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회: 6-17 -->
"저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입니다."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태국인이 안 다쳤으면 모르는데 다쳐 버렸으니 우리도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내가 저항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거나 아니면 그자들의 총칼에 당해야 했다는 것입니까?"
-여긴 한국이 아니라 태국입니다.
"그래서 당신 같은 외교관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라고 해서 무슨 뾰쪽한 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그자들과 흥정을 해 보상금 액수를 낮춰서 합의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국민이 억울한 상황에 빠졌는데도 못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솔직히 외교관이라면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봐요,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아세요?
통화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지만 대사관 직원과의 대화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믿고 의지했던 한국 대사관의 무책임한 모습에 절망과 함께 분노를 느낀 지훈은 통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을 씩씩거렸다.
@
유치장에 갇혀 있던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쏨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이런 일로 쏨의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공사가 다망해서 이런 하찮은 일은 신경 쓸 수 없다는 대사관 직원의 얘기를 듣는 순간 의지할 데라고는 쏨뿐이었다.
"여보세요."
-안녕, 좋은 아침. 지훈, 뭐하고 있어? 빠이는 어때? 무척 아름답지?
지훈의 전화를 받은 쏨은 밝은 목소리로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해 왔다.
연신 쏟아지는 질문에 말문이 잠시 막혔던 지훈은 한숨을 한번 토해 내고는 현재의 상황을 알렸다.
"쏨, 빠이가 좋기는 한데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
"나, 지금 경찰서에 갇혀 있어."
-뭐! 왜?
"어제, 미정 씨가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갔었는데……."
깜짝 놀라며 자초지종을 묻는 쏨에게 지훈은 바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숙소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을 얘기했다.
아울러 빠이의 경찰들이 자신의 얘기는 전혀 믿어 주지 않고 100만 바트의 보상금을 요구하고 있음을 전했다.
하지만 미정을 생각해서 그녀가 마약에 취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지훈, 미안해.
"쏨이 왜 미안해? 내가 더 미안하지."
-아냐, 우리 나라 경찰들은 청렴하지 못해. 어떤 상황인지 나도 짐작할 수 있어. 지금 빠이 경찰서야?
"응."
-지훈, 힘들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아버지라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쏨, 미안해."
-아냐, 내가 더 미안해. 하지만 이번 일로 태국을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말아 줘. 부탁해.
"나도 대부분의 태국 사람들이 친절하고 착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기다려 줘.
"나는 괜찮으니까 가능하다면 공정한 수사만 부탁하고, 쏨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어."
쏨에게 전화를 건 지훈이 현재의 상황을 알리고 있을 무렵 미정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린 미정은 자신이 낯선 방에 있다는 사실에 순간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한쪽 벽에 나란히 놓여 있는 자신과 지훈의 가방을 발견한 순간 자신이 방갈로 안에서 자고 있음을 깨닫고는 옆에 있는 다른 침대를 둘러봤다.
'어! 지훈 씨는 어디 갔지?'
베개는 물론이고 침대 시트가 처음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무래도 지훈은 이곳에서 안 잔 것 같았다.
'엥! 왜 이래?'
지훈이 이곳에서 안 잤음을 깨달은 미정은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아쉬워하다가 자신이 속옷 차림인 것을 알아차렸다.
"왜 내가 속옷만 입고 있지? 내가 스스로 옷을 벗었을까? 혹시 지훈 씨가 다 본 것 아냐?"
속옷만 입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의아하게 여긴 미정은 간밤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맞아. 나는 바에서 술을 마셨어.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온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지훈 씨였을까?'
애써 기억을 더듬던 미정은 자신이 낯선 바에서 웨스턴, 태국 남자 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신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이후의 기억은 안 났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정은 지훈이 원하던 대로 방갈로 안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지훈과 함께 숙소로 돌아온 후에 별다른 일 없이 이곳에서 잠을 잤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찌해서 지훈이 같은 방 안에 없는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옷을 벗은 통에 지훈 씨가 나갔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유력했다.
'아! 오늘이면 치앙마이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바보!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거야?'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자신이 지훈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댔으며, 지훈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만졌음을 모르는 미정은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린 것을 자책했다.
'그나저나 지훈 씨는 어디서 잤지?'
한참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원망하던 미정은 마냥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원형의 테이블에 방 열쇠가 놓여 있음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열쇠가 왜 저기 있지? 지훈 씨가 그냥 놓고 나갔을까?'
열쇠가 방 안에 있는 것은 지훈이 의도해서 그렇게 되었다. 즉, 지훈은 술에 취한 미정이 계속 떠민 통에 방을 떠났고 그 이후에는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잤다고 얘기할 생각에 열쇠를 두고 나왔다.
반면 그 상황을 모르는 미정은 단단히 잠긴 방문까지 확인한 후에야 지훈이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었음을 깨닫고는 다시금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그, 바보!'
*8. 그런 거물을 건드리면 어쩌자는 거야?
행정구역상 치앙마이 주에 속해 있는 빠이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역으로, 군사적으로 무척 중요함 거점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관광지로 유명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특수전 병력인 공수부대와 보병 부대가 한 개 연대씩 주둔해 있었는데, 그들 부대는 전부 란나 군구 소속이었다. 쉽게 말해서 빠이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의 총사령관은 바로 쏨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연대 본부가 시끄럽더니 병력들이 소집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여전히 유치장에 갇혀 있던 지훈은 미정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사장님, 어디세요?
"미정 씨, 잘 잤어요?"
-네. 그런데 사장님은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보아하니 여기서 안 주무신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정 씨, 간밤의 일이 기억 안 나세요?"
-바에서 술을 마신 기억은 있는데 어떻게 숙소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사장님이 절 숙소로 데려왔나요?
"그랬지요. 그런데 그 이후 기억은 없어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안 나네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실수까지는 아닌데 미정 씨 업고 오느라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간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에 안도한 지훈은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어제는 술을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겼나 봐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제가 실수한 것은 없나요?
"실수라면 절 무작정 밖으로 내쫓은 것이 실수지요."
-어머! 제가 그랬나요?
"말도 마십시오.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을 깊이 못 잔다면서 어찌나 완강하게 밀어 대던지 쫓기듯 밖으로 나왔습니다."
-죄송해요. 지금껏 몰랐는데 제게 그런 술버릇이 있나 봐요.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바보!'
천연덕스러운 지훈의 능청에 속아 넘어간 미정은 지훈을 내쫓은 일을 후회하면서 어디 있는지 물었다.
"어제 빈방이 없어서 주위를 돌다가 다른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그곳에 있나요?
"잠깐 사정이 생겨서 다른 곳에 왔는데, 미정 씨 먼저 아침 식사를 하고 계세요. 여기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요."
-지금 계시는 데가 어딘데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까 최대한 빨리 갈게요."
적당한 핑계를 대서 미정을 안심시킨 지훈은 어서 빨리 이곳의 일이 원만히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경찰들이 지훈을 다시 불렀고 그들은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보상금을 물고 합의할 것을 종용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몰려왔습니다. 그건 그들이 총과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봐, 태국은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라서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정글도도 소지하고 있었고 열 명이 한꺼번에 몰려왔는데도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태국에서 정글도는 기본이야. 그리고 그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강변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고."
"왜 내 말을 안 믿는 것입니까? 난 그들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 정당방위를 했을 뿐입니다."
"글쎄,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어?"
"이봐, 답답하게 자꾸 그런 소리만 늘어놓을 거야?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 한 것 같은데, 좋게 말로 할 때 보상금을 물어주고 빨리 합의해."
"당신들이 이러고도 경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거참, 더럽게 말 안 듣네. 이 상태에서 재판을 받으면 당신은 무조건 유죄야. 그래서 벌금과 함께 징역형을 받아야 해. 그리고 징역형을 피하려면 보석금을 내야 하는데, 그 돈이 그 돈이야."
"이봐, 한국인, 우리도 일이 커지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빨리 돈 주고 끝내."
이미 꼴과 돈을 나누기로 한 경찰들은 수사를 제대로 할 생각은 않고 지훈을 위협하면서 합의를 강요했다.
군복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지훈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프라삭 총사령관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희가 온 이상,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