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55화 (355/357)

355. <적과의 조우(2)>

진소운과 일각이 돌아온 뒤로 학관생들은 살벌한 금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응급처치만 받았던 부상자들이 의원에게로 옮겨져 본격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손님 왔다! 다들 깨워!”

만독문 전체에 불이 켜지며 잠을 자던 식솔들이 모두 불려 나와 학관생들의 수발을 들었다.

잠이 부족한 자는 침구를, 배가 고픈 자는 식사를 제공 받았다.

손님용 전각이나 사랑채로는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어 별채와 당주급들의 숙소까지 모두 내주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긴 별채인데?”

“만독문의 정식 손님께 제공되는 공간입니다.”

“손님……?”

갑자기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진 대우에 어안이 벙벙했다.

만독문은 백도 무림의 가장 큰 적이자 가장 무서운 적중 하나였으니까.

그들의 호의는 학관생들에게 불온한 의도로 보이기 그지없었다.

“이거 이대로 독살하려는 거 아냐? 마지막 식사 같은 거…….”

“흠, 자고 있을 때 암살을 하려 하는 걸지도.”

“……근데 나 진짜 진짜 너무 피곤한데.”

의심하는 것도 잠시.

“나, 일단 잠 좀 잘게. 누가 죽거나 기습당하면…… 아니다. 그냥 깨우지 마. 그대로 죽을 테니까.”

“나도…… 어차피 단주가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지.”

“맞아. 진 단주 그 양반 수완 좋잖아.”

학관생들은 피곤에 지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잠에 들었다.

“식사를 준비 했…… 어맛?”

“아직 안 일어나신 거 같은데…….”

“이 사람들 백도인데 무섭지도 않나?”

“묵림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더라고요.”

“그냥 음식만 두고 나갑시다.”

그리고.

자다 배가 고파 깨면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이미 독살이나 기습에 대한 걱정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이틀 내리 회복의 시간을 보냈고.

다들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왔을 때.

“귀한 손님들이 왔으니 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크하하!”

만독문 문주의 주최로 연회가 열렸다.

연회에 참석한 학관생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잠자리를 내준 것까지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해도, 만독문의 문주가 직접 연회를 열어준다는 건 백도 정예들의 입장에선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물론 만독문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술맛이 아주 좋습니다, 문주님. 크하하!!”

그들의 대장인 진소운이었다.

“자네는 저 장면이 이해가 되나……? 나는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러게…… 만독문의 문주와 무림학관 대표가 저리 친밀하게 술을 나누고 있다니…….”

“근데 우리 단주는 왜 저렇게 편하게 행동하는 거야? 누가 보면 진짜 친한 줄 알겠어.”

백도와 흑도라는 정 반대되는 세력의 대표들이라는 입장을 넘어 문주와 학관생이라는 세대 간의 간극이 있음에도, 진소운은 만독문주를 대하는 것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래도 흑도 거목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걸 보니 배포 하나는 대단하군.”

“애당초 그 묵림에서 살아 돌아가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나. 보통 배포는 아니지.”

“……니들 맨날 진소운 미친 거 같다고 욕하지 않았냐?”

“커흐음!!”

학관생들이 은근하게 진소운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할 때.

만독문의 문도들이 하나둘 학관생들에게 다가왔다.

“마경을 돌파했다 들었소. 대체 어떻게 한 것이오?”

“묵림은 우리 만독문에게도 절대 편한 곳이 아닌데, 그곳에서 전투까지 벌이다니! 대단하외다!”

만독문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학관생들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만독문도들에 하나둘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진소운처럼 완전히 친우를 만난 듯 지내기엔 갈등의 골이 깊어 쉽지 않았지만, 가만히 앉아 술잔을 서로 나누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미묘한 분위기의 연회가 끝나고 이틀 뒤.

얼추 위급한 환자들이 하나둘 거동이 가능해질 때쯤.

전서구를 보냈던 무림맹 곤명 지부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맹원들이 만독문에 방문했다.

“어서 오십…….”

“비켜!!!”

무림학관 학관생들은 만독문도를 거칠게 밀치며 들어서는 인원을 보고 대경했다.

“교관님?!”

“강순탁 교관님!?”

죽었다고 생각한 학관의 교관들이 멀쩡히 살아서 만독문에 들어선 것.

누구보다 선배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종추악이 부상도 잊은 채 버선발로 달려갔다.

“서, 선배님! 살아계셨습니까!”

성큼성큼 다가오던 강순탁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짝!

피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종추악의 신형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순간 멍한 표정이 되어버린 종추악이 고개를 든 그때.

“감히!!”

강순탁의 호통이 공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감히, 청성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누가 고개를 들라고 했느냐!”

“…….”

강순탁을 비롯한 교관들의 부리부리한 눈초리가 서늘하게 장내를 휩쓸었다.

특히나 만독문의 문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관생들을 볼 때쯤엔 살기를 날리기도 했다.

“허……! 하다 하다 못해 흑도 따위에 도움을 구걸해?! 네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강순탁의 말이 이어질수록 종추악의 떨림이 격해져 갔다.

자신들이 어떤 고난을 겪고 여기까지 겨우겨우 당도했는지, 저들이 알기나 할까?

순간 겨우 비웠다고 생각한 묵림에서의 일들이 안개처럼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른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때 느꼈던 절망감과 고통은 더욱 선명해진다.

종추악은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님……, 말이 너무 심하신 것 같습니다.”

“뭐라? 네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감히 그따위 말을 해!”

퍽! 퍽! 퍽! 퍽! 퍽!

강순탁의 발길질이 무차별적으로 뻗어나갔고.

그로 인해, 겨우 회복되고 있던 종추악의 몸이 다시금 엉망이 되어 갔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백도 무인이라 할 수 있느냐! 겨우 흑도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고도 청성의 제자라 할 수 있을 수 있느냐 말이다!”

종추악의 몸이 바닥을 뒹굴면서 상처가 늘어났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교관과 학관생이기 전에 두 사람은 한 사문의 사형제 관계였으니까.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한들, 종추악의 반항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알기에 종추악도 일방적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참을 씩씩대며 폭행을 이어가던 강순탁이 콧김을 팡팡 내뿜었다.

“네놈들이 단체로 미친 것을 보아하니 이건 다 그놈 탓이로구나.”

“…….”

그러곤 원흉을 찾으려는 듯 고개를 휙휙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진소운 그 개자식이 네놈들을 통째로 흑도의 아가리 속에 처넣으려 한 것이 분명하다!!”

그 순간.

종추악의 눈이 희번덕 떠지며, 그의 몸이 강순탁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함부로 지껄이……!”

종추악의 주먹이 날아드려는 순간.

탁-

누군가 종추악의 앞을 막아서며.

퍽.

그대로 강순탁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일 장이나 뒤로 물러난 강순탁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사태를 파악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감히 네놈이…… 죽고 싶은 것이냐!!!”

주먹을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남화성.

그는 분을 겨우 참아낸 이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죽고 싶은 건 댁 같은데? 학관생들을 버리고 지들끼리 도망친 주제에 뭘 잘했다고 이제 와서 훈계질이야?”

“……이 미친놈. 네놈 또한 흑도와의 간자 혐의로 금옥에…….”

“듣자 듣자 하니, 정말 못 들어 주겠네.”

일순, 남화성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우리가 어떤 수렁을 건너왔는지…….”

그러곤 화살처럼 강순탁에게 쏘아졌다.

“네놈들이 감히 알기나 해!!”

남화성의 주먹이 거력을 품고 쏘아졌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만약 교관이 살아 있다면 내 이 손으로 다 때려죽이고 말 것이라고!!!”

기세는 좋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세는 기세일 뿐이다.

부지불식간의 한 수가 통했던 건, 감히 학관생들이 교관에게 대들지 못할 거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학관생이 당주급의 인사를 압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탁.

남화성의 특기인 철권이 빨려들어가듯 강순탁의 손에 잡힌다.

“네놈…… 진소운의 졸개 노릇을 자처한다지?”

타타타탁!

칠십육로무형지가 남화성의 하반신에 쏘아지고, 다리가 풀린 남화성이 무릎을 꿇자 남화성의 머리가 강순탁보다 조금 아래 위치하게 됐고.

“오냐. 내가 네놈의 정신을 뜯어 고쳐 네놈 문주에게 감사 인사를 받아야겠다.”

퍽! 퍽! 퍼퍼퍼퍽!

무차별적으로 주먹이 쏟아졌다.

천풍무형신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교관으로서의 마지막 자비를 베푼 것일까?

강순탁의 주먹에는 내기가 깃들지 않았다.

퍽! 퍽! 퍼퍼퍼퍽!

남화성을 향한 무차별적 폭행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남화성이 중간중간 반격을 해보려 하지만, 금세 강순탁의 공격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이…….”

보다 못한 종추악이 나서려 하는 순간.

남화성이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마치 절대로 이곳에 끼지 말라는 듯이.

이어 다른 학관생들이 종추악의 옷자락을 잡아 뒤로 끌어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는 다름 아닌 철순직이었다.

종추악이 버둥대며 외쳤다.

“이거 놔! 강 사숙은…….”

“우리는 몰라도 당신은 기사멸조의 죄를 짓는 겁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종추악은 흥분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붙든 사내, 철순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나선 것인가?

하지만 왜…….

“사활단원이지 않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철순직의 말에 종추악은 가슴속에서 뭔가가 급격히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

“그리고 우리도.”

이윽고 철순직이, 금옥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강순탁을 응시한다.

“충분히 열이 올랐으니까요.”

“…….”

그가 강순탁에게로 다가가 지풍을 날렸고.

남화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던 강순탁이 손을 휘둘러 지풍을 막아섰다.

“!”

구멍이 뻥 뚫린 무복을 바라보던 강순탁의 목소리가 공격적으로 내깔렸다.

“철순직……. 감히 교관을 공격한 것이냐?!”

“계속 그러다가 죽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흥, 죽지 않는다. 내가 충분히 힘을 뺐으니 상관없…….”

“교관님 말입니다.”

“……응?”

철순직이 턱 끝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고,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여기서 죽고 싶으신 겁니까?”

철순직이 언급한 건, 바로 강순탁의 안위였다.

“…….”

강순탁은 물론이고, 학관생들의 반항 행위에 이성이 날아가 버린 교관들은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교관이란 새끼들이……!”

“하, 살아있었다고? 씨바, 그런데 이제 와 낯짝을 들이민다고?”

“그러게 말일세. 뻔뻔하기 그지없군.”

지금 사방을 둘러싼 학관생들이 모두 강순탁과 교관들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명백히 드러나는 적개심.

‘아!’

종추악은 그제야 깨달았다.

교관들의 생존이 반가웠던 건, 같은 문파인 자신에게나 해당되는 감정임을.

묵림에서, 마경에서, 그 이후 최악의 상황에서.

학관생인 그들을 앞장서서 보호했어야 할 교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경을 넘어 이곳에 당도한 후에야.

죽었어야 할 그들이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학관생들은 적개심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강순탁은 아직 그 분노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철순직을 향해 노호성을 터트렸다.

“이…… 미친놈이! 12봉성이 네놈 목숨을 두 개로 만들어 준 것이냐! 아님 종남이 너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냐!”

강순탁의 목표는 어느새 남화성에서 철순직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은밀한 기척으로 쏘아진 칠십육로무형지가 철순직의 마혈을 짚으려는 순간.

후두둑.

장포를 넓게 펼쳐 지법을 해소한 철순직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자신의 검을 뽑았다.

챙!

그저 지법을 막고 취한 기수식에 불과했지만, 강순탁은 더욱 흥분했다.

자신의 실력이 아직 학관도 졸업하지 못한 애송이 후배에게 처 발리는 꼴을 보였으니까.

“네놈!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강순탁은 이곳이 만독문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전력을 다한 권경을 쏟아내었다.

퍼퍼펑!

남화성을 강타했던 천풍무형신권은, 이젠 강력한 권풍을 동반하여 철순직을 짓이길 듯 몰아쳤다.

철순직은 자신에게 짓쳐드는 권경을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그러곤 동시에 검기를 내리쳐 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펑!

묵림에서 진소운이 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

“콜록콜록!”

갑작스런 모래바람이 역으로 날아와 온몸을 뒤덮자, 강순탁이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고.

철순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쐐액-

얼음처럼 날카로운 검기가 강순탁의 가슴을 그으려는 순간.

휘잉…….

중간에 새로운 기운이 바람처럼 스며들며 철순직의 기운을 옆으로 흘려버렸다.

“무슨!”

이에 중심을 잃은 철순직이 재빨리 보법을 밟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들려오는.

“교관을 공격하는 행위는 중대한 위법 행위란 것을 모르나?”

청명한 목소리.

철순직은 온 몸이 뻗뻗하게 굳은 채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

여기에서 이 사람이 나오다니.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남화성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곤 돌처럼 굳어버렸다.

“……다, 당신은…….”

여타 다른 학관생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갑자기 장내에 나타난 존재에 숨소리마저 지웠다.

“계속할 생각이 아니면 검을 거둬라.”

무감하게 뻗어 오는 검극을 보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사내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때.

“이야…….”

학관생들 사이에서 너스레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터벅터벅.

학관생들의 몸을 굳어버리게 했던 존재 또한 그 특유의 무감한 눈빛으로, 걸어오는 존재를 응시했다.

“진소운.”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사람이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진소운의 시선이 주위에 널브러진 세 사람과 철순직을 한번 훑은 후. 강순탁을 노려보다가.

“진짜 개판이구만.”

다시 푸른 무복의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진소운은 평소처럼 익살스런 미소를 내보였다.

허나 이상하게도 학관생들은.

그 미소 속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진소운이 푸른 무복의 사내를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고고하신 분께서 이런 개판에는 왜 끼어드셨을까? 응? 대답 좀 하지.”

“…….”

“용소아.”

푸른 무복의 사내, 용소아는 여전히 무감한 시선으로 진소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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