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탈출(3)>
사활단 일(一) 대 대주.
그것이 지금 일각의 위치였다.
정식 절차를 거쳐 받은 임명도 아니었고, 임명장 하나 없었지만 일각은 자신이 일(一) 대 대주라는 것에 책임감을 느꼈다.
“따라오지 않는 것 같군요.”
그리고 지금에 와선 자신이 그 임무를 훌륭하게 해낸 데 참을 수 없는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진 단주! 정말로 해냈습니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게.
최악이라 생각할 수 있는 상황들이 연달아 터졌지만, 결국 해냈다.
소림의 뒷배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정도회라는 권력이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니었고.
무림맹이 나서서 자신의 손을 떠난 채로 일이 해결돼 버린 것도 아니다.
자신의 힘과 학관생들의 단결된 마음.
그리고.
“다들 끝까지 긴장 놓지 마라!!”
그 모두를 지휘했던 진소운의 결단 덕분에 이 어렵고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일각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기분.
과거 면벽을 통해 역근경의 깨달음 일부를 얻었을 때만큼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하지만.
“뭐가 좋다고 쪼개는 거냐. 대머리.”
“…….”
자신의 또라이 상사는 이 기쁜 와중에도 상대의 기분을 망치는 데 아주 큰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천성이라고 봐야 할까나?’
겉에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금언이 떠오르지만, 아무리 말씀을 되뇌고 되뇌어도 본질에만 집중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결국은 밤송이에 가득한 가시도 밤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혼란을 주는 데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싶었다.
“진 단주. 기쁘지 않으십니까?”
학관생들 또한 자신들이 그 수라장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과 피로로 힘든 와중이었지만, 발걸음이 늦어지는 사람은 없었다.
“진 단주가 해낸 일이지 않습니까.”
일각의 말에 진소운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뭘 다 끝난 것처럼 멀뚱대고 있어. 아직 끝나려면 멀었구만.”
“그게 무슨…… 결국 떨쳐내지 않았습니까?”
“으휴. 운남성 경홍 인근에서 가장 큰 무림맹 지부가 어디야?”
운남성은 흔히 중원이라 불리는 곳에서도 가장 외곽에 위치한 성이다.
종종 새외로 포함되기도 하는 이곳은 무림맹의 권력 구조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렇기에 한 성에 여러 개 혹은 십여 개에 가까운 지부가 설립되는 중심 성과 달리, 운남성은 곤명에 작은 지부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어…….”
거기에까지 생각이 닿자, 일각은 깨달았다.
“그래, 우리 아직 안 끝났어.”
“그, 그래도.”
“물론 알아. 더 이상 쫓아오는 건 무의미하다고 저 새끼들도 판단하겠지. 그런데 뭐가 됐든 방심하다 뒤통수 맞는 것보단 낫지 않아?”
“…….”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금 심각한 표정이 되는 진소운.
일각은 잠시 자신의 우둔함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묵림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안심했던 건, 천하가 무림맹의 휘하에 있다는 당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태껏 고생한 이유가 그런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면…….
이번의 힘든 일을 겪고도 정작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 된다.
‘어리석구나 각아. 어리석어.’
언제부터 세상을 다 아는 척, 삼라에 대해 깨달은 척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하건만.
그는 자신 앞에 선 태산 같은 사내를 바라봤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예비 지부라도 알아봐야 할까요?”
“무관이랑 구분도 안 되는 코딱지만 한 문파에 들어가서 뭐 할 건데. 그들하고 같이 죽을까?”
“……크흠. 아무리 그래도 이 인원들로 곤명까지 가는 건 무리입니다.”
부상자들도, 부상을 입지 않은 자들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아마 이 이상부터는 적의 칼날에 죽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피로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진소운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나도 알아. 그래서 생각 중이야.”
“뭘…… 말입니까?”
일순 진소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소문이 또 이상하게 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소문?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지?
워낙에 소문이 많은 인간이니까. 허무맹랑한 것도 너무 많고.
무엇보다 본인은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으니까 생각지 못했건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지금 신경 쓸 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사의 고락을 넘어섰고, 미증유의 적이 나타나 학관생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소문’ 때문에 주저한다니.
“진 단주, 그 무슨 어리석은 말입니까.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한다니요.”
지금은 남의 물건을 훔쳐서라도 살아남아야 할 때다.
살아남아 묵림에서 겪은 바를 무림맹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
그래야 이 무서운 적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테니까.
“왜 진 단주답지 않은 고민을 하는 겁니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생존이 중요한 때가 아닙니까?”
“그건 나도 아는데. 니들이 상명하복을 핑계로 나한테만 손가락질할까 봐 그렇지.”
손가락질?
일각은 두피 위로 열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대체 누가…… 누가!! 진 단주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진 단주의 단호함이 없었다면 학관생들은 묵림에서 모두 죽었을 겁니다.”
“아니, 그건 나도 아는…….”
“설사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한들!! 한 줌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것으로 불만을 품는 자, 백안시하고 음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일각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나 일각이 나서겠습니다.”
어찌 이런 성과를 낸 사람을 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일각은 스스로가 화가 나서 더욱 쏘아붙였다.
그러나.
“……흠. 그래? 그렇단 말이지. ”
진소운은 왠지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일(一) 대주 네 의견인 걸로 하자. 어때?”
“좋습니다.”
만약 오물을 맞아야 할 일이라면 얼마든지 맞을 자신이 있다.
일각은 그렇게 자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금방 그 일을 매우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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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하아.”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환희도 잠시 종추악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지경이었다.
지금 멈춰 설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대로 행하기엔 몸이 너무 피곤했다.
아니, 죽을 것 같았다.
이미 한참 전에 자신이 제대로 달리고 있는지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밤낮없이 달리고 있었으니까.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지부가 있는 곤명까지 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작은 문파밖에 없는 이곳에서 아무 문파에나 들어갔다간 제대로 쉬기는커녕, 그들과 함께 살인멸구를 당할지도 몰랐다.
더구나 부상자가 이렇게나 속출한 상황에서 이 많은 인원들을 모두 수용할 만한 문파가 없다는 것도 문제겠지.
인원을 나눠 지원 요청을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모두가 뭉쳐 있을 때도 버거웠던 상대인데.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대응한다는 건 더욱 우스운 일이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의 상황.
묵림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
종추악은 자신이 단주가 아니라는 점에 커다란 안도를 내쉬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주면 좋겠는데.’
솔직히 이쯤 되니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말만 그렇다는 거지만.
어쨌든 본산에서 가장 힘든 수련을 할 때도 이것보단 덜 힘들었으니까.
그때.
“조금만 더 버텨라! 금방 쉬게 해줄 테니!”
전방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소운의 것이었다.
“우리 일(一) 대주 일각이 아주 훌륭한 의견을 냈다. 문제가 좀 있는 의견이었지만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터.”
응? 왜 갑자기 일각 이름이 나오지? 이 상황에서 굳이……?
하지만 뒤이어 들린 이야기에, 앞서 품었던 의문은 산산이 사라졌다.
“그곳에 닿기만 하면 치료를 받고 호위 속에서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겠다!”
그런 방법이 있다고?
치료도 받고 편하게 쉴 수 있다니…….
이 일대에는 그만한 백도 문파가 없었다.
혹여 무림맹과 연이 닿은 상단이나 표국이 있는 걸까? 생각해 봤지만 당장 그의 머리에서 떠오르는 곳은 없었다.
운남이란 곳 자체가 워낙에 중원과 떨어진 지역이라 몇몇 문파를 제외하곤 지부도 설치하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뭔가 생각이 있겠지.’
생각하는 데 기운을 쓰는 것에조차 지쳐버린 종추악은 잡념을 지웠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사활단 내부에서 웅성거림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 지금 어디 가는 거지?”
“그러게……. 뭐 단주가 워낙 자신 있게 이야기했으니까. 방법이 있는 거겠지.”
“내가 헷갈리는 건가? 여긴 우리가 갈 만한 곳이 아닌데……?”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직 기운이 남았나 보다.
종추악은 무엇이 되었든 어떤 방법이든 빨리 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었으니까.
“잠깐, 잠깐, 이, 이거 뭔가 이상해.”
“그, 그러게.”
혼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서, 설마 아니겠지?”
“일각 스님이 의견을 냈다고 하던데.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
웅성거리는 시끄러움이 더욱 가속화되자 종추악은 짜증스레 반응했다.
“조용히 달려라. 단주 명령이잖아!”
“종 형. 아무리 그래도…….”
“왜? 살고 나니까 갑자기 명령을 받았던 게 부끄럽기라도 한가? 그러고도 네놈들이 백도의…….”
“아니, 종 형! 잘 보시오. 여기! 여기가 어딘지 아시오?”
종추악은 콧김을 뿜으며 사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내가 운남의 지리 따위…….”
그리고 상대가 가리킨 곳엔.
“…….”
뱀과 거미 모양의 장대가 길을 따라 주르륵 서 있었다.
“저걸 보고도 모르겠소?”
“…….”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저 문양은 백도 제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문양 중 하나인 걸.
“……왜, 왜 여기에…….”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전방을 바라보니 거대한 크기의 전각이 보인다.
나무가 아닌 석축으로 만들어진 입구는 높게 지어져 마치 성벽을 보는 듯하다.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양은 언제든 이것이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변경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문 상단엔.
“이곳은…….”
이제껏 지나오면서 봐왔던 문양의 주인이 있는 장소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 만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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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독문의 문주 단세웅은 간만에 이른 시간에 침소에 들었다.
요 며칠간 계속되는 묵림의 소란에 밤잠을 뒤척인 탓에 피로가 쌓였던 것.
‘빌어먹을 놈들.’
십이(十二) 년 주기로 한 번씩 방문하는 학관생들은 만독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물론 그들이 만독문에 피해를 끼치리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아직 강호 초출에 불과한 애송이들.
다만 그 애송이들이 묵림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어찌 되었든 묵림은 만독문의 가장 큰 보고(寶庫)나 마찬가지니까.
수없이 많은 독물을 구할 수 있고, 매번 새로운 독물이 또 나타나는 곳.
묵림은 당가에서도 지부를 설립할까 고민할 정도로 독인들에게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을 애송이들이 휘젓고 다니며 훼손한다 생각하면, 열이 뻗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물론 이전까진 매번 방문했던 곳에서 주둔지를 형성하고 시간을 때우다 갔기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꽤나 소란을 일으켰다.
뭔 짓거리들을 하는지 폭발음이 연신 터지고, 밤에는 무수히 많은 횃불을 켜기도 했다.
‘신령 사냥이라도 하고 있나? ……이번 기수는 미친놈들이 많나 보군.’
애당초 그것들은 사냥 가능한 대상이 아니니까.
단세웅은 직접 사냥에 나서봤기에 더욱 잘 안다.
그놈들은 인세의 존재가 아니라, 선계에서 뚝 하고 떨어진 놈이 분명하다.
아무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묵림에 들어가 봐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만독문 내에서도 나왔지만, 끝내 묵림에 사람을 보내진 않았다.
무림맹은 이상하리만치 학관생들의 행사에 민감하니까.
혹여나 추후 귀찮아질 걸 생각하면 차라리 눈감고 귀를 막아, 애당초 인연을 만들지 않는 게 제일이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도중,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놈이 학관 대표라 했지.’
사흑련에서 만났던 백도 놈.
가까이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 녀석이었다.
비공식적이지만, 진정 사흑련을 구한 인물이니까.
‘신기한 놈이라니까.’
사흑련에 숨어든 간자를 찾을 때는 당최 누가 흑도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미친 짓거리를 했고.
주적이나 마찬가지인 사흑련의 총군사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던진 놈이었다.
사흑련의 핵심 위치에 있는 단세웅으로선,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키는 놈이 분명했다.
‘흐음…… 이번에 온 김에 만나러 가볼…….’
생각을 하던 단세웅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는 사흑련에게 있어 은인인 존재다.
자신이 만나러 간다면 분명 불편한 소문에 얽힐 것이고, 이는 차후 무림맹 출세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은인에게 그런 불편을 끼칠 순 없지.
더구나 자신에게도 쓸데없는 관심이 붙을 터.
만약 그놈을 다시 만난게 된다면…….
‘그건 전쟁터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흑도와 백도는 본디 그런 사이니까.
그때.
뚜벅, 뚜벅, 뚜벅.
복도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들려오는 시비의 긴장된 목소리.
“무, 문주님. 주무십니까?”
자신이 얼마 만에 편하게 침소에 드는지 뻔히 아는 놈들이 이 시간에 방문이라니.
단세웅은 음성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뭐냐!”
“그, 그, 지금 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짜고짜 나와보라니.
이 늦은 시각에 문주인 자신에게?
단세웅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 그게…….”
왠지 문밖에선 주저함이 느껴졌다.
결국 단세웅은 거칠게 이불을 걷고 나와 쾅 하고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 시간에 방해를 하는 것이야!!!”
“그, 그것이 손님…… 아니, 그 적…… 하아, 그걸 뭐라 해야 하지…….”
중언부언하는 부하의 태도에 단세웅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네놈…… 일주일 내내 항문으로 피를 토하고 싶은 것이냐?”
“히익!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문주님을 찾는 놈…… 아니,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찾는다고?”
이 시간에?
조금 이르게 침소에 들긴 했지만 충분히 늦은 밤이다.
감히 운남의 야왕이라 불리는 단세웅의 밤 시간을 방해할 수 있는 간 큰 놈이 누구란 말인가.
단세웅은 장포를 걸치고 부하를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장포 내에는 어떤 적이든 다섯 걸음을 떼기 전에 혈수로 만들어 버릴 독들이 한가득했다.
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침소를 벗어나 전각들을 거쳐, 연무장을 지났다.
그리고 대문에 다다랐을 때.
“하…….”
만독문의 부하들이 전부 시립해 있는 모습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냐?! 누가 공격이라도 해온 것이냐!”
“처음엔 저희도 그런 줄을 알고…….”
오늘따라 맘에 안 들게 말끝을 흐리는 부하 놈을 지나 대문 앞에 당도했다.
그러자 허둥지둥하던 문지기가 몸을 움직였고, 곧 커다란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아! 안녕하세요!”
……그 문 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인사말을 건네며 서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혈색이 더 좋아지셨네요.”
너무 당연한 듯 안부를 묻는 태도에, 단세웅은 자신이 이놈과 친분이 있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진소운…….”
“아! 기억하시는군요. 문주님.”
이윽고 단세웅의 시선이 진소운의 뒤로 향한다.
뒤는 더 가관이다.
백도의 제자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거지꼴을 한 채로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 그게 말입니다.”
태연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싱긋 웃는 진소운.
“간단히 말해서 좀 일이 있었거든요.”
너무 간단한 설명에 기가 차 반박을 하려던 찰나.
“그래서 말인데…….”
보무도 당당한 진소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상자 치료와 숙식 제공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치 맡겨 놓은 보따리를 찾으러 왔다는 듯,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
단세웅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급박하면 이리 찾아왔겠습니까.”
번들거리는 얼굴로 싱긋 웃는 진소운의 말이.
“이해하시죠?”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