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바람 불 때 (3) >
희영이에게 왜 이 요리를 해주고 싶었느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동생의 수능 고득점을 위해서다.
희영이가 고득점을 받아 원하는 의대에 들어간다면 왕호에게도 이득이다. 심지어 장학금을 받는다면 더더욱 이득!
가족 중에 사짜 직접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제 밥벌이도 알아서 할 수 있을 거다. 시집 밑천도 혼자서 충당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런 이유는 단 1%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제 동생이니까요.”
이것으로 답변은 충분했다.
희영이를 생각하자 왕호의 표정이 미안함과 기특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동생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왔는지 잘 알기에, 이렇게라도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습니다. 달콤한 디저트는 두뇌회전에도 도움 되니까요.”
“정말 좋은 오라버니시네요. 혹시, 수능 도시락도 안왕호 씨가 직접 쌀 예정입니까?”
케빈 오가 추가적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얼핏 들으면 별 멕아리 없는 질문 같지만, 사실은 케빈 오의 계산이 깔려있는 질문이다.
케빈 오는 왕호에게서 좀 더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를 들춰내고 싶었다. 그는 왕호가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동생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지방에 내려가 급식실에서 일한다는 사실도 안다. 심사할 때 프로파일에서 이미 얻어낸 정보들
이다.
‘이거, 그림 나오겠어.’
케빈 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면 정말로 수능이다.
그리고 이 녹화분이 방영될 때는 아마 수능이 끝난 후다.
시청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예. 아침밥과 도시락도 제가 직접 만들 겁니다.”
“와 대단하군요.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전국의 여동생들이 참 부러워하겠습니다. 어머님이 아니라 굳이 오빠가 해주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음··· 그것이 사실은······.”
왕호의 표정이 살짝 서글퍼졌다.
그리고 왕호의 입에서 구구절절하고 가슴 뭉클한 인생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릴 적,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가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가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보험금과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금액으로, 작게나마 분식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분식집을 같이 운영했던 아주머니의 배신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났다.
어머니는 좀 더 먼 곳으로, 오랜 시간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쁘신 어머니를 대신에,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동생을 왕호가 돌봐야 했다.
왕호는 동생의 아침과 저녁을 모두 직접 챙겨야 했다.
맛있게 먹어주는 동생의 모습에, 왕호는 요리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설상가상으로 희영이에게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약값이 꽤나 들어갔다.
그렇게 분식집에서 어머니를 도왔던 경험을 살려, 요식업에 뛰어들었다.
그때 왕호의 나이가 고작 고등학교 1학년. 17살이었다.
왕호는 꽤 오랜 시간을 이야기했다.
뭐, 어차피 녹화방송이라 상관없다.
편집 부서에서 잘 편집할 거니까.
그리고 사실상 별로 잘라낼 부분은 없어 보였다.
왕호가 뱉어낸 모든 말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 충분했으니까.
왕호의 사연이 끝나자, 케빈 오의 양옆에 있는 심사위원들이 눈물을 삼켰다.
훌쩍-
코까지 훌쩍인다.
특히 여성 셰프인 김소혜 셰프는 마스카라가 잔뜩 번져서, 거의 팬더를 방불케 했다.
편집 부서가 이 녹화본을 본다면 아주 쾌재를 부를 것이다.
악마의 편집만큼 시청률 상승에 탁월하다는 감성팔이를 최고봉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결코 억지 감성은 아니었다. 왕호에게서는 진심이 가득 느껴졌다.
왕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마, 이 방송이 방영될 때는 수능이 끝난 후겠죠.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수험생 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선을 다 한 만큼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부모님들은 열심히 공부한 여
러분들을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화룡점정.
왕호의 말이 전부 끝나자, 심사위원들이 맛 평가에 들어갔다.
김소혜 셰프는 티슈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슬쩍 닦아내고는,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컵케이크를 한껏 퍼 올렸다.
푹-!
숟가락이 들어가자, 초콜릿 액체가 스르르- 새어 나온다.
컵케이크의 모양새는 단출했지만, 이 장면만큼은 정말 압권이었다.
소스가 잔뜩 묻은 케이크를, 입속으로 가져가는 김소혜 셰프.
앙-
쇼콜라가 혀에 닿자마자, 스르륵- 하고 순식간에 흡수된다.
주르륵-
그리고 다시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생각하는 오빠의 마음과, 달콤하고 찐득한 초콜릿의 달콤함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스윗sweet 그 자체!
“정말··· 정말정말 맛있습니다. 초콜릿의 달콤한 풍미가 제 뇌를 마구 강타하네요. 짜릿해서 도저히 숨을 못 쉴 정도에요! 마치··· 어릴 적 염원하던 찰리의 초콜릿 공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네요. 수능날 이 요리를 먹게 될 동생분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극찬 of 극찬.
김소혜 셰프뿐만이 아니라, 다른 심사위원들도 하나 같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오늘 안왕호 씨의 요리에서 진정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너무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였습니다. 매일매일 이 디저트만 먹는다면 행복이 사라지질 않을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한편,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김성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 반응은 대체 뭐, 뭐야? 분위기 겁나 쌔하게 흘러가는데?’
그동안 왕호의 요리가 아무리 맛있어도, 심사위원들은 저렇게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맛있다고만 표현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반응은··· 그냥 압도적인 1위의 반응이다.
‘왜? 왜 갑자기 쟤한테 1위를 주는 거야! 그것도 하필 오늘!’
김성오는 불안한 나머지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지난 세 번의 미션을 보고 깨달았다.
스스로 밥상을 엎지만 않으면 자신이 우승할 거라고.
그래서 동문회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오지게 자랑을 퍼부어놨다.
하지만··· 자신이 엎지도 않았는데 왕호의 숟가락은 어느새 밥상 위로 올라와 있었다.
*
예상대로 이번 미션의 1등은 왕호였다.
“이번 미션에서 1등을 하신 안왕호 씨께는, 다음 미션을 같이 할 두 명의 참가자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케빈 오의 말이 끝나자 왕호는 조금 고민하는 척하더니,
곧바로 거침없이 두 사람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김점례 씨와 강산이 씨로 하겠습니다.”
왕호의 대답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상 못 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김성오의 동공도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점례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다. 예전에 한식당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지만 지금은 그저 가정주부일 뿐이다.
한식에 관해서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지만, 양식은 젬병이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할 정도.
게다가··· 강산이는 더욱 가관인 인물이다.
20대 후반의 남자 요리사.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뛰어난 미각과 요리 센스로 단점을 극복하긴 했지만, 손을 더듬거려가며 요리한다. 플레이팅은 일절 하지 못하는 수준.
방송국에서 감성 자극을 위해 살려두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김성오는 놀란 것도 잠시, 이윽고 음흉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흐흐, 아주 탈락하고 싶어서 환장했네. 제 발로 지뢰를 데려가다니. 이렇게 되면 내가 1등 하는 거랑 별 상관이 없는데?’
전화위복이 따로 없었다.
김성오는 자신이 1등을 먹는다면, 고효광과 쟈니 윤을 데려가려 했다.
둘 다 유명 레스토랑 출신이다. 특히 쟈니 윤은 미국 교포 출신. 뛰어난 세련미를 지니고 있다.
조별과제의 미션이 럭셔리일 확률이 상당히 높은 상태에서, 이 둘을 데려온다면 필승이나 다름없다.
안왕호 저 녀석은 지금 자충수를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왕호는 자신이 데려온 두 사람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녹화 전에 자주 만나서 합을 맞춰놓을 생각이었다.
“오메오메 요리 질루 잘하는 총각이 날 다 뽑아주고 참말로 고마워요이~.”
“하하하 잘 부탁드려요 어머님. 저번에 만드신 떡갈비 정말 맛있었어요. 역시 남도의 손맛은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구요!”
“오호홍. 내가 거시기 담양 엄니들 중에서는 최고여 최고! 그래도 우리는 왕호 총각만 믿으요!”
“하하, 네.”
왕호는 이번엔 강산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이 씨도 정말 대단하세요. 저라면 요리 포기했을 겁니다.”
“아이고, 저도 얼떨떨합니다. 여기까지 올 줄 진짜 몰랐거든요. 괜히 민폐나 끼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민폐라뇨! 남은 사람 중에서 산이 씨 미각이 제일 뛰어나잖아요. 플레이팅은 저한테 맡기시고, 산이 씨는 하시던 그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오호홍, 솔찬히 생긴 두 총각이랑 함께하니께 참말로 기운이 팍팍 생기요!”
김점례 아주머니의 구수한 웃음에, 왕호와 강산이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왕호는 이 두 사람을 절대 불쌍해서 조원으로 뽑지 않았다.
가능성을 보고 뽑은 거다.
허세 가득 찬 유학파보다 100배 나았다.
*
덜컥-
왕호는 창문을 열어 바깥의 날씨를 확인했다.
휘이잉-
찬바람이 아주 쌩쌩 분다.
“와, 어떻게 매번 수능 때마다 이렇게 추울 수가 있지?”
신기한 일이다. 하늘도 마치 오늘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 줄 아는 것 같았다.
“가디건 안에 챙겨 입었지?”
왕호가 혹시나 하는 눈빛을 띠며, 희영이에게 물었다.
희영이는 떡볶이 코트의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걱정 마. 단단히 입었으니까.”
“시험장에는 히터 빵빵하게 나온다니까, 얇은 거 여러 개 입어야 돼.”
“그 소리 어제저녁에도 다섯 번이나 들었던 거 같은데?”
“뭐, 놓고 간 건 없지?”
“저녁에 다 확인했어. 그리구 어차피 수험표 빼고는 거의 반입 금지야.”
“준비 다 됐으면, 이거 먹어 봐!”
왕호가 갓 만든 퐁당 오 쇼콜라 컵케이크를 건넸다.
아주 뜨뜻한 상태였다.
“응? 이게 뭐야?”
“초코 디저트. 아침에 초콜릿 먹으면 머리가 잘 돌아간대잖아.”
“와, 맛있겠다. 근데 이런 거 먹으면 살찌는데······.”
“헐··· 제정신이야? 지금 살찌는 게 중요해? 엉? 시험 잘 보는 게 중요하지!”
얼토당토않은 말에 왕호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아야야··· 귀청 나가겠어! 하마터면 영어 듣기 망칠 뻔 했네. 알았어 먹을 게. 헤헤 쪼꼬다 쪼꼬~.”
푸욱-
희영이가 흥얼거리며, 컵케이크를 마구 떠먹었다.
“으흐으음··· 캬~ 달다~! 이야~ 이거 포도당 금방 섭취되겠는데? 근데 이것도 그 버프 요리인가 하는 거야?”
“음··· 맞아. 머리를 맑게 해주는 거야.”
“그래? 이거 먹고 점수 잘 나오면 막 생색내는 거 아냐?”
“생색 좀 내면 안 되냐? 지금의 널 만든 건 8할이 이 오라비라는 걸 잊지 말도록!”
“주입식 교육 사라진 지가 언젠데, 집에서 자꾸 주입을 시키네······.”
겉으로는 투덜거렸지만, 희영이는 품으로 왕호가 만든 도시락을 꼬옥 껴안았다.
오빠의 사랑이 담겨있어 그런지, 참으로 따뜻했다.
사실은 마나석 도시락이라서 따뜻했지만······.
밥이 식지 않게 온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도시락이다.
나동수가 왕호의 부탁을 받고 친히 인챈트해준 물건이다.
여기에는 희영이가 매일 먹던 버프 요리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체력을 올려주는 버프 요리다.
아침밥으로 먹은 소고기 뭇국에도 체력상승 버프가 달려있다.
10시간 넘게 시험이 진행되니, 체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리고 희영이가 아까 먹은 초콜릿 디저트에는 사기급 힐링 버프가 달려있다.
‘이 정도면 실수는 안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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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는 트럭 조수석에 희영이를 태우고, 수험장에 도착했다.
여유 있게 도착했어도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핸드폰은 혹시 울릴 수도 있으니까, 차에 놔둬! 끝날 때 여기로 다시 데리러 올게!”
“알았어. 알았어. 어디 파병가요?”
“화이팅! 아, 맞다! 이거 갖고 가!”
주섬주섬-
왕호가 종이에 쌓인 물건을 건넸다.
“이게 뭐야?”
“오빠가 어제 만든 수제 초콜릿이야. 당 떨어지면 먹고. 아! 여기에도 버프 달려있으니까, 저번에 오빠 트럭 청소 도와줬던 소미랑 혜진이한테도 좀 나눠줘!”
“오! 알았어! 오빠가 만들었다고 하면 한입에 다 먹을걸?”
희영이가 내리려 하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덕구도 한마디 거들었다.
“마법 시험인가? 무슨 시험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
“덕구야! 뒤에 주인님을 붙여야지! 저녁에 안 놀아준다?”
“헉! 힘내라 주인! 아자아자!”
“고마워 덕구야! 시험 끝나면 공원 데려가서 이쁜 언니들 많이 보게 해줄게.”
“쿠헬헬헬!”
희영이의 조련에 덕구가 헥헥- 거리며 침을 질질 흘렸다.
왕호는 운전석에 앉아, 수험장으로 들어가는 희영이에게 계속 손을 흔들었다.
‘언제 저렇게 컸지.’
수능을 치러 가는 희영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도 장사하러 가볼까?”
희영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왕호는 다시 트럭을 몰고 던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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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분 정도 차를 몰았을까? 아직 시내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다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는 한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이지색 떡볶이 코트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희영이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학생인가? 근데 왜 이 시간에 저렇게 다급하게··· 설마?’
끼이익--
오지랖이 발동한 왕호는 그 여학생의 앞에 트럭을 세우고 말았다.
희영이의 모습이 겹쳐진 터라, 도저히 오지랖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찬바람 불 때 (3)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