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73화 (273/357)

273. <누군가의 악의(4)>

화창한 날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철순직은 동네 도박장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죽현방 방주의 차남이면서 뒷골목을 전전하는 꼴을 주변에서 달갑지 않게 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죽현방을 두고 형과 싸울 생각도 없었고, 그저 주어진 부와 권리를 좀 누리고 노름이나 하면서 사는 게 그의 목표였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왠지 달랐다.

착하지만 어리숙한 형이 도박장에 직접 와 철순직을 집으로 데려갔다.

“뭐야? 평소엔 내가 참석 안 해도 뭐라 안 했잖아.”

순한 성격의 형도 답답한지 한숨을 내쉰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은 거냐?”

철순직이 눈알을 뒹굴 굴렸다.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 있…….

“아! 종남 놈들이 오는 날이었지?”

“녀석아!”

어리숙한 형은 혹여 누가 들었을까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뒷골목 왈패들이 듣는다 한들 뭐 어쩐다고.

철순직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행여라도 그 언변이 새어나가선 안 된다!”

“참 내.”

이어 그는 형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래도 이런 겁 많고 어리숙한 면이 사람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알았수! 대신 행사 끝나면 술값은 형이 내주기요.”

“허! 이놈아! 언제까지 먹고 놀기만 할 거냐.”

언제까지냐고? 흠…….

철순직은 경쟁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 피식 웃어버린다.

“난 가능하면 평생 놀고먹고 싶어. 죽현방 같은 건 형한테 전부 다 맡겨 두고 말이지.”

“하여간에…….”

철순직에겐 이런 행사도, 종남도 다 심드렁한 것들이었다.

종남의 속가제자 출신이었던 사조의 인연으로 오 년마다 한 번씩 행하는 교류 행사.

죽현방의 역사가 삼백 년에 다다른 걸 생각하면 속가제자라는 것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죽현방은 12봉성의 기둥이 되는 문파.

12봉성의 목표가 장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교류회라는 이름의 접대 자리는 그저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사를 나누는 자리도.

서로의 무공을 선보이며 무론(武論)을 나누는 행사도 잘 버텼다.

흥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죽현방의 차남으로서 권리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놈 죽현방의 망나니라지?”

교류회의 마지막 행사인 비무.

그 상대로 마주 선 종남의 제자.

그가 대뜸 날린 조롱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흠…… 그게 최선을 다해 놀린 겁니까?”

“뭐?”

“망나니란 단어보단 등신, 병신, 이런 말이 더 상처가 될 텐데.”

이토록 타격감 없는 공격이라니.

“……여유 있는 척하긴.”

“그래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달갑진 않군요.”

자신을 멸시하는 말 자체엔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철순직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죽현방에 초대된 손님.

그런데 죽현방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철순직에게 이리 불손하게 대한다는 건, 다른 식솔들에겐 더 심하게 대한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니까.

자신이 죽현방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도 괜찮은 것은 그들이 식구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구들에게 불손하게 대했다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하게 차가워진다.

“그래도 손님인데 예는 좀 지켜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흥, 실력도 입담만큼 있는지 보겠다.”

그래서일까.

진지하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갑자기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 실력으론 이길 수 없었기에 왈패들 사이에서 배운 ‘무게 중심 옮기기’와 ‘자세 흐트러뜨리기’를 이용해 종남의 제자를 꺾었다.

“이 정도면 입담이 증명이 됐습니까?”

“…….”

입을 꾹 다문 종남의 제자.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위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철순직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환호성이 터지진 않아도 박수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종남의 제자가 죽현방의 제자를 꺾을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으니까.

하지만 왁자지껄했던 행사 분위기는 비라도 내린 듯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철 방주!”

추상같은 호통과 함께 종남의 원로들이 행사를 중단시켰다.

“어찌 종남의 뿌리를 둔 자가 천박하기 그지없는 술수로 상대를 습격한단 말인가!”

철순직은 조소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비겁과 정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적이 던진 흙먼지에 눈을 감아버려 죽은 후에 억울하다 성토하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뒷골목에선 목에 힘주고 다니던 고수들이 왈패들의 이런 술수에 고혼이 되곤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선경에서 살면 사람이 저렇게 얼빠지게 되나? 라는 생각을 할 때쯤.

“……!”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철순직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철순직의 아버지도, 삼촌도, 죽현방의 모든 어른들이 원로의 한마디에 무릎을 꿇었다.

“흠.”

종남의 원로는 그 광경을 너무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고, 12봉성의 기둥이라며 고고한 자존심을 부렸던 죽현방의 사람들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듯 행동했다.

허망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던 철순직의 머리 위로 건조한 음성이 날아든다.

“넌 왜 무릎 꿇지 않는 것이지?”

원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철현직이 부리나케 달려와 동생의 몸을 억눌렀다.

“얼른 숙……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철순직은 꼿꼿하게 그 압력을 견뎌내며 읊조렸다.

“종남의 적들은 항시 예의와 규범을 지키며 덤빕니까?”

“뭐라?”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조소가 터져나온다.

“종남 앞에 서면, 흑도의 광인들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예를 표하냐는 말입니다.”

“하! 쯔쯧,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로구나!”

마치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듯 경멸 가득한 시선.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죽현방주에게로 시선을 돌린 원로가 그를 다그쳤다.

“철 방주, 어찌할 건가?”

철순직 역시 제 아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 든든한 죽현방의 기둥이었던 아버지.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죄송합니다.”

“……!”

도끼질에 힘없이 꺾여버린 나무 기둥.

바닥에 머리를 깊이 숙여 사죄하는 아비의 모습이었다.

“아, 아버지…….”

“장로님께 깊이 사죄드립니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당당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와 달리 주눅 들어 있었다.

“자식을 잘못 가르친 저의 잘못입니다.”

머리를 박은 방주를 내려다보던 종남파 원로는, 길게 자라난 자신의 수염을 여유롭게 쓸어내렸다.

“인간이란 본디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반성을 하는 법이지.”

“제가 직접 금옥에…….”

“자기 자식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이가 어찌 한 문파를 제대로 이끌 수 있겠는가.”

“…….”

철순직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들이 오가고.

“…….”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버지는 종국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오늘부로 죽현방의 방주직을 내려놓겠습니다.”

죽현방 식솔들이 겨우 입을 틀어막아 보지만,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나온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징계를 자처하는 아버지.

“본산에는 내가 그리 이야기하지.”

그리고 그걸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종남의 원로.

그제야 알았다.

“하……!”

삼백 년이 지났음에도 종남의 족쇄는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대항하는 12봉성이라는 것조차, 종남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죽현방이 아무리 발악하여도 결국 종남의 시녀 신세를 벗어나진 못하리라.」

종남의 원로는 경멸의 시선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종남파 원로는 자비를 베푼다는 듯 방주를 일으켜 세웠다.

“다음 대의 방주는 우리 종남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 사람으로 선정해 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욕지거리를 내뱉고 삿대질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되레 감사를 전한다.

힘이 없기에 자신의 감정조차 솔직하게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더불어 죽현방이 그간 종남에 얼마나 개처럼 끌려다녔는지를 보여주는 단면.

독립적인 한 문파의 대소사를 또 다른 문파가 결정한다는 건, 결국 그 문파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철순직의 마음속 깊은 곳에 늘 자리하고 있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던 사문에 대한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버지…….”

“……조용, 조용 하거라.”

태산과 같이 넓고 든든했던 아버지의 등은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선 그리도 작게 보였다.

사내다웠던 굵고 진한 음성은 그날따라 몹시도 비굴하게 들려왔다.

철순직은 제 아비의 쓸쓸한 등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양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산책을 좋아하지 않는 철순직이 산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그 화창한 날, 철순직은 반드시 하늘을 무너뜨려 버리겠다 다짐했다.

#

왜 갑자기 과거의 일이 떠오른 것일까?

아니, 애초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되뇐 것이다.

눈앞의 두려운 적 앞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진소운!!!”

그날 각오했다.

얼마나 피를 흘리든, 세상이 어찌 되든 반드시 하늘을 무너뜨리겠노라고.

세상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자신의 생을 갈아 넣고, 그것으로 안 되면 자식의 생을 갈아 넣고, 그것으로조차 안 되면 그 후손의 생을 갈아 넣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오백 년간 세상을 지배했던 하늘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렇게 노예로 살 순 없으니.

그러니 한낱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는 없다.

그 돌부리가 심장을 찢고 머리를 부술 정도로 위협적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위협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 돌부리가 하늘이 되어선 안 되기에.

철순직은 점차 가까워지는 홍군에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예측이 틀어질 것이다.

진소운은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시련을 또 극복해 낼 것이다.

“또 너다, 진소운! 또 너야……!”

어찌 인간의 발전 속도가 이리도 빠른지.

그가 용소아처럼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것도 아닐 텐데.

‘그런데 어째서……!’

그저 똑같이 범인(凡人)의 자질을 가진 진소운과 자신의 격차가 이리도 크단 말인가.

정녕 노력의 차이란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직접 움직인다.

자신이 만든 예정된 일들을 확정 짓기 위해.

“진소운 네놈도 여기까지다!”

백군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홍군의 인원들이 탈락을 각오하며 자신을 막아섰지만, 철순직은 되려 더 과격하게 검을 휘둘렀다.

촤악-

퍽!

옷깃을 잡아당겨 무게를 흐트러뜨리고 관자놀이에 검병을 꽂아 넣는다.

홍군의 인원들이 한 수에 놀라 눈을 부릅뜬다.

철순직이 평소의 냉철을 잃고 소리쳤다.

“내공을 전폐하는 훈련을 너희만 했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무공을 익히기 전부터, 아니 무공을 익힌 후에도 뒷골목 왈패들과 싸우며 내공을 쓴 적이 없었다.

그건 너무 재미없으니까.

치열함이 떨어지고 긴박함이 없으니까.

흥분이란 감정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가장 크게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위협을 극복했을 때의 짜릿함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만족감을 준다.

그렇기에 철순직은 백군의 그 누구보다 백병전과 박투술에 능하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완벽히 알고 있다는 듯,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바닥의 흙모래를 쥐어 상대의 눈에 뿌린다.

“으악!”

왈패들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기술.

예상치 못한 기습에 진소운의 부대원들이 눈을 비비는 사이, 그들의 명치를 때리고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다.

“꾸엑.”

쓰러지는 학관생을 밟고 앞으로 튀어 나간다. 그러자 다른 인원들이 맹수처럼 연이어 달려든다.

흥분으로 이성을 잃은 듯 보이는 이들을 제압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더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분노에 잠식된 이성이 경고를 보낼 만큼 위협적으로 흥분한 모습.

철순직은 그 흥분에 온전히 몸을 내맡겼다.

홍군들도 악에 받쳐 소리친다.

“막아!”

권각술을 익힌 이들이 동시에 철순직에게로 달려든다.

철순직의 시선이, 그들 사이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이에게로 고정된다.

“남화성!”

짓씹듯 부르는 소리에 남화성의 손이 주춤거리는 순간.

철순직의 손안에서 검집이 날아가 남화성의 시야를 가린다.

이윽고 시린 목소리가 날아든다.

“배신을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적이라 생각한다면 자비 따윈 없어야 하는 법.”

“……!”

퍼퍼퍼퍼퍽!

요혈을 노리며 뻗어 나오는 철순직의 검술에 남화성은 쉽사리 대응하지 못한다.

뒤로 물러나며 철순직을 상대하기엔, 이미 지난 전투에서와 백산을 오를 때 체력을 다 써버렸다.

누구보다 남화성을 잘 아는 철순직.

그가 남화성의 가슴에 한 번 더 비수를 꽂는다.

“그런 얕은 각오 따위론 삼원문의 미래도 뻔하다.”

“시부럴…… 엿 같은 소리 마!!!”

자극받은 남화성이 방어를 풀고 대응하려는 순간.

섬전같이 쏘아지는 발길질이 남화성의 목울대를 때렸다.

“커억 커억, 커흑!”

아무리 수련해도 단련할 수 없는 약점 중의 약점.

몸의 모든 감각이 위기감을 느끼고 남화성은 본능적으로 양손을 모아 목울대를 보호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닥을 가볍게 차고 오른 철순직.

“보라, 삼원문의 주력 무공인 권각술조차 죽현방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 않는가.”

몸을 한 바퀴 돌린 철순직이 팔꿈치로 남화성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뻐억-

그 거대한 몸이 발길질 한 방에 눈깔을 뒤집으며 뒤로 넘어간다.

남화성이 쓰러지며 돌격부대가 순간 주춤한다.

그 사이를 철순직의 중대가 용기백배하여 파고들어 홍군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밀어! 밀어버려!”

“놈들이 고의로 칼날을 세웠다! 대응해!”

“어차피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지쳤어! 그 기회를 놓치지 마라!”

화차처럼 거칠 것 없이 밀어닥치던 홍군의 기세가 확 꺾였다.

지금 홍군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며 원군이 오길 기다리는 것일 터.

하지만 철순직은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진소운이라면 잠자코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상식을 넘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가자아!”

“가자아!”

잠깐의 소강 동안 인원을 규합한 진소운은 다시금 그들을 창날 모양으로 배치한 후, 백군 진영을 찌르기 시작했다.

“진소운…….”

한낱 돌부리?

아니다.

그는 용소아보다 거대한 태산이다.

감히 하늘에 오르지 못하게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태산.

그러나 이 태산을 넘지 못하면 하늘을 무너뜨릴 수 없다.

태산조차 쓰러뜨리지 못한 이가 어찌 하늘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그날, 하늘 앞에 납작 엎드렸던 아버지의 왜소한 등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진소운……. 너를 증오한다.”

사방의 함성과 비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작은 목소리였건만, 진소운은 그 말을 들은 듯 자신을 응시한다.

그가 답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왜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

굴욕의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솔직하지 못했던 감정을 토해낸다.

“진소운, 너를 원망한다. 너에게서 눈을 뗄 수 없기에.”

그간 켜켜이 쌓여왔던 울분과 분노가 빗장이 풀린 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철순직, 너를 적대한다. 너에게서 눈을 뗄 수 없기에.]

각오가 꺾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너를 저주한다.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으니.”

겨우 태산이 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너를 경멸한다. 같은 것을 바라고 있으니.]

한 자루의 검으로 태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달려간다.

이 검은 장차 하늘을 무너뜨려야 하니.

“진소운!!!”

“철순직!!!”

수많은 인파를 뚫고 철순직은 곧장 진소운을 향해 달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