-
왕호의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무슨 냄새지? 처음 맡아보는 건데···.’
이상하다. 왕호의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린다.
그리고 왕호가 이상한 향기를 포착한 그 순간!
방심과 오만에 대한 교훈이라도 주려는 듯, 한여름의 바로 옆 풀숲에서 무언가가 팟! 튀어나왔다.
몬스터였다.
탓-!
튀어나온 몬스터는 뒷발로 강하게 땅을 박찼다.
캬아악---!!!
실버폭스로 보이는 몬스터 한 마리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한여름을 덮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 아니, 예상은커녕 매복하고 있던 몬스터의 기척조차도 전혀 느끼질 못했다.
오직 그놈의 냄새를 감지한 왕호만이 긴장을 잔뜩 유지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실버폭스는 다른 실버폭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덩치는 거의 2배 가까이 컸으며, 미간에 영롱한 보라색 보석이 큼지막하니 박혀있다.
마나석일까?
다른 실버폭스가 마나석을 심장 부근에 품고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덩치가 크지만, 매복 기술이 일반 실버폭스와는 수준이 달랐다. 힘은 당연히 더 쎌 테고, 땅을 박차는 속도는 슈퍼카 뺨 때릴 만큼 빨랐다.
‘······!!!’
왕호는 놀랐다.
어찌나 크게 놀랐는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주변 환경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주위가 느려진 것이 아니라, 왕호의 사고회로가 빨라진 것이다.
한여름은 이제 막 포효소리를 들은 모습이었다. 한여름의 고개가 살짝 돌아간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개를 다 돌리기도 전에, 목을 물어뜯길 상황이다. 한여름은 어제처럼 마법 방어구를 착용한 것도 아니다.
‘위험해!’
왕호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들고 있는 중식도로 공중에 떠 있는 실버폭스를 내리친다.
슈우욱-
정확한 자세고 뭐고 없다. 반사적이었다. 평소 쥐는 느낌 그대로 식칼을 쥐었으며, 도마 위로 생선 대가리를 수없이 내리쳐본 그 자세가 본능적으로 나왔다.
콰작-!
왕호의 중식도가 실버폭스의 어깨를 뚫었다.
뚫는 것으로 모자라, 강한 힘에 의해 칼이 안쪽으로 쑤욱 들어간다.
쩌저적-
계속해서 들어간 칼은 실버폭스의 쇄골을 부수고는, 갈비뼈에 닿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스킬 “중급 썰기”를 응용하셨습니다.]
[비고정 대상을 정확히 가격하였습니다.]
[진화 스킬인 “일도양단一刀兩斷”이 생성되었습니다.]
“꺄아악!!!”
고개를 완전히 돌린 한여름이 놀라 나자빠진다. 눈앞에서 튄 피는 한여름의 얼굴에 덕지덕지 뿌려졌다.
“끄응!”
왕호는 식칼을 빼서 다시 방어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식칼이 놈의 뼈에 단단히 박혀 빠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식칼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괜찮으세요?”
왕호가 다리가 풀려버린 한여름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여름은 심하게 놀랐는지, 왕호의 말에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우어어어! 괜찮으십니까아!”
멀리 떨어져 있던 강창모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금세 달려왔다. 이제는 든든해진 탱커답게 몬스터와 파티원들 사이를 능숙하게 가로막는다.
실버폭스는 왕호의 중식도를 몸에 박은 채 비틀비틀거리고 있었다.
“저, 저건!”
강창모가 몬스터의 모습을 가까이서 확인하고는 말을 더듬었다.
“저게 뭔지 아세요?”
김지원이 한여름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러자, 강창모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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