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크스 (2) >
봉길수 감독은 충무로의 유명한 흥행카드다. 메가폰을 잡았다 하면 기본적으로 600만은 깔고 들어간다. 상업성으로는 최고의 감독이나 진배없다.
가장 최근작인 ‘던전 베테랑’도 천만이 넘었다. 그의 여타 전작들과는 다르게, 유쾌한 코믹요소를 집어넣었음에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을 휩쓸었다. 그 때문에 계획하지도 않았던 후속작까지 만들게 됐다.
제작비가 넘쳐나면 넘쳐났지, 부족할 리는 결코 없다. 봉 감독이 지금 쓰고 있는 카메라들은 초고가의 장비다. 큼지막한 최고급 마나석이 박힌 마도구들이다.
1초에 무려 1조 개의 프레임을 찍을 수 있다는, 어마무시한 초고속 기능까지 지니고 있다. 피코초picosecond 이하의 영역을 측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봉길수 감독의 메인 카메라가, 방금 찍었던 씬을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헉!”
조연출은 디스플레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속엔 한 남자가 있었다. 점심때 까지 트럭에서 요리를 팔던 요리사.
그가 장미칼을 휘두른다.
실제로라면 절대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으나, 초고속 카메라로 보니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요리사의 칼이 늑대의 목을 벤다. 군더더기 없는 효율적인 동작이다. 깔끔하기 그지없다.
촤아악-
늑대의 목에서 핏방울이 튀어나온다.
요리사는 멈추지 않았다. 몽글몽글하게 뭉쳐진 핏방울이 채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다른 늑대의 목을 벤다.
촤아악-
계속 벤다.
촤아악-
“인간이 저런 동작을 낼 수 있어?!”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다른 스태프가 소리쳤다.
마치 하나의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공중에 떠 있는 늑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같이 떠오른 흙먼지와 돌멩이, 그리고 핏방울이 더욱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뭐랄까···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고전 영화 ‘올드 보이’의 장도리 액션 씬을 보는 듯했다.
“뭐야 저거? 요리사 맞아?”
“각성자잖아. 레벨 100 정도 되려나?”
“여기 레벨 50 이상은 안 오잖아.”
“쩔해주는가 보지. 100이 아니라 150은 되어 보이는데?”
“전사가 쩔해주는 거 봤어? 레벨 50이면 몰라도, 150이 저렇게 막타 다 치면 경험치 그냥 날아가잖아.”
“몰라, 심심해서 양학하나 보지.”
기가 막힌 광경에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짝짝짝짝-
봉 감독은 감독 의자에 앉아, 연신 박수 세례를 날렸다.
“이야아~ 그림이다 그림. 저거 앞치마 두르고 프라이팬으로 급소 방어하는 것 좀 봐봐. 컨셉 죽이지 않아?”
“그림은 예쁜데 저희 영화랑은 크게···”
조연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끝을 흐렸다.
도저히 저 봉 감독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연출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 그냥 슬로우모션으로 틀면 완벽할 정도야. CG도 필요 없겠어. 입히면 오히려 장면을 망칠 거야. 더할 나위 없이 이대로 완벽 그 자체야.”
“그, 그런가요? 예뻐 보이기는 한데 저는 잘···”
“CG 없는 실사 액션이잖아. 게다가 저 동작들 좀 봐봐. 저거 액션스쿨 배우들한테 시켜도 저렇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니면, 저 정도 실력의 각성자 배우가 있을 거 같아? 전혀!”
“머리가 길어서 멋있는 게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김 감독. 액션 영화 원 데이 투 데이 찍어봐? 합 안 맞추고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완벽히 살아있잖아. 그리고 몬스터랑 합을 맞춘다는 게 가당키나 해? 그럴 수 있으면 왜 각성자들을 쓰겠어. 연기도 어설픈데.”
“그래도 저희가 찍은 씬을 완전히 잡아먹지 않습니까.”
“이것만 따로 들어내서 쓰면 되잖아. 이 카메라 1,000배 줌까지 되는 거 몰라?”
“그, 그렇긴 한데··· 저희 플롯에 없는···”
“유도리 있게 가야지. 플롯이야 바꾸면 되는 거고. 이런 좋은 그림 놓치면 발 뻗고 잠 못 자. 플롯 잘 맞추는 건 연출자의 역량에 달려 있지. 자네는 좀 더 보고 배우라고.”
“예······.”
조연출은 머리를 긁적였다. 대 감독인 봉 감독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이야~ 이거 원 테이크에 노CG라고 마케팅하면 입소문 타는 것도 시간문제겠네. 마케팅 하나는 기가 막히겠어. 개봉 전에 선공개하면, 투자자들 입도 싹 닫겠고. 안 되겠다.”
벌떡-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봉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접 이 명장면의 주인공을 향해 걸어갔다.
앉아서 마나를 회복하고 있던 왕호도, 봉 감독의 접근을 느꼈다.
저벅저벅-
왕호의 코앞까지 다가온 봉 감독. 잔뜩 흥분돼있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던전 베테랑2 찍고 있는 봉길수라고 합니다.”
웃으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친숙함이 절로 느껴지는 웃음이다.
덥석-
왕호는 얼떨결에 악수를 나눴다.
“예. 반갑습니다.”
“혹시, 정말로 요리사입니까?”
“예. 요 앞에서 푸드트럭 장사하고 있습니다.”
“이야~ 투잡 뛰시는군요? 방금 늑대 사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희 측에서 경호 요원으로 데려온 100레벨 각성자 분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시더군요. 자기보다 실력이 더 높다나?”
“예? 그게 무슨··· 저는 아직···”
100레벨보다 실력이 좋아?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하하, 겸손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장님과 파티원들께서 사냥하신 장면이 저희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저희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촬영을 방해한 것은 미안합니다. 그래도 여긴 공용 던전이고, 사전에 저희도 알지 못했으니 유감이라고밖에 딱히 할 말이 없네요.”
“하하하하, 방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가 막힌 그림 하나 뽑아냈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방금 사냥 장면 제 영화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출연료도 챙겨드리겠습니다.”
봉 감독의 제안에, 왕호를 비롯한 파티원들이 깜짝 놀랐다.
천만 영화 후속작에 카메오로 출연?
배우들이 들었다면 봉 감독 자택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감사를 표하겠지만, 파티원들은 배우가 아니다. 범국민적으로 얼굴이 팔릴 수도 있다. 신중해야 한다.
물론, 왕호는 ‘출연료’라는 말에 단단히 꽂힌 상태.
“잠시만요, 일단 저희끼리 상의 좀 해보겠습니다.”
왕호는 파티원들을 불러 의견을 나눴다.
“어때?”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길드에 들어 레이더로 입지를 쌓아나갈 건데, 방패 전사로 유명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출연료 안 받아도 이득입니다.”
강창모는 찬성.
“저도 좋아요. 그리고 저는 딱히 화면에 안 잡힐 거 같네요. 왕호 오빠 활약이 너무 압도적이잖아요.”
김지원도 찬성.
“난 무조건 오케이!”
한여름은 유명해지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가워한다. 팔로워 늘어나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왕호는 다시 봉 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연료는 얼마 정도 합니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하하, 개런티는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엔딩 크레딧에도 이름 올려드리고요. 상황에 따라서 편집될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입금은 해드리겠습니다.”
봉 감독은 손가락 두 개를 슬쩍 올리며 답을 대신했다.
“이십이요?”
“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단위 하나 더 올리세요. 그것도 두 당 전부 챙겨드리겠습니다.”
“이백?!”
왕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꽁돈이다. 게다가 무시할 만한 적은 돈도 아니다.
완전한 이득. 실상, 한 것도 없다. 그냥 평소보다 약간 힘줘서 사냥한 것뿐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봉 감독이 다시 말을 붙였다.
“혹시, 한 씬만 더 찍어주실 수 있습니까? 이번엔 저희 측 컨트롤에 따라서 찍어주시면 됩니다. NG 나오면 여러 번 촬영할 수도 있는데, 대사 없이 갈 테니 그리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연히 출연료는 두 배로 드리고요.”
“두 배······.”
“네 분 다 촬영할 수는 없고, 사장님이랑··· 저기 단발머리 여성분! 두 분을 좀 쓰고 싶습니다만.”
봉 감독이 가리킨 사람은 왕호와··· 한여름이었다.
휙-
왕호는 곧바로 여름이의 눈을 응시하며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여름이만 허락하면 바로 하겠다는 신호다.
출연료를 두 배로 준단다. 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잠깐 협조하고 400을 받아내는 거다. 세상에 이런 꿀알바가 있을까?
“조, 좋아요! 저 봉 감독님 영화 진짜 좋아하는데, 영광이에요!”
여름이도 싫지 않은 듯했다.
왕호는 봉길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하겠습니다!”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왕호와 한여름은 봉길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강창모와 김지원도 좋은 구경 생겼다며, 신나서 따라갔다.
스태프가 잔뜩 모여있는 곳에 도착한 봉 감독은 우선,
퍽-!
김 감독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억!”
“김 감독! 빨리 이분들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거 사과드려. 협조해줘서 고맙단 말 잊지 말고.”
조연출은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고개도 숙여야지!”
꾸벅-
봉 감독이 일갈하자, 고개도 숙였다.
왕호는 못 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였다. 살짝 통쾌했다.
“사장님이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김 감독이 요새 철야하느라 상당히 예민합니다. 크랭크인 날짜가 미뤄지면서, 작업이 많아졌거든요. 워낙 꼼꼼한 성격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겠죠.”
봉 감독은 조연출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병 주고 약 주고가 따로 없다.
자기 사람 부리는 것이 능숙하다. 역시 대 감독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하하, 제가 잘 설명드리겠습니다.”
봉길수는 왕호의 사냥 장면을 슬로우모션으로 확인한 순간부터 머리를 재빠르게 돌렸다.
좋은 캐릭터와 매력적인 플롯의 구도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기가 막혔다. 본래, 뛰어난 음악의 악상도 똥 누다가 급작스레 떠오르기 마련이다.
사실, 공동 극본을 맡은 작가가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이다. 각본을 혼자 짜는 걸로 유명한 봉길수다. 스타 작가의 이름을 올려놓은 것은 단지 흥행을 위한 하나의 카드에 불과하다. 심은진 작가는 바지작가라고 보면 된다.
“전작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가 그리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주인공이 던전에서 관객들에게 사이다를 들이붓는 영화죠. 유쾌한 영화입니다. 일단, 사장님은 그대로 요리사 컨셉으로 가겠습니다. 얼굴에 분만 조금 칠하면 꽤나 준수하니까
···”
봉 감독이 즉석에서 짜낸 플롯을 설명했다.
“···사장님은 사실 셰프로 위장한 실력자입니다. 위험에 빠진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이구요. 어떤 비밀 조직의 일원인데, 그곳에는 저기 금발머리 마법사분도 포함되는 걸로 갑시다. 마법사분은 신인 여자아이돌 컨셉으로 갈 거고요. 여성분은 지금 메이크
업으로도 마스크가 훌륭하니, 바로 촬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비밀 조직이요?”
“하하, 방금 생각한 겁니다. 도와주는 장면은 사냥 장면으로 퉁 치면 될 것 같고, 비밀 조직의 핵심은 저희 측 조연 배우가 연기할 겁니다.”
설명을 마친 봉 감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몸짓이었다. 엑스트라까지 합치면 출연진이 어마어마하다. 사람 하나를 눈으로 찾기는 쉽지 않다.
찾기 힘들자, 결국 메가폰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다.
“야! 한예종 출신 연기 잘하는 꽃거지! 어디 갔냐?”
“예! 저 부르셨습니까?”
거지 분장을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어! 거기 미소지기! 일루 와봐.”
후다다닥-
남자가 봉 감독 앞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박주혁이었다.
거지 분장을 했지만, 잘생김을 완전히 가릴 순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즉석에서 캐릭터 바꿔봤는데, 연기할 수 있어? 비중 늘어나고, 대사도 많아질 건데?”
“헙!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주혁이 복식호흡 발성으로 의지를 불살랐다.
“깜짝아! 자신감 하난 어마어마하네. 주인공 조력자로 등장시킬 거야. 꽃거지 개그 엑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반전을 주는 걸로다가. 그리고 네가 속한 단체는 꽃미모 비밀 단체고.”
“맡겨만 주십쇼!!!”
자신감이 없을 수가 없다. 자신감 도핑 요리를 먹었으니까.
기나긴 노력 끝에, 박주혁에게도 드디어 기연이 찾아왔다.
*
“오빠! 저 칭찬한 거 봤죠?”
트럭으로 돌아온 여름이는 잔뜩 신나 있었다.
< 징크스 (2)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