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누군가의 악의(5)>
철순직.
그는 소름 끼치는 자다.
내 의지로 움직이는 팔과 다리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가 조종하는 실에 묶여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의 손에 놀아난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그가 펼친 거미줄에 뒤엉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정체를 파악한 이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그를 회피하려 한다.
생존 본능이 신호를 보낸다.
위험한 천적이라고.
피해야 한다고.
정면을 바라보니, 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사이 은호가 내 앞을 막아선다.
난 은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물러서라.”
“하지만…….”
나와 시선을 마주한 은호가 뭔가를 깨닫고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깃발을 주십쇼.”
“깃발을?”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대사형이 이기실 거 아닙니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래.”
검진을 지휘하던 은호가 깃발을 받아 들곤 뒤로 빠진다.
백호검진은 이미 무너졌고, 사방은 아수라장이 되었기에 이제 검진이 무의미한 상황.
나는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유려한 혓바닥이 힘을 발휘할 사이가 없지?”
철순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씩 조금씩 빠르게.
그리고 이내, 최고 정점의 속도에 다다랐을 때.
쐐액-
달려간 속도에 더해 흑룡검을 내리찍는다.
땡-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맞부딪치며 공명음이 울린다.
급하게 달려온 만큼, 서로에게 번지는 충격이 크다.
철순직이 넘어지지 않게 다섯 걸음 물러서고, 나 또한 세 걸음 물러선다.
“진소운…….”
“이젠 진 대표라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군.”
표독스런 눈빛이, 살기 등등한 기세가 너무도 기껍다.
언젠가 이런 식으로 한 번쯤은 맞서보고 싶었으니까.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러나 그는 전혀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하아압!”
순식간에 죽현방의 청죽검법이 펼쳐진다.
천하삼십육검법에 뿌리를 둔 만큼 청죽검법은 묵직한 중검의 묘리를 가졌다.
내공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검이 때릴 때마다 마치 종 속에서 그 충격음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는 것 같다.
땡- 땡- 땡-
내공을 쓸 수 없는 대신, 그가 몸무게를 실어 검을 휘두른다.
임기응변이 어지간한 낭인들 뺨을 칠 정도.
나도 모르게 속으로 순수하게 감탄해 버리고 만다.
그런가? 넌 이리도 싸움에 숙달되었는가.
전생에선 단 한 번도 그의 실력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리도 패도적이면서, 어찌 전생엔 한 번도 이 기량을 선보이지 않았는가.
왜 한 번도.
어째서 단 한 번도.
‘사선을 넘나드는 그 속에서 제대로 된 동료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가?’
철순직은 재빠른 동작으로 허공에서 몸을 옆으로 두 번 돌리며 검을 내려친다.
나 또한 양손으로 흑룡검을 잡아 그의 공격을 받아쳤다.
떠어엉-
손이 떨리고 그 떨림이 팔뚝과 어깨 전체로 번져간다.
진동을 멈추기 위해 검을 바닥에 내리꽂은 후, 곧장 소천검법을 출수한다.
쐐애액-
검은 내가 예측했던 방향 그대로 나아간다.
“흡!”
두 눈을 부릅뜬 철순직이 재빨리 검을 들어 올리며 막아서고.
채채채채챙-
또다시 산 전체로 칼의 울음소리가 퍼져나간다.
버티고 선 두 검.
중검과 쾌검의 대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호흡을 가져오는가다.
중검에 밀린 쾌검은 부러져 버리고, 쾌검에 말린 중검은 쓰러진다.
“흐읍……!”
서로가 서로의 호흡을 가져오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채채채챙-
한순간, 철순직의 요혈이 열린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측하면서도 두려운 표정 따윈 짓지 않았다.
되려 분하디분하다는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
“이번 생에선 내가 이겼다.”
일순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철순직의 명치에 만화무적권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순직아!”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퍼퍼퍽!
등으로 만화무적권을 대신 맞아낸 철현직.
철현직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구르는 사이.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철순직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빌어먹을!’
내가 중검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러나려는 순간.
“……!”
바닥을 뒹굴던 철현직이 내 다리를 처절하게 부여잡는다.
“순직아! 지금이다!”
철현직의 외침과 함께, 한 바퀴 회전하며 검에 잔뜩 힘을 실은 철순직이 허리를 베듯 검을 휘두른다.
순도 높은 진심이 담긴 동작.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나온다.
미친놈, 단지 평가란 걸 잊은 건가.
……하지만 어쩐지 이해가 간다.
나 또한 지금의 평가가 단지 점수에 불과하단 사실 따윈 잊고 있었으니까.
유운신공 연화(蓮花)를 극성으로 펼친다.
검면에 닿는 철순직의 중검 때문에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으아아악!”
챙!
겨우겨우 철순직의 검을 흘리고는 곧장 발에 붙은 철현직을 떼어냈다.
“순직아…… 지금…….”
시발 뭘 자꾸 지금이래.
퍽.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철현직이 꽥- 하는 소리와 함께 기절하자, 철순직은 무감한 눈빛으로 제 형을 한번 쳐다본 후 자세를 다잡는다.
“운이 좋군. 진소운.”
“이제 그 거지 같은 존대는 갖다버린 건가?”
“……이상하군. 다들 존대를 받으면 좋아하던데.”
나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그 안에 음흉한 마음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나 그렇지.”
“그런가?”
“그래.”
제 형이 쓰러진 모습에 분개할 모습을 보일 법도 하건만 일절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
이윽고 놈의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성모란과 이금표, 두 명만 살리면 된다 생각했겠지. 내 작전을 말아 먹고 그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고.”
“…….”
철순직이 눈을 번뜩 빛내며 몸을 앞으로 더욱 숙이자, 검이 더욱 무거워진다.
“애당초 내가 그것마저 예측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냐?”
마치 그의 기분을 대변하듯.
“진소운, 네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떠어엉- 떠어엉- 떠어엉-
금강무괴철임을 알면서도 검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내 계획을 망친 이상 네놈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철순직이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인 모습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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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엔 철순직을 경멸했다.
부대 전체의 승리보다, 자신과 사문의 안위만을 챙기는 그 이기심이 역겨웠으니까.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소정대뿐 아니라 모든 무사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힘으로 굴복시키기엔 실력이 부족했고, 두뇌로 맞붙기엔 그는 너무 교활했으니까.
제갈천기도 단 한 번을 제외하곤 매번 그의 계략에 말려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를 싫어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사실 부러웠던 거다.’
끝까지 자신들의 생을 이어가는 그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사람들을 살려내는 그를.
그래, 부러웠던 것이다.
지탄을 받고 욕을 먹으면서도 매번 살아남는 그와 그의 사문 사람들이.
나는 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내겐 더 이상 지킬 사람이 남지 않았기에.
“크윽……!”
그를 뼛속까지 경멸했던 것은 결국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지 못한 나에 대한 혐오에서 발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질 수 없다.
아니, 져선 안 된다.
다시금 전생의 과오를 답습하지 않을 테다.
죽어버린, 낙오해 버린 동료의 흔적을 보며 그저 숨어서 상대를 욕하기만 하는 짓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러니 이곳에서 멈출 수 없다!”
중검의 충격파에 쓰러지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만화무적권을 휘둘렀다.
큰 타격은 줄 수 없지만, 잠깐 시야를 가리는 정도로는 충분하다.
“큭!”
잠시간 눈을 찌푸렸던 철순직의 시선이 다시 돌아오는 순간.
쐐액-
거침없이 흑룡검을 내어 찔렀다.
그의 실력을 안 이상, 그가 이 정도 공격에 쉽사리 죽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쐐애액-
간발의 차로 그의 귀에 상처를 냈고, 그는 고개를 꺾은 채 곧장 검병으로 내 옆구리를 찔러온다.
잘못했다간 갈비뼈가 날아갈 위기.
흑룡검을 회수하는 동시에 팔꿈치로 턱을 가격했다.
퍽!
충격에 비틀거린 그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뒤범벅되어 있다.
“왜…… 왜 매번 방해하는 거냐 진소운…….”
평소의 반듯한 모습 대신 산발이 된 머리로 고개를 숙인 철순직이 짓씹듯 내뱉는다.
“난 하늘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너 따위가……! 내 대의를 막는 것이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오지만 의문은 들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략 알 것 같았으니까.
그가 다시금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어째서…… 매번 내 앞길을 막느냐?”
떠어엉-
“왜…… 어째서!”
떠어엉-
“매번……!”
철순직의 검과 흑룡검이 맞부딪치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묵직함은 없다.
빈틈을 노리는 속도 또한 없다.
그저 발악만이 남아있을 뿐.
“내 앞길을 막느냔 말이다!!!”
떠어엉-
나는 충격에도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되려 철순직이 내 검과 맞부딪친 후에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다.
하지만 그는 목이 터져라 발악했다.
“난 절대 물러설 수 없단 말이다!”
휘청거리는 그를 바라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
분과 악만 남은 그 눈을 응시한다.
마치 전생에 내가 지었을 법한 표정.
“나 또한 절대 물러설 수 없으니.”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그가 희미하게 비틀린 웃음을 내비친다.
“……그런가. 진소운 너도 나와 같은 것을 바라는가?”
“…….”
“그럼 왜 나는 안 되는 것이지?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나 또한 전생에서 철순직을 보며 스스로에게 수없이 했던 질문.
이제는 그가 나를 향해 외친다.
“왜 나는 넋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느냔 말이다!”
분명 전생에선 그 답조차 가늠하지 못했었건만, 어느새 나는 그 복잡했던 질문의 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예상외로 단순했다.
“내가 더 절박하니까.”
“…….”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것은 그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답은 그 무엇보다 단순 명쾌하다.
“철순직 너보다!”
그리고 폐부를 깊게 찔러 들어온다.
“내가 더 절박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단지 그뿐이다.”
“…….”
철순직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럴 리 없다. 난 누구보다…… 누구보다…….”
철순직의 공허한 시선이 나와 태을문의 인원들을 바라본다.
다섯 명의 검을 받아내며 끝까지 버텨내고 있는 금표를…….
“누구보다…… 더 절박하게…….”
산발이 된 머리로 떨리는 검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는 사련을…….
그러다 이내 입을 꾸욱 다문다.
그의 턱이 볼록 튀어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빠드득.
이윽고 입가로 붉은 피가 흐른다.
고개를 숙인 채 부들거리던 그가 눈빛을 번뜩이며 나를 응시한다.
“그렇다면…….”
철순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정말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얼마나 절박한지…….”
축 늘어진 그의 두 팔 위로 다시금 터질 듯 핏줄이 튀어나온다.
“……이번엔 내가 너의 태산이 되겠다.”
나 또한 부들거리는 팔에 힘을 모두 불어넣었다.
“너 아니어도 내 앞길 막겠다는 놈이 천지에 그득그득하다앗!”
쐐애액-
흑룡검이 쏘아짐과 동시에 철순직이 검면으로 흑룡검을 막아선다.
채채챙.
옴짝달싹하지 않은 채 방어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철순직.
검을 휘두르는 대신 벽이 되기로 한 철순직은 그가 말한 대로 하나의 태산이 되어 버렸다.
쐐애애액-
“얼마든지 덤벼봐라!”
내공 없는 쾌검의 속도는 한계가 있는 데다, 소천검법이 눈에 익은 철순직에겐 단순한 검의 궤적은 통하지 않았다.
“쉬이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진소운.”
“……그런가?”
“그래…… 너 또한 느껴봐라, 앞을 막는 존재가 얼마나 역겨운지를…….”
하지만 그 태산은 전혀 두렵지 않다.
왜냐고?
“넘지 못하면 부수면 그만 아닌가.”
“뭐?”
나는 소천검법 대신 흑룡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철순직, 네가 그러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철순직이 휘둘렀던 청죽검법을 휘두른다.
정직하고 올곧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기본에 충실한 중검.
단단한 벽을 부수기에 충분한 검이다.
데에엥-
그가 펼쳤던 그대로를 똑같이 펼쳐 보인다.
데에엥-
놀란 철순직의 두 눈이 커다래진다.
“이 무슨…….”
내공의 운용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무공을 사용하는 건 미친 짓이다.
대부분의 무공은 내공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까.
평생 그 무공에 대한 수련과 연구가 없는 이상, 내공 없이 효율적인 무공을 쓸 수 없으니.
하지만 난 걱정할 필요 없다.
지금껏 철순직이 자신이 쌓아온 시간을 보여주었으니.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펼치는 최상의 청죽검법.
“말도 안 돼!!!”
나는 그저 그가 펼친 청죽검법을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것이 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최상의 청죽검법이 될 테니까.
떠어엉-
그가 나라는 벽을 부술 듯 때린 것처럼.
떠어엉-
이번엔 내가 철순직이라는 벽을 부술 듯 때린다.
떠어엉-
내공 대신 무게를 담고,
속도 대신 회전을 가미한다.
떠어엉-
쩌적.
처음으로 철순직의 검에 작은 금이 생겨난다.
“이, 무슨!!!”
당황하여 뒤로 물러나려는 철순직.
나는 지체 없이 제자리에서 세 바퀴를 돌아 청죽검법을 휘둘렀다.
퍼어어억-
이윽고.
쩌엉-
쨍강-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철순직의 검이 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