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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를 배웠나 봐."
"모셋, 빨리 총을 뽑아 들어."
"그……그래, 알았어."
주먹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모셋이 총을 뽑아 든 순간 지훈은 길이 70~80센티의 정글도를 휘두르는 자를 쓰러트렸다.
그사이 총을 뽑아 든 모셋은 차마 발포를 못 하고 위협만 했다.
"꼼작 마!"
"이봐, 몸에 구멍이 나기 전에 당장 멈춰."
"비겁한 새끼들."
상대가 총을 뽑아 들자 천하의 지훈이라 해도 당황스러워서 주춤거렸다.
그사이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꼴이 정글도를 집어 든 후에 다가왔다.
"미정은 어디 있지?"
"나쁜 놈들, 미정에게 마약을 먹여?"
"그 여자가 원해서 줬다."
"추악한 놈들, 거짓말은 그만해라."
"닥치고 죽이기 전에 여자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어림없다."
"총을 맞아 봐야 우리 말을 들을 생각이냐?"
"그랬다가는 네놈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흥! 여기는 태국이다."
"이봐, 우리가 한국 여자를 한두 번 건든 줄 알아? 그동안 많은 한국 여자를 건드렸어. 그중에는 오늘처럼 소란을 피운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경고하지만 경찰도 우리 편이다. 그러니 크게 다치기 전에 곱게 우리가 시킨 대로 해라."
"다가오지 마라!"
겁에 질린 척 두 손을 들어서 저항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던 지훈은 꼴이 지척까지 접근하자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지훈이 저항을 포기했다 여기고 방심했던 모셋이 그 모습에 깜짝 놀라서 권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엉겁결에 미처 조준도 못 하고 쏜 총은 엉뚱한 벽을 꿰뚫고 말았다.
타-앙!
"컥!"
그사이 턱을 강하게 맞고 비틀거리는 꼴의 목과 팔을 제압해서 꼼짝 못하게 만든 지훈은 마치 방패를 든 것처럼 그자를 앞세우고 모셋에게 다가갔다.
"오……오지 마."
"총 버려!"
"더 가까이 오면 쏘겠다."
"쏠 수 있으면 쏴! 하지만 총은 내가 아니라 네 친구가 맞을 것이다."
"머……멈춰."
"총 버려, 어서!"
"모셋, 초……총 버려. 제……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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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의 다운타운에서 80미터만 올라가면 경찰서가 나온다.
총소리를 듣고 몰려온 수많은 외국인과 태국인들 덕분에 더 이상의 충돌 없이 상황을 마무리한 지훈은 얼마 지나자 않아서 현장에 나타난 경찰들과 함께 경찰서로 이동했다.
그런데 빠이의 경찰들은 지훈의 얘기는 철저히 무시하고 꼴과 모셋을 비롯한 태국 사람들의 말만 믿었다.
"왜 내 말을 안 믿는 것입니까? 난 저들의 공격에 맞서 정당방위를 했을 뿐입니다."
"이봐, 여기는 태국이야."
"여기가 어디든 경찰이라면 진실을 조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당신, 많은 태국 사람을 다치게 한 이상 이번 일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오."
"처음부터 얘기했지만 저들은 내 일행을 강간하기 위해서 내가 묵고 있는 숙소로 몰려온 자들입니다."
"이봐, 증거 있어?"
"사고가 터진 장소가 내가 묵고 있는 숙소 앞이잖습니까?"
"저 사람들 말로는 그냥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당신이 먼저 욕하고 시비를 걸었다던데?"
"난 혼자고 저들은 다수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총과 정글도를 비롯해서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먼저 시비를 걸겠습니까?"
"혼자서 그 많은 사람을 쓰러트린 것이 보통 실력이 아니던데, 그 실력을 믿고 그런 것 아냐?"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들을 건들겠습니까?"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냐."
"왜 내 말을 안 믿습니까? 당신들이 계속해서 편파 수사를 한다면 한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한국 대사관? 알리려면 알려. 하지만 한국 대사관은 신경도 안 쓸걸."
"좋습니다. 전화를 하겠습니다."
빠이 경찰의 편파 수사에 화가 난 지훈은 태국 입국과 동시에 문자로 안내되었던 한국 대사관의 긴급 구조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너무 늦은 밤이라 아무도 전화를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누군가가 받았다.
"여보세요, 한국 대사관이죠?"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죠.
"저는 한국인인데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계속 영어로 얘기하는 것이 아무래도 태국인 같았는데, 지훈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내일 다시 전화하라는 말을 하고는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이봐, 한국 대사관에서 뭐래? 아마 아무런 도움도 안 줄 텐데 내 말이 맞지?"
"지금은 담당자가 없어서 아침에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아침에 전화해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그동안 한국 사람을 한 번도 상대 안 해 봤을 것 같아?"
"이봐,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좋게 해결해."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자국민 알기를 개똥으로 아는 것이 한국 외교관들이었다. 이는 비단 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해서 교민이나 유학생들은 현지인과 문제가 생기면 대사관의 도움은 아예 기대를 안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당신에게 맞아서 다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우리에게도 약간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 주지."
"당신도 이런 일에 얽혀 봐야 좋을 것 없을 텐데 빨리 끝내는 게 좋잖아?"
"다친 사람들에게 개인당 10만 바트씩, 총 100만 바트를 지급한다면 이번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 주지."
동남아 여러 나라가 그런 것처럼 부정부패에 찌든 것은 태국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사건 수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들은 보상금 조로 돈을 요구했다.
그런데 꼴과 모셋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하센밧'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이 그들과 돈을 나눌 생각인 것 같았다.
참고로 태국어를 못하는 지훈도 숫자를 세는 단위와 그 단어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경찰들이 말하는 하센밧이 50만 밧을 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나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고 저자들이야말로 범죄자들입니다."
"증거도 없는데 그 말을 누가 믿어?"
"그건 경찰인 당신들이 밝혀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보상금을 안 주겠다고?"
"보상금은 오히려 제가 받아야 합니다."
"이자가 통 말귀를 못 알아듣네."
"이봐, 법대로 가면 당신이 유리할 것 같아? 여긴 한국이 아니라 태국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수사를 공정하게 해서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답답하기는. 이봐,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그자를 아침까지 유치장에 가둬. 그 안에 들어가면 그때는 정신이 번쩍 들 거야."
"한국인 친구, 빠이에서 태국 남자와 함께 사는 외국인 여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 여자들이 좋아서 여기서 지내는 줄 알아? 거기에 비하면 당신은 여자 친구를 지켰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좋게 끝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혹시 당신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러니까 우리 말대로 좋게 끝내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경찰이라면 경찰답게 공정한 수사를 해 주십시오."
끝까지 공정 수사를 요구했던 지훈은 끝내 유치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경찰들의 예상과 달리 지훈은 억울해서라도 진실을 끝까지 밝힐 생각이었고, 아침 9시가 되기 무섭게 대사관에 다시 전화를 해서 담당자라는 한국 직원과 통화를 했다.
"전 억울합니다. 그놈들은 제 일행을 강간하고 제게 보복할 생각에 제 숙소로 몰려왔고, 저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입니다."
-상황은 이해가 가는데 태국 사람들이 다쳤다면서요?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태국 사람이 다친 이상 경찰들은 무조건 자국민을 보호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