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42화 (242/357)

242. <오늘의 운세>

“크하하하하! 기분 좋구나.”

담악의 부축을 받고 내실로 들어선 차석두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련주님, 괜찮으십니까.”

사실 부축이랄 것도 없었다.

거구의 차석두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왜소한 체구의 담악.

마치 어린 자식이 애써 아버지를 부축하려 하고, 아버지는 모른 척 아들의 부축을 받아주는 모습이었으니까.

“아아, 괜찮아. 괜찮아!”

자리에 앉은 차석두를 바라보는 담악의 심경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큰 고비를 겨우 넘긴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이 된 차석두.

그 편안함을 선물한 것이 자신이 아닌 진소운이라는 사실이 담악은 마음에 걸렸다.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다행이야…….”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고 술주정을 하는 모습이 담악은 몹시도 기꺼우면서 동시에 아쉬웠다.

“죄송합니다. 련주님. 본래 제가 했어야 할 일인데.”

“응?”

차석두가 게슴츠레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어찌 담 군사의 일인가. 모두가 해결해야 했을 일이지.”

“제가 좀 더 영민했다면…….”

“크하하하하. 담 군사도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술이 조금 깬 듯 호탕한 웃음을 내지른 차석두가 또렷한 눈으로 담악을 바라봤다.

“담 군사.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 자리를 보전해 달라는 것이었는가?”

“……그건, 아니지요.”

“그래. 내가 바라는 건 사흑련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크게 부흥하는 것이네.”

차석두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담 군사는 이제껏 자신의 일을 잘 해주었어.”

“…….”

“사람에겐 각자 자신이 할 일이 있는 거네. 이번 일을 해결하기엔 흑염룡 그 녀석이 조금 더 제격이었던 것뿐이지.”

제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놈이 아니고선 생각해 내지도, 실행하지도 못할 방식이긴 했다.

진소운에게서 그간의 전말을 듣고 천하의 차석두도 혀를 찰 정도였으니.

“자책할 필요도, 그놈과 자네를 비교할 필요도 없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 않은가.”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차석두가 진지한 눈빛을 하곤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보단…… 역시 동맹까지는 어렵겠는가?”

종전에 연회 자리에서 나왔던 화제가 다시금 흘러나왔다.

“동맹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진소운 그놈이 전음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거참,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담악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아무리 사흑련에 도움을 줬다지만 그래도 사흑련의 대표자에게 그리 막말을 해댔다니.

그러나 차석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제를 이어갔다.

“흐음…… 사실 나 역시 일정 기간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하네. 사흑련은 아직 겉만 번지르르하지 않나.”

애당초 오백 년짜리 단체와 신생 단체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담악은 차석두의 의중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암수를 축출하는 일로, 무림에 대한 연맹 수뇌들의 반발을 어느 정도 막았지만, 이 이상은 불가할 겁니다. 애당초 무림맹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연맹에 합류한 이들도 있으니 말이지요.”

숙고하던 차석두가 넌지시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가 현 무림맹의 상대가 되겠는가?”

“……쉽게 지지 않을 겁니다.”

“결국 진다는 이야기군.”

“무림맹의 저력은 그 존재 자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 또한 알고 있어. 그렇기에 고민이 많은 걸세. 난 단지 사흑련을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단체로 두고 싶지 않아. 자유로운 성정을 가진 이들이 서로 모여 경쟁하고, 때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단 말일세.”

차석두의 음성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령고원에서 결국 일을 해결해 낸 건, 흑도 무림이 아닌 백도 무림의 힘이었지. 그리고 이런 일은 언제든 또 발생할 것일세.”

과거를 되짚어 보던 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우리가 뭉쳐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세. 바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눈빛.

“남들을 죽이고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일세.”

차석두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어떤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 담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쩝, 흥분해 버렸군. 미안하네. 술이 취하면 이리 말이 많아지니 말이야.”

한편으론 차석두의 심경도 이해가 갔다.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은 흑도 무림에 많지 않다.

대부분이 무도하고 무법적인 자들.

그 사이에서, 홀로 큰 꿈을 품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 일은 반드시 제가 이뤄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난 차석두의 음성이 한풀 꺾였다.

눈꺼풀도 반쯤 내려온 것이 슬슬 졸린 듯 보였고, 담악은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

“아 참, 이거 가져가게.”

그때, 차석두가 한쪽에서 커다란 목갑을 한 손으로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렸다.

“이게 뭡니까?”

“아, 진소운 그놈이 자네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호위를 붙이거나 호신 물품을 챙겨주라 하더군.”

“진소운 그자가…… 말입니까?”

상자 안을 열어보니 얇은 철판을 비늘처럼 촘촘히 달아 만든 보의가 들어있었다.

“사황봉의 신물 중 하나인 철린보일세. 항시 옷 속에 착용하고 다니게.”

담악은 제 귀를 의심했다.

“철린보라면…… 련주님의 신물 아닙니까.”

그렇다는 건, 지금 차석두는 자신이 입고 있던 신물을 담악에게 건네줬다는 말이었다.

담악은 서둘러 상자를 닫았다.

“전 괜찮습니다. 다시 련주님께서 입으십시오.”

“지금 사흑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내가 아닌 자네일세.”

“…….”

차석두가 손을 내밀어, 닫혀버린 상자를 다시 열었다.

“내가 죽으면 다른 이가 와서 련주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지만, 자네가 죽는다면 사흑련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겠나. 그러니 거절 말고 나를 위해, 그리고 사흑련을 위해 입게나.”

차석두가 하는 말은 단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사흑련 내부에서 유일하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신을 위한 배려.

담악은 그의 마음을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반드시 사흑련을…… 무림맹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 가는 단체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네! 껄껄껄껄.”

담악은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청와 서원에서 지냈을 때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

“끄으으……. 끄으으…….”

피골이 상접한 존재가 눈두덩이에 검댕이를 묻힌 채, 방 안을 기어나와 탁자까지 힘겹게 다가갔다.

“무, 물…….”

이 괴이한 생명체는 사람 말을 하며 탁자 위로 간절하게 손을 뻗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명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대접에 물을 받아 건네주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크아……!”

마치 메마른 땅에 물을 들이붓듯 순식간에 대접을 비운 괴생명체는 다름 아닌 진소운이었다.

“후우…… 죽겠네.”

입가의 묻은 물을 대충 닦아내는 진소운을 보며 일명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진 시주…… 그리 힘들면 내공으로 주기를 날려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진소운이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자처럼 고개를 내젓는다.

“일명 선배…… 주기를 날릴 거면 왜 굳이 술을 마십니까?”

“…….”

[진소운 그자가 ‘깨달은 자’인 것 같습니다.]

……는 개뿔.

나무아미타불…….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각한 일명은 차분하게 다시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뭐 하십니까?”

“당연히 짐을 싸고 있지요.”

“왜요?”

“……무림맹으로 돌아가야지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 진소운.

일명은 되레 황당함을 느꼈다.

설마 전날 차석두가 건넨 제안을 정말 받아들일 생각이라도 있는 걸까?

“그럼 이곳에 남아 부련주가 되는 것이야?”

어쩐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일명이 품은 의문을 대신 묻는 당서희.

어느새 물 한 대접을 더 비운 진소운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백도의 기둥인 천하의 태을문 제자가 어찌 극악무도한 흑도 놈들 사이에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

“…….”

“크으…… 시원하다!”

지금 사흑련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가 진소운 아니었던가?

극악무도라……. 왠지 누구보다 극악무도하게(?) 잘 지낼 것 같은데…….

일명이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그럼 어째서 짐을 싸지 말라는 겁니까.”

진소운은 물을 마시다 말고 말했다.

“크으…… 아직 중요한 할 일이 남았습니다.”

“할 일…… 이요?”

악병비와 사절단이 뒤집어썼던 누명도 벗었고, 암수도 찾아내어 협정까지 완료했다.

이 이상 할 일이 뭐가 있을까.

혹여 자신만 듣지 못한 내막이 있는가 하여 악병비를 바라보니, 악병비 또한 고개를 젓는다.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어 악병비가 말했다.

“하지만 저놈이 할 일이 있다면필시 중요한 일이겠지.”

“…….”

뭐지?

분명 산서성으로 올 때만 해도, 계속 진소운이 흑도의 간자일 거라고 확신에 차 겸상도 안 했던 것 같은데?

더구나 진소운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 악병비의 태도를 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었으니. 우린 조금 더 머물다 갈 겁니다.”

“진 시주…… 일단 무슨 일인지라도 좀 알려주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곧 알게 될 겁니다.”

“…….”

일명은 하루라도 더 사흑련에 머문다는 것이 못내 찝찝했지만…….

“그럼 이제부턴 부련주로서 머무는 것이야?”

“부련주? 뭐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크하하하.”

“그럼 나도 부련주 할 수 있는 것이야?”

“당 선배는 아직 멀었습니다. 수련이 부족해요.”

“나도 하고 싶은 것이야! 부련주.”

“…….”

……오로지 자신만이 그런 감정을 품는 듯해 머리가 아파왔다.

장난치듯 오가는 말들이 혹여 담을 넘어 사흑련의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일명은 결국 내공을 일으켜 음을 차단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난생처음 무공을 익힌 것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

대전엔 사흑련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오문이방일봉의 수뇌들이 모두 모였다.

사황봉의 대표로선 본래 차석두가 참여해야 했지만, 그는 현재 련주였기에 그를 대신하여 황부식이 참석했다.

자리한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일명은 꿀꺽 침을 삼켰다.

무림맹으로 따지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둔 셈.

그것도 흑도…… 아니 백도 무림 애송이의 부름에 모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자리는 애당초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인 이들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좋지 않다.

특히 주전파 측에 속했던 이들은 마치 입안에 똥이라도 굴러다니는 듯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명을 초조하게 만드는 존재는 다름 아닌 진소운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

진소운은 지금 이 거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두고, 정작 자신은 나타나지 않아 이들로 하여금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타들어 가는 속으로 불호를 열 번쯤 외쳤을 때. 그렇게나 기다리던 진소운이 나타났다.

“아, 조금 늦었습니다.”

몹시도 태연자약한 얼굴로.

‘아……미타불…….’

한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안으로 들어선 진소운은 아무렇지 않게 상석에 앉았고, 그것이 자리한 이들을 더 열 받게 만들었다.

“흑염룡…… 보자 보자 하니 도가 지나치군. 어째서 우릴 불러 모은 거지?”

“엥? 오기 싫으셨다면 오지 않으셨으면 될 일 아닙니까.”

탕-!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냐는 반응에, 마도문주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네놈이 련주령을 사용하지 않았더냐!”

련주령이란 말에 일명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허나, 이어지는 진소운의 이야기에 심장이 조금은 잠잠해졌다.

“당연히 중요한 일이기에 련주님께 부탁드렸다는 건 모르시겠습니까?”

“…….”

차갑게 가라앉은 진소운의 목소리.

결국 마도문주는 빠드득 이만 갈 뿐,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일명도 궁금해졌다.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일정도 미루고 련주령까지 사용하여 거물들을 불러 모은 것인가?

진소운은 손안에 든 종이 뭉치를 하나하나 나눠주기 시작했다.

일명 또한 내용이 궁금하여 남은 종이 한 장을 슬쩍 가져왔는데…….

“시발, 이게 무슨 개소리야!”

“뭐? 보상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일명이 종이를 살피기도 전에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

일명은 빠르게 종이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하마터면 그 역시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

[암수 적발 포상금 지급 내역서]

-상기 본인은 임자월 신묘일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범인을 찾아낸 진소운에게 포상금…….

아…… 사흑련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이거였어?

‘아미타…….’

불호를 외며 마음을 평정을 찾으려던 일명은, 이내 모든 걸 비워낸 후 진소운을 바라보며 지그시 웃었다.

‘빌어먹을, 나도 이제 모르겠다.’

소불(笑佛)이라는 별호가 어울리는 따뜻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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