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스의 출현 (4) >
꽤나 빨리 합격한 탓에, 왕호는 그들의 기본기를 충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미션 중에는 그룹 미션도 있어서, 실력 좋은 참가자들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력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빵빵한 기본기만 갖추면 7할은 먹고 들어간다.
예상대로 김성오와 교효광은 손쉽게 본선행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이 둘과는 한 팀이 되고 싶지 않다. 김성오는 자신을 견제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고, 고효광은 인성이 밑바닥을 기어 다닌다.
‘저 아줌마도 괜찮고, 저 청년도 준수하고, 교복 입은 학생인데 꽤 하네?’
왕호는 눈여겨본 사람들의 이름표를 뇌리에 저장했다.
어?
한참을 스캔하던 왕호의 눈에, 특이한 행동을 하는 남자가 포착됐다.
그는 남들처럼 파채를 빠르게 썰고 있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더듬어가며 파를 만지고 있었다.
서걱- 서걱-
그리고 천천히 파를 썰기 시작한다.
‘맹인?’
왕호의 동공이 넓어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하는 행동이 흡사 눈이 보이지 않는 자의 것이었다. 왕호는 눈살을 찌푸려 멀리 있는 그의 눈동자를 살폈다.
몽골눈으로 자세히 살핀 결과, 눈이 불편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눈동자의 초점이 도마에 맞춰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렇게나 고르게 썰었단 말야?
왕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속도는 현저히 느리지만, 썰린 파채의 모양은 정말 가지런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연습과 노력이 있어야, 눈을 감고도 저렇게 썰 수 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남자의 표정을 보니, 힘들지만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결코 경연장에 왔다고 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요리 자체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도 처음엔 저랬었는데······.’
왕호가 맹인 남자를 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왕호도 처음 요리를 시작할 때, 요리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시키지 않아도 재료를 사다가 매일 연습했으며, 요리를 좀 더 배우고 싶어 분식집에서 새벽까지 일했었다.
요리로 호구지책을 한다는 것은, 요리의 길을 걸어온 첫 번째 이유가 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요리가 목적이 아닌 삶의 수단으로 바뀌어 버렸다.
목적과 수단의 주객이 전도됐다.
‘나는 왜 여기 에셰코에 나왔지?’
순간, 의문이 생겨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유명해져서 돈을 긁어모으려고.
최 영감님이 나에게서 본, 그 감동을 주는 요리사의 마음가짐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최근의 행동들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요리를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진실되게 행한 것이 소방관님을 위한 요리 빼고는 없었다.
‘초심 찾자 왕호야!’
왕호는 아랫입술을 피멍이 고일 정도로 꽉! 깨물었다.
저 참가자를 보자, 다시 요리에 대한 진실된 마음을 곱씹을 수 있었다.
아마, 저 요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참가자는 합격하겠지.
심사위원도 요리의 길을 오래 걸었으니, 분명 느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방송국에서는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무조건 본선행 티켓은 끊어 줄 것이 분명했다.
만약 조별 미션이라도 진행하게 되면, 대부분의 팀이 저 참가자를 기피하겠지. 감성은 자극할 수 있어도, 요리에 있어서 도움은 크게 되지 못할 테니까.
왕호도 딱히 저 친구와 한 팀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은 일지 않았다. 하지만, 저 친구에 대한 생각은 나쁘진 않았다.
자신에게 좋은 계기를 선사해줬을 뿐만 아니라, 요리를 진정으로 즐기는 자에게서만이 나올 수 있는 긍정적인 창의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찌 보면 오늘 녹화에서 가장 크게 얻어낸 점은 케빈 오의 칭찬도, 파 썰기 미션에서 받아낸 경악스런 시선들도 아니었다. 바로, 초심을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탑5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즐기자! 어차피 하차할 생각이었잖냐.’
오히려 오늘처럼 이 악물고 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결과가 더 좋을지 누가 알겠는가.
*
“김 대리! 내 자네만 믿겠네. 내일 아침까지 완성할 수 있겠지?”
“하.하.하. 걱정 붙들어 매시고 퇴근하십시오. 아주 기깔나게 편집하겠습니다.”
김 대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물론, 억지웃음이다.
사회생활하는데 이 정도의 가식은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팀장이 퇴근하자, 김 대리의 입에서 욕설이 마구 튀어나온다.
“아니, 씨바 그럼 촬영분을 빨리 넘겨주던가! 송출일이 코앞인데 내일까지 편집을 끝내라고? 편집부서는 무슨 다들 로보트만 일하는 줄 아나 보지? 에휴, 오늘도 날밤 까야겠네.”
뒷골이 땅기는지, 김 대리가 목덜미를 손으로 주물렀다.
그런 김 대리를 두 명의 사원이 어쩔줄 몰라 하며 바라보았다.
“전체적인 틀은 내가 잡을 테니까, 너희들은 문 PD님이 주문한 거랑 예고로 쓸 좋은 장면만 찾아봐봐.”
김 대리가 두 사원에게 오더를 내렸다.
자막은 컨펌 후에 달면 되니까, 우선 편집을 완료해야 한다. 그것도 12시간 내로.
지금 이곳은 방송국 편집실.
편집을 위한 각종 소프트웨어가 잔뜩 깔린 컴퓨터가, 멀티 모니터를 주렁주렁달고 힘차게 가동되고 있다.
전 국민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 에이스 셰프 코리아’를 편집해야 하지만 할당된 인원은 단 네 명이다. 팀장은 쥐뿔도 할 생각이 없으니, 그냥 3명이라고 보면 된다.
“하, 우승 상금이 3억이라는데 우리 월급으로 3억 모으려면 한 푼도 안 쓰고 10년을 모아야 되네···”
긍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힘차게 해야 한다. 시청률이 잘 나와야 보너스도 두둑해지니 말이다.
시청률이 잘 나오려면?
촬영도 촬영이지만, 편집을 감질나게 해야 한다. 최대한 자극적이게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악마의 편집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악마의 편집을 방송계에서 잘하기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김 대리다.
“오~ 시각장애인도 지원했네? 이건 감동적인 BGM 깔고 최대한 감성팔이로 가자. 클립 영상으로도 좀 쓰고.”
악마의 편집을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김 대리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편집점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오케이! 얘 인터뷰한 거 음성 짜깁기해서 건방진 컨셉으로 가자. 불쌍하지만 욕받이로 써야지 뭐. 얘는 문 PD님이 별말 없었지?”
“네. 따로 내려온 사항 없었습니다.”
“그럼, 그대로 가자고!”
악마의 편집에 희생되는 자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고효광? 와, 얘는 상상 이상으로 건방진 거 같은데? 심사위원 반응도 별로고. 그나마 썰기 미션만 봐줄 만 하네. 얘도 욕받이2로 쓰면 좋겠다.”
“대리님! 그 사람은 PD님이 천사의 편집으로 돌리라는 데요?”
“하, 뭐 건질 것도 없구만··· 쓰읍, 까라면 까야지.”
편집팀의 손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수많은 촬영분을 눈이 시뻘게지도록 봤을까?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발견한 김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와, 대박!!! 진짜 맛있겠다! 비주얼만 봐도 침 넘어가네. 케빈 오 셰프가 저렇게나 극찬해? 비속어까지 써 가면서? 이거 완전 역대급 등장으로 쓸 수 있겠는데? 야, 안왕호라는 참가자 리스트에 있나 봐줘.”
“있습니다! 최대한 호감있게 그리라는 데요? 소시민 푸드트럭 창업자라는 점과, 던전 요리사라는 희소성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가라고 친절하게 가이드라인까지도 정해져 있어요.”
“새끼 빽도 괜찮네. 좋아! 그림 나온다. 심사위원 반응도 제일 좋아. 그럼 김성오랑 얘를 예선 투 톱으로 내세우면 되겠다.”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 미친놈! 얘들아 이것 좀 봐봐봐!”
김 대리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메인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왕호의 썰기 미션 영상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두 명의 팀원들도 벌어지는 입을 앙다물 수 없었다.
“허어어! 세상에 저게 뭐예요? 사람이 저게 가능해요?”
“와··· 눈으로는 뭐, 보이지도 않네요.”
“그치그치? 대박이지? 눈으로는 못 보는데, 우리 카메라는 볼 수 있지. BGM 깔고 슬로우로 돌리면 임팩트 쥑이겠지?”
새벽 4시가 넘었지만, 김 대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로 역대급 편집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잠을 확 달아나게 만들었다.
짝-!
김 대리가 손뼉을 한 번 마주치며, 팀원들을 북돋웠다.
“자, 이것만 끝내고 가자. 첫 방송의 주인공은 얘로 하자고!”
“근데 PD님은 김성오 참가자를 우승후보로 올려놓으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썰기에서 임팩트가 하나도 없었잖아. 1차 예선밖에 건질 게 없어. 그럼 얘 살리자고 이 좋은 그림을 버려? 편집 인생 5년인데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얘도 뭐, 빽 있는 거 아냐?”
“그, 그런 것 같습니다. 김성오처럼 특별지시가 있었으니까요.”
“그럼, 안왕호 참가자 살리는 걸로 가자고! 하, 아까 겨우 건져낸 그 고효광 마법 썰기는 완전 나가리되겠네. 묻히는 걸 떠나서 비교되겠는데 그냥? 어쩌지··· 고효광 얘도 천사의 편집 해야 하는데···”
“그래도 살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마법으로 썰었잖아요.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죠.”
“그렇겠지? 뭐, 비각성자 애들하고 비교하면 이 친구도 부각되긴 할 거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그렇게 편집팀은 싱글벙글하며, 편집을 마무리 지었다. 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결과물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게 빠져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드디어 고대하던 에이스 셰프 코리아의 첫 방송.
금요일 밤 황금시간에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을, 수많은 이들이 관심 있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본방송이 끝나고, 인터넷 연예 뉴스란에는 에셰코 첫방송에 관한 기사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유튜브 공식 채널과 포털 사이트 공식 채널에서는, 하이라이트 클립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기사와 영상에 달린 댓글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댓글이 비슷하다는 얘기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대부분 일치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댓글]
[-와, 안왕호 요리 실화냐? 케빈 오가 맛있다고 쌍욕날림ㅋㅋㅋ 삐 처리했는데 뭐라 하는 지 다 알 듯. 거의 음성지원 수준이던데?]
[-요리보다 썰기 미션이 대박 아니었음? 무슨 스파이더맨인 줄? 거의 실을 뽑아버리던데.]
[-ㄹㅇ··· 오늘 썰기 대박이었다. 맹인 검객 자토이치랑, 바람의 검심 안왕호랑··· 거의 만화 보는 줄 알았다. 여기가 투니버스인가 싶은 정도 ㄷㄷㄷ]
[-님들 김성오 참가자도 대박 아니었나요? 그 연어 파피요트 요리 정말 맛있어 보이던데······.]
[-그것보단 안왕호 먹물 파스타가 더 땡기네요. 몬스터로 만들었다잖아요.]
[-안왕호 푸드트럭 운영한다는데, 어디 가면 그 몬스터 먹물 파스타 먹을 수 있음?]
[-님 각성자임? 던전에 가면 먹을 수 있다던데? 막 버프도 걸린다고 들음. 각성자면 오리진에 소식 뜨지 않을까?]
[-님들 페북 들어가면 왕호네 밥차 페이지 있음. 거기에 위치랑 메뉴 업데이트되니까. 거기 가서 확인하면 됨.]
[-이번 시즌 우승자 안왕호 예상합니다. 전 재산 검.]
[-나는 김성오한테 전 재산 검. 참고로 내 전 재산 마이너스 통장뿐.]
[-나는 고효광? 걔한테 검.]
[-고효광? 님 역배충임?]
[-하, 토토충들 여기서도 토토하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전화번호 : 1366. 전화해서 상담받아라.]
댓글 중 대부분이 왕호에 대한 칭찬일색이었다.
왕호의 엄청난 실력과 천사의 편집이 더해졌으니, 예정된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5만의 팔로우가 채 안 되던 왕호네 밥차 페이지는, 에셰코가 방영된 지 하루 만에 12만 명으로 불어났다.
하루아침에 또다시 스타가 됐다.
왕호는 벼락스타가 된 기분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허나, 이번에 왕호에게 떨어진 낙뢰는 그 전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찌릿찌릿했다.
< 에이스의 출현 (4)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