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54화 (354/357)

354. <적과의 조우>

백도와 흑도.

이 봉합되지 않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은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전에 발생했다.

그러니까 무림맹이 형성되고 이백 년 후의 이야기. 아직 백도와 흑도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던 시대의 이야기다.

당시 무림맹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무림맹의 구심점이었던 칠파(七派)는 무림맹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지역, 더 나아가 성의 대표되는 문파로서 영향력을 흩뿌리고 있었고.

무림맹은 그저 하는 일 없이 각 문파의 돈이나 받아먹는 친목 회의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당시 무림맹은 칠파뿐만 아니라 오대세가의 전신인 삼대세가와 흑도로 표방되는 삼문일방과도 교류를 나누고 있었고, 녹림이나 수로채들도 종종 무림맹을 주루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강제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랬기에 실질적으로 금전적 책임을 지고 있던 칠파의 입장에선, 애당초 무림맹이 하는 일이 자신들의 가산을 탕진하여 남들 노는 공간을 제공하는 망나니짓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슬슬 무너져 가는 무림맹의 해체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그때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야인 출신임에도 독문무공으로 절대 고수의 반열에 오른 구양극이 당시 무림맹주였던 초월신검 자양을 죽인 것.

중원에 적을 두고 살면서 누가 누구의 손에 죽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문제는 그들의 신분이었다.

특히나 반쯤 친목회장 격에 가까운 위치였던 무림맹주가 죽었다는 사실이 꽤나 큰 파문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하는 일이라곤 연회를 열고 술과 안주를 나누며 시시덕거리는 게 다였지만, 어쨌든 명목상 무림맹주는 백도를 표방하는 이들의 대표격인 자리였으니까.

무림맹주가 무당과 한 다리 걸친 입장이 되다 보니,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성토하는 유족들의 반발에 무당파도 마냥 뒷짐을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칠파(七派)는 무림맹의 이름으로 성명을 내고 구양극을 체포하여 금옥에 몇 년 가두는 것으로 일을 잠재우고자 했다.

애당초 세력이 없는 이였고, 성향도 완전히 백도 쪽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부담가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응은 격렬했다.

흑도의 삼문일방을 비롯해 녹림채와 낭인들이 극렬히 반발하며 구양극을 비호하기 시작했던 것.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극렬히’ 반발했다는 부분이다.

상대의 반응이 과민하다 생각될 정도로 격렬하다 보니, 가볍게 사건을 넘기려 했던 이들도 서서히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도 체면이 있으니까.

죄를 단정 지은 이상, 이제 와 돌이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구양극이 죽인 인간은 무림맹주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흑도의 극렬한 반응 때문에 조악한 무림맹의 단체가 나설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무당과 화산, 소림으로 이뤄진 조사단이 꾸려졌다.

이들은 구양극의 저택으로 가 그를 체포했다.

“왔는가.”

구양극은 덤덤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조사단의 손에 이끌려 무림맹으로 호송되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흑도는 자신들의 반발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듯 ‘조사단’의 다섯 배가 넘는 인원으로 ‘구출단’을 꾸려 구양극을 탈출시켰던 것.

이 웃기지도 않는 촌극으로 인해 무림맹의 칠파는 크게 당황했다.

호송하던 죄인까지 탈취당하자 더 이상 체면을 구기는 정도론 끝날 수 없었던 것.

어찌 되었든 과거 중원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온 것은 백도를 주축으로 한 무림맹의 성과였지 않은가.

하지만 그 당시 무림엔 자유로운 분위기를 표방하는 이들이 많아 흑도의 세력이 월등히 컸고, 이로 인해 결국 무림맹은 구양극을 단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무림맹, 그러니까 백도 무림에 큰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칠파(七派)는 본격적으로 무림맹의 인원을 차출하기 시작했고, 무림맹에 함부로 발을 들이밀던 흑도 인원들을 모두 청소해 버렸다.

칠파에서 현 구파일방의 기틀을 만들고.

삼대세가에 추가로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를 끌어들여 오대세가를 구축하여 무림맹의 기반을 다진 후.

본격적으로 흑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불분명하던 서로의 색깔은 그때부터 뚜렷하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정도에서 백도로, 사도에서 흑도로.

그리고 결과는 지금 아는 대로.

‘정의’를 명분으로 세운 백도의 승리였다.

“……그렇게 흑도와 백도와의 긴 암흑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겁니다.”

철순직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마땅한 질문이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긴 침묵만이 이어졌을 뿐.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듯 성모란이 물었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여기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철순직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덧붙였다.

“애당초 백도와 흑도는 그리 먼 입장이 아니라는 거지요. 과거에 서로 함께했던 적도 있을 만큼 가까웠던 존재라는 거지요.”

철순직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굳이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무림맹에서 함께 술잔을 나누던 시절도 있으니까요.”

성모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건은 초월신검 자양이 구양극의 아내를 욕보여서 일어난 사건이었잖아요. 더구나 그 이후에 무림맹이 흑도 무림을 주적으로 선포하면서 지난 삼백 년간 증오가 더 깊게 박히지 않았어요?”

“이제는 그 증오의 고리를 끊어 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 논리에 성모란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애당초 철 공자는 진 공자를 싫어하지 않았어요? 굳이 우릴 금옥에 처넣은 진 공자를 대변해 주는 이유가 뭐예요?”

철순직은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도 왜 그런지 알고 싶다고.

[동요하지 않게 잘 이야기해 줘]

이곳에 갇히기 전 진소운이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굳이 자신이 나설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사활단의 단주 아닌가.

우두머리에게서 받은 임무를 실패하는 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어찌 되었든 안전한 공간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지 않습니까?”

“안전……하다고요?”

성모란이 옆 공간과 안 공간을 가로지르는 쇠창살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흑철로 만들었는지 시꺼먼 색깔이 눈에 띠었다.

철순직이 대답할 말을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을 때.

“저……”

칠(七) 대주이자 만독문에 들어올 때부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당기한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벽면에 있는 구멍 말입니다.”

당기한은 멍하니 무언가를 상상하는 눈동자로 구멍들을 매만졌다.

“이건 아마…… 화살을 쏘아내는 기관장치일 겁니다.”

“…….”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던 철순직은 머리가 순간 띵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구멍은 철창 안쪽의 모든 벽면에 빼곡히 존재했다.

당기한의 말대로, 이 안쪽에서 화살이 일제히 나오는 기관장치라면…….

금옥 안쪽에 존재하는 인원들은 모두 고슴도치가 된다는 이야기.

구멍을 살피던 철순직은 당기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만독문에 와본 것도 아닐 텐데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절로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사람들의 동요를 잠재우는 게 지금 그가 할 일이었다.

단주는 대빵들끼리 싸움을 하겠다며 갔으니, 지금은 그 전권을 이양받은 그가 맡아야 할 일.

이 상황에서 비극적인 정보가 드러나 봤자 동요를 일으키기만 할 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당기한은 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마치 아는 문제가 나와 신이 난 아이처럼.

“그리고 저 위에 그보다 작은 구멍들 보이시지요?”

횃불에 일렁이는 불그림자에 작은 구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저 구멍으로는 아마 독무가 흘러나올 겁니다.”

“…….”

“아, 당가에서도 똑같은 용도의 시설이 있거든요! 주로 연구용으로 가져오는 마물을 가둬둘 때 씁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묵림을 탈출하고 마경을 뚫고 나온 후에.

기괴한 술을 쓰는 놈들까지 물리치고 와서 당도한 곳이…….

‘마물용 금옥’이란 말인가.

“…….”

지금 무슨 말을 해야 사람들의 동요를 막을 수 있을까?

그렇게나 피로를 호소하고 신체의 한계를 보이던 이들이 다시금 또랑또랑하게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후…….”

학관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 소란 사이로 이곳에서 죽는 거냐? 라든가, 여우를 피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거냐? 하는 말들이 떠돌았다.

그때.

탕! 탕!

번을 서던 무사가 쇠창살을 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 조용!”

그 삼엄한 목소리와 서늘한 눈빛에 웅성이던 입들이 꾸욱 닫힌다.

만독문의 무사들이 보이는 태도와 행동에는 호의 대신 적의가 가득했으니까.

성모란이 철순직에게 소곤거렸다.

“진짜 안심해도 돼요?”

“…….”

이내 철순직에게서 몸을 떨어뜨린 성모란이 한 차례 어깨를 으쓱였다.

“말도 안 되는 철 공자의 역사 이야기보다 일각 스님의 부처님 말씀을 한번 듣는 게 더 안심이 되겠네요.”

“…….”

철순직은 왠지 분한 기분이었다.

진소운과 같이 만독문주를 대면하러 간 대머…… 아니, 일각에 대해 질투가 일었다.

#

일각이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에서 만독문을 선택한 건 차악의 수였다.

일단 마교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건 자체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장에 무림맹 지부에 도움을 청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중소문파에 기대는 건 되려 더 큰 피해를 자아낼 뿐이니까.

‘하지만…….’

만독문은 무림맹의 거대 문파들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문파다.

독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들이 당가 뺨치게 독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만독문의 악명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아무리 원수가 그 안에 숨어 있다 한들, 만독문에 함부로 들어갈 만한 간담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 면에서 만독문은 최고의 선택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차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만독문이 백도 문파를 어지간히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증오한다.

흑도 내에서도 극단주의자로 표방되어 흑도인들도 경계하는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단세웅이다.

오래전 문주 임명식에서 ‘백도 무림을 쓸어버리고 중원을 흑도 무림으로 만들겠다’고 한 이야기는 한동안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을 정도.

진소운이 고민하던 선택지가 만독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겁을 했던가.

그래도 진소운이 사흑련에 다녀오기도 했고, 흑도들과 인연이 어느 정도 있으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거니 하며 그를 따랐지만.

‘어찌 사람의 얼굴이 저리…….’

그 기대는 흉신악살과 같은 단세웅의 얼굴을 보며 와장창 부서졌다.

더구나 만독문에 들어서자마자 학관생들을 금옥에 가두는 꼴을 보니, 단세웅이 오래전 임명식에서 한 선언를 실현시키려 한다는 확신이 들 정도.

-진 단주,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굳은 표정의 단세웅과 그 부하들의 서슬 퍼런 시선 틈으로, 일각이 조심스레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진소운이 두 눈을 토끼처럼 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여기 오자고 한 사람이 얘기해야지.

순간, 일각의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네?”

어찌나 놀랐는지. 전음으로 이야기하던 것도 잊은 채 목소리를 내었고.

“크흠……!”

단세웅을 비롯한 만독문의 인사들이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각은 두피 위로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급히 전음을 보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진 단주! 진 단주!

애절하게 진소운을 불러 보지만 진소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인상을 구기고 있던 단세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만독문에 숙식을 부탁하러 왔다고?”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평이하게 이야기했지만, 대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이 뭔가 따로 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태평하게 딴청을 피우던 진소운이 즉각 대답했다.

“네.”

“만독문이…… 객잔인 줄 아는 거냐?”

역시나 단세웅의 음성에는 불편함이 가득하다.

아니, 자신들을 객잔 취급한 것에 대해 어지간히도 화가 나 있는 듯 보였다.

일각은 당최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의 화를 풀어낼 수 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런 일은 되려 철순직이 머리를 써서 대응하는 편이 더 나았을 터인데…….

왜 자신이 굳이 여기에 끌려…… 아니, 와 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일은 그저.

자신이 신뢰하고 또 신뢰하는 단주, 진소운을 믿는 것뿐이…….

“아니, 근데 정말 위급한 상황이라는 건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믿어도 되는 걸까, 저 사내를.

일각이 속으로 염불을 외는 사이, 단세웅의 목소리가 다시금 낮게 깔렸다.

“내가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을 거라 생각했나?”

“아니, 그럼 왜 들여보내신 겁니까???”

저 미친…… 아니, 단주가 지금 소리를 지른 건가……?

일각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사이.

“거절하실 거라면 애초에 거부를 하시던가. 왜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이러시는 겁니까?”

“……!!!”

이 미친놈 아니, 진소운은 그 유명한 극단주의자 단세웅을 마치 동네 아저씨 대하듯 대하고 있었다.

진소운의 행동이 불경하다는 건 일각만 느끼는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대전 안에 모인 만독문의 중진들 사이에서도 진소운을 죽이네 마네 소란이 일고 있었으니까.

단세웅이 그에 화답하듯 코웃음을 쳤다.

“왜 들여보냈냐고? 학관생들을 모두 처형해서 무림맹에 돌려보내면 어떨까 생각을 했지.”

“아미타불…….”

일각은 어쩐지 득도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마경과 마교도 자신의 목숨을 취하지 못했지만, 결국 진소운 때문에 목숨이 날아가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분이셨습니까?”

“……응?”

진소운의 목소리가 대전 안의 공기를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문주로 임명되실 때 강호의 모든 백도들을 쓸어버리겠다 호언장담하셨다 들었습니다. 그 계획은 지금 실천하고 계십니까?”

“…….”

“설마 학관생들의 머리를 잘라 무림맹에 보내는 걸로 그때의 다짐이 이뤄지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최소한 만독문의 무서움은 알겠지.”

진소운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거 그냥 살인에 미친 집단 아닙니까. 그따위 짓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더욱 무림맹에 의존하겠지요. 역시나 흑도 놈들은 상종하면 안 돼! 하면서.”

“…….”

“삼백 년 전 무림맹이 규합되고 흑도가 강호의 주적으로 선포된 건, 어쨌든 ‘정의’라는 명분이 무림맹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쿵!

의자를 내려친 단세웅의 음성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이냐!”

진소운의 음성이 갑자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저 음성과 표정을 듣고 본 적이 있다.

그것도 꽤 많이.

그리고.

일각이 저것을 본 다음엔 그에겐 꼭 안 좋은 일이 생겼었다.

마치 지금처럼.

“사흑련에서도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강호에 새로운 적이 나타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도와 흑도 어느 한 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일 겁니다.”

“…….”

“어차피 함께 싸워야 할 존재라면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주도권을 가져가지 않겠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단세웅이 조소를 흘렸다.

“……백도의 위선자들이 그리 손을 쉽게 잡을 리 없지.”

“그렇다면 더 좋은 거고요.”

“응?”

순간, 단세웅의 몸이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진소운 역시 몸을 단세웅 쪽으로 숙였다.

“강호의 안녕을 위해 흑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독선적인 백도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덧붙인다.

“왠지 삼백 년 전과는 뭔가 다른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단세웅이 입을 꾹 다문 채 진소운을 바라봤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근데 백도는 흑도와 손을 잡기 싫다고 옹졸하게 등을 돌리고 있군요. 사람은 죽어가고, 흑도는 필사적으로 싸웁니다. 강호인들이 보기에 어떤 그림이겠습니까?”

진소운의 물음에 단세웅이 화답하듯 읊조렸다.

“백도가…… 어리석어 보이겠군.”

“역시 잘 아시네.”

일각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단세웅이 강한 욕구를 점차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

“…….”

손을 모아 입을 가린 단세웅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잠시 뒤.

“하지만.”

그가 희번뜩 눈을 뜨며 말했다.

“네놈들이 겪은 일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런 대단위 인원이 움직였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신령을 잡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그래서 여기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응?”

진소운의 손이 곧장 일각에게 향했다.

“무려 소림사의 역근경을 익힌 일각 스님입니다.”

일각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든 말든 진소운이 주변을 돌아보며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불력 높은 스님이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으십니까?”

“…….”

진소운은 시장에서 약을 파는 사기꾼처럼 사람들에게 일각을 소개했다.

“소림사의 고승이 거짓말하는 거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십쇼.”

그러나 진소운의 호언장담에도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당연히 진실과 거짓을 사람의 신분이나 출신으로 구분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일각이 ‘이러려고 나를 데려온 거냐’ 하는 심정에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한 일이었고.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사람들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진소운이 입맛을 다셨다.

“쩝, 소림사의 이름까지 팔았는데도 안 믿네.”

진소운은 뭔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품속에 손을 넣었고, 잠시 뒤 가죽 전낭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만년토웅의 쓸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

“!!!”

“!!!”

만독문의 인원들 몸이 일제히 움찔거렸다.

단세웅이 얼굴을 굳힌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무사 하나가 잽싸게 다가와 진소운의 손안에 있는 것을 집어 단세웅에게 가져다주었다.

“……!”

전낭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확인한 단세웅의 두 눈이 다시금 토끼처럼 커졌다.

“이 정도의 크기라니……. 진짜 만년토웅을 사냥한 것이냐?”

“그렇다니까요.”

“영단…… 영단은?”

“영단은 없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진소운이 뻔뻔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있었으면 힘들게 도망쳤겠습니까?”

그때, 만독문의 문도 하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문주님 기록에 의하면 묵림 신령의 정수는 매우 작거나 없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합니다.”

“음…… 그런가?”

단세웅은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웅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진소운이 익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그 웅담은 문주님의 선물로 가져온 것이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으응?”

“제가 배우기로 남의 집에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했거든요.”

잠시간의 정적.

이내 단세웅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 아주 훌륭한 문파에서 제대로 배웠군. 사황봉주가 자네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어. 으하하하하.”

단세웅이 웃음을 터트리자 살벌한 기세를 품고 있던 이들도 하나둘 미소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웃음을 뚝 그친 단세웅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들어라. 우리 만독문에 무려 삼백 년 만에 방문한 백도의 손님이시다. 그 어떤 손님보다도 극진히 모시도록.”

이에 부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네!”””

진소운이 일각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잘 해결됐네. 웅담 챙겨 오길 잘했어.”

“…….”

“왜? 뭐가 불만이길래 그런 표정인데?”

뭐가 불만이냐고?

“굳이…… 소림사의 이름을 팔……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닙니까?”

진소운이 진정 아까운 얼굴로 혀를 쯧 찼다.

“소림사의 이름이 잘 팔렸으면 웅담을 안 줘도 됐잖아. 아깝게시리.”

“…….”

“아, 너희 좀 더 분발해야겠다. 신뢰가 없어, 신뢰가. 쯧.”

진소운의 뻔뻔한 태도에 일각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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