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적과의 조우(3)>
무림맹.
그러니까 백도로 표방되는 정파의 주적은 누구일까?
오백 년 만에 나타난 천마신교?
사천에서 혈사를 일으킨 혈교?
아니면 삼백 년 전부터 공적으로 지목된 흑도 세력?
글쎄.
이런 존재들이 오히려 무림맹의 성세를 확장시키면 확장시켰지 무림맹을 무너뜨리는 데 단초를 제공하진 않았다.
애당초 무림맹의 존재 의의는 ‘수호’에 있다.
무언가 지켜야 할 존재가 없다면 존속될 수 없다.
그렇기에 무림맹은 항시 적이 필요하다.
오백 년 전 강호의 공적을 막기 위해 창설되었고.
이백 년 전 마땅한 적이 없을 땐, 사라질 뻔했던 것처럼.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무림맹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그런 이유에서 무림맹을 무너뜨린 존재는 앞서 이야기한 존재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무림맹을 무너뜨린 존재는 무엇일까?
과연, 누구일까?
나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차대한 일로 바쁘신 분께서 이곳까진 어쩐 일이시지?”
미려한 외모에는 감정의 변화 따윈 없다.
“존댓말을 배우지 못한 것인가?”
무감한 목소리에는 기묘한 설득력이 있다.
마치 항시 너무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글쎄, 우리가 그렇게 애틋한 사이도 아닌데. 쓸데없는 허례허식 아닌가?”
일부러 시비를 걸어 보아도 격동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개미가 화를 낸다고 인간이 신경 쓰지 않듯이.
“진소운. 상호 간의 기본예절을 지키는 것이 신뢰를 형성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모르나?”
“효율 때문에 예절을 지킨다니. 딱 당신다운 말이군.”
돌로 만든 완벽한 조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흔들림 없이, 우둑하니 서 있다.
저 사내의 고요함이.
전생의 든든한 태산처럼 보였다.
하지만.
“용소아.”
지금의 나는 안다.
저 고요함에 담긴 위선을.
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용소아.
그러곤 나를 죽이러 왔을 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한다.
“선배 호칭을 붙여라. 이제 학관생이니.”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이건 다짐이다.
정답인 듯 보이는 그의 길에 따르지 않겠다는 나의 작은 다짐.
“어쨌든 여긴 어쩐 일이실까? 용봉지회로 바쁘신 분께서.”
대답은 용소아의 뒤에서 나왔다.
“곤명 지부에서 요청을 받아 움직인 것이야.”
용소아와 마찬가지로 특유의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상한 말투를 쓰는 작은 소녀.
당서희였다.
“대체 묵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그리고 어찌하여 만독문에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야?”
당서희가 순간 단세웅을 쏘아보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금방 그 눈빛은 사라지고 특유의 무감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키는 조금도 자라지 않았군.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멈칫하곤 대답했다.
“적을 만났으니까요.”
“적? 분명…….”
당서희의 시선이 교관 강순탁에게로 향한다.
“길을 잃었다 들은 것이야.”
“저, 적은 무슨 놈의 적! 교관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움직이다 길을 잃은 것이지!”
“…….”
학관생들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묵림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을 반복하고 버텨냈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학관생이 죽었는가.
그럼에도 강순탁은.
“진소운, 네놈이 선동하였겠지……!”
그저 자신의 잘못을 면피하기 위해 학관생들의 고통스런 기억을 별것 아닌 듯 취급했다.
“선동, 선동이라…….”
“진소운…….”
짓씹듯 내 이름을 읊조리는 강순탁의 음성엔 증오가 가득했다.
“네놈이 문제다! 네놈, 네놈 때문에……! 일이 이리 커진 것이다!!!”
무림맹은 무엇 때문에 무너졌는가.
“가만히 있었으면 지부에 도움을 요청해 모두를 무사히 구해냈을 터! 마침 용봉지회도 이렇게 오지 않았느냐!”
오백 년 역사의 그 거대한 거목은 왜 속절없이 무너졌는가.
“흑도와 내통하고 있는 네놈이 학관생들을 미혹하여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답이, 지금 눈앞에 있다.
‘속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졌으니까.’
어떠한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나무가 결국 쓰러져 버린 건, 내부가 썩고 부패했기 때문이니까.
“네놈 때문에 죽은 학관생들은 어찌할 셈이냐! 네놈 사형제와 네놈의 사문도 이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야 할 것이다!”
자신이 곪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존재들이 기생하고 있는 곳.
무림맹의 가장 강대한 적은 바로 내부에 있었다.
챙!
적광검을 꺼내었다.
전략이나 계책도 심모원려도 없었다.
이성을 잃은 건, 강순탁의 모습에 전생의 백도를 지휘했던 간부의 모습이 겹쳐 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토록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지 못했던 그놈을.
지금이라도 죽이기 위해.
“이런 미친놈이!”
날카로운 청성의 검이 휘둘러지지만, 전생의 것만큼 두렵지 않다.
아니, 일견 우습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 내가 받아온 검은 이렇게 무디지 않았으니까.
채챙!
연화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가능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었으니까.
채채채채챙!
교관들이 차례차례 검을 꺼내어 들어 대응한다.
묵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방어만을 한 채 강순탁에게 짓쳐들어간다.
검을 흘리고, 막고, 검기의 폭풍을 상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강순탁은 계속해서 뒤로, 또 뒤로 물러난다.
“그, 그만 그만!!!”
팔과 어깨에 난 생채기 때문이었을까?
강순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묵림에서 사활단은 이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는데.
묵림에선, 이들이 희망인 양 필사적으로 찾았었는데.
어쩌면 교관들이 먼저 도망간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이것들이 있었다면 더 많은 사활단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채채채채챙!
검기에 대응하기 위한 검기를 날린다.
검기가 폭발하며 커다란 폭풍을 일으킨다.
퍼퍼퍼퍼펑!
연신 뒤로 물러난 강순탁.
이내 그가 핏물을 한 움큼 내뱉었다.
꾸엑.
앞섬을 붉게 적신 핏물을 미처 닦아 내지도 못한 채, 그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른다.
그때.
“그만.”
무시할 수 없는 날카로운 기세가 없는 빈틈을 비집고 들이찬다.
“교관에 대한 공격 행위는 중대한 범법행위다. 멈춰라.”
무감한 목소리가 훈계하듯 울려 퍼졌다.
“그래? 그럼 징계해.”
챙
선풍검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용소아로 인해 생긴 빈틈 때문에 강순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뭐, 뭣들 하느냐! 맹원들은 당장 저놈을 체포하라!”
스르릉 스르릉 스르릉.
백 명에 달하는 무림맹원들이 저마다 검을 뽑아 든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꿍-
거대한 진동이 만독문 전체를 크게 울린다.
교단에서 시작된 충격파.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만독문이 우스운가? 아니면 이 단세웅이 우스운가?”
이와 동시에, 관망의 자세로 바라보던 만독문도들이 일제히 전투 준비를 한다.
맞다. 이곳은 중원도 무림맹도 아니다.
바로 적진.
갑작스런 소강상태에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강순탁이 그것마저 잊었는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놈! 저놈을 체포해!”
“…….”
하지만 무림맹원들 중 그 누구도 단세웅의 엄포 앞에서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계속할 생각인가?”
단세웅의 시선이 용소아에게로 향했다.
강순탁이나 지부의 맹원들이 있음에도 그를 바라본 것은 그가 이 무리의 대표가 됨을 인정하는 의미나 다름없다.
하지만 용소아는 단세웅의 기세에도 쉬이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그는 단세웅도 만독문도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여전한 무감한 눈길을 보일 뿐이었다.
“이거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군.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것 같으니 말이야.”
화산파의 화정산.
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용소아, 우린 후배님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지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네.”
태을문에 시비를 걸러 왔었던 그가 지금은 교관과 나 사이를 중재하고 있었다.
“건방진 후배님도 이쯤 하지. 뭐 억울한 게 있다면 무림맹으로 가서 이야기해도 좋고 말이야.”
이윽고 그가 난감하다는 듯 주변의 학관생들을 바라봤다.
“후배님들도! 이제 그만 무기들을 집어넣지 그래?”
화정산이 이야기했음에도 쉬이 움직이는 이들은 없었다.
화산파의 제자들과 화산의 속가문파의 제자들마저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화정산의 눈가가 미미하게 흔들렸지만, 그는 과거와 달리 쉬이 흥분하지 않았다.
“만독문 내에서 무림맹원과 학관생들이 싸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
나는 적광검을 집어넣었다.
화정산도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이만 돌아가지. 문제는 우리 집에 돌아가서 풀자고.”
“그럴 일 없습니다.”
“응?”
나는 한쪽에 널브러진 종추악을 일으켰다.
“아직 부상 회복을 못 한 인원들이 많으니. 더 요양을 하다 돌아가지요.”
“허, 흑도…… 아니, 만독문에서 말인가?”
“단 문주께서 사정을 알고 선뜻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나는 화정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교관들이 믿지 않는 그 사정을 듣고 말입니다.”
“…….”
나는 종추악을 남화성에게 맡기고 강순탁에게 다가갔다.
조금의 책임감도, 부채감도 느끼지 않는 그에게.
“길을 잃었다고? 그렇다면 왜 집결지에서 학관생들을 모으지 않은 것이지?”
“…….”
“적이 없었다고? 그럼 우리가 필사적으로 싸웠던 존재는 무엇인가?”
잘잘못을 낱낱이 풀어헤쳐도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우린 썩었다 하지 않는다.
“백도 문파의 정예들이 왜 흑도문파에 도움을 요청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애초에, 그런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썩었다 말하는 것이다.
“그저 네놈의 부귀영화 때문인가?”
내막이 밝혀지면, 사정이 제대로 알려지면, 강순탁은 추락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관들 모두가 자신에게 도래하리라 의심치 않던 찬란한 미래를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다.
“…….”
아마 그들은 바랐을 것이다.
차라리 묵림에서 모두가 죽었기를.
어떠한 생존자도 남아 있지 않았기를.
그랬다면 최소한 자신들의 앞에 놓인 길은 조금은 흔들릴지언정 틀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교관으로서 정해진 일정을 무시하고 사사로운 이익에 학관생을 동원한 죄, 또한 위험한 상황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챙긴 죄.”
차라리 모두가 죽는 쪽이 나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독문으로 오는 내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진실을 숨기려 한 죄까지 모두 책임을 물을 것이다. 네놈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놈 때문에 죽은 학관생들의 몫까지 모두 책임을 물을 것이다.”
“…….”
아마 우리를 죽이려 했던 존재들보다 우리의 죽음을 더 바랐을 것이다.
“네놈 사형제와 네놈 사문도 이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금 다짐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고.
“진소운…… 감히 네놈 따위가!”
나는 지체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강순탁의 악에 찬 저주가 들려왔지만 귀담지 않았다.
학관생들은 그제야 저마다 무기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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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단세웅 문주가 답지않게 조심스레 말을 삼켰다.
갑자기 왜 저래.
내가 이상하게 바라보자 그가 내뱉듯 말을 이었다.
“그…… 진짜 미친놈인가?”
뭐지?
미친 건가? 라는 말을 하려던 건가? 아님 그냥 욕을 내뱉고 싶었던 건가?
“아님. 혹 몰래 사술이나 마공이라도 익혔는가?”
“…….”
통탄할 기분이다.
독의 유해성을 시험한다며 미지의 독을 자신의 몸에 주입했던 진짜 광인에게 이런 소릴 듣다니.
태을진경 덕분에 누구보다 정상적인 몸과 마음을 가진 나인데 말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러네. 제아무리 흑도인이라 할지라도 청성의 당주급 인사에게 그런 폭언을 할 순 없을 테니. 거 미치지 않고서…… 크흠.”
“…….”
말이 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말들은 사활단의 노력을, 집념을 그리고 절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자네 좆된 상황이란 건 알고 있지?”
“…….”
문주 정도 되는 사람의 입에서 저런 상스런 말이 튀어나오다니.
확실히 흑도는 흑도다.
“좆된 거 압니다.”
“크흠, 거참, 자넨 입이 걸구먼.”
그렇게 말하고는 내 어깨를 두드리는 단세웅.
“애당초 잘잘못으로 공과 과가 나뉘었다면 지금의 정도회도 백도회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이미 진즉에 다른 이들에게 명분을 넘겨주고 권력을 빼앗겼겠지.”
알고 있다.
그 부조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의 권력은 더욱 단단해졌으니.
“더구나 자네는 청성의 제자를 욕보이면서 그들에게 적대할 명분까지 주었네. 전도유망한 자네의 앞날에 벌써부터 먹구름이 끼는 것이 보이는군.”
처음에 무척이나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는 왠지 친근하게 걱정해 주고 있었다.
일견 조금 기뻐 보이기도 했다.
마치 동족을 만난 듯한 저 눈빛.
“애당초 제 앞날에 서광이 비친 적이 없습니다. 그냥 폭풍우냐 우박이냐의 차이일 뿐이겠지요.”
“우박은 아플 텐데.”
“머리가 단단한 편이라서요.”
“크흐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단세웅.
거 아저씨 취하셨나.
어느새 내 입가로도 미소가 비집고 새어나온다.
“감사합니다.”
“응?”
나는 단세웅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때맞춰 나서주신 것 말입니다.”
“…….”
단세웅은 뭔가 고소하다는 듯 키득 웃었다.
“난 자네에게 흑도의 인사라는 오해를 덧입히기 위해 편을 들어준 건데?”
“그렇다고 한들 협객으로 빛나는 제 명성이 빛바래진 않겠지요.”
“클클…… 미친 거 맞군. 흑염룡이 협객이라니.”
확실히 만독문은 마령고원에서의 일이 없어서 그런지 내 위명에 대해 잘 체감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낄낄거리며 웃던 그가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차석두 그 돌대가리가 자네에게 언제든 사흑련으로 오라 했다지?”
“헛소문입니다.”
“흐흐. 그 돌대가리가 머리는 좀 안 돌아가도 허언을 퍼트리는 놈은 아니지.”
역시 흑염룡이란 별호가 바뀌지 않는 건 차석두 때문이었는가?
젠장.
이제 좀 바뀔 때도 되었는데.
“근데 말이야.”
일순 단세웅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 실없는 농담을 건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보기엔 자네는 절대 사흑련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네.”
“…….”
애당초 갈 생각도 없었지만, 또 오지 말라 하니 괜히 서운하네.
“어째서 말입니까?”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너무 맑고 독하거든.”
사뭇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맑고 독하다는 이 두 단어가 서로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던가?
아니, 함께 쓰일 수 있는 건가?
정화(淨化)
“만독문의 독 중에 말이야, 독정수(淨水)라는 독이 있네. 무색이긴 한데 냄새가 조금 독특해서 은밀하게 쓰진 못하는 독이지.”
“쓸모없는 독이군요.”
“그래도 효과는 좋네. 눈에 뿌리면 눈을 멀게 하고, 입과 코에 닿으면 숨을 망가뜨리지. 그런데 말이야…….”
단세웅은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이 독에 독정수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네.”
“특이한 이름이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오염된 우물이나 곰팡이가 가득한 곳을 이걸 이용해 청소하면 정화가 되거든. 그럼 사람이 먹을 수 없던 우물도 먹을 수 있게 되고, 질병을 일으키는 공간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지.”
“독이 아니군요.”
“독은 독이야. 직접 마시면 사망하니까. 사흑련과 같은 곳에 뿌리면 사람이 죽겠지. 하지만…….”
그가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무림맹에 청소용으로 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그는 독정수를 이야기하는 건지 나를 이야기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을 이어갔다.
“그리되면 꽤 위험한 거 아닙니까? 깨끗한 무림맹이라니. 흑도들 곡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군요.”
그는 그마저도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이 뭔지 아는가?”
“뭡니까?”
“사용된 다음엔 흔적도 없이 휘발되어 버려.”
휘발된다라.
“잘 생각해 보게.”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대신 애꿎은 술잔을 매만진다.
“무림맹을 위해 쓸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아닌지를 말이야.”
그는 끝까지 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나는 어떤 의도인지 알 것 같아 되묻지 않았다.
#
무림맹원들은 돌아갔다.
애당초 지부의 인원들이었고, 교관들은 단세웅의 거절로 이곳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었으니까.
대신 용봉지회는 남았다.
학관생들과 작은 인연이라도 나누며 교류를 했던 만독문의 문도들은 무림맹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용봉지회의 인원들에 대해선 호기심을 보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백도 문파의 영웅으로 추켜세워지는 그들에 대한 호기심은 버리기 쉬운 게 아니었던 모양.
그중에서 특히 당서희에 대한 호기심이 지대했다.
같은 독을 쓰는 입장도 있었고, 그녀가 당가의 제일 후기지수라는 점도 크게 작용을 한 것 같았다.
만독문의 몇몇이 그런 호기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작게 술자리를 열었고.
단세웅과 책임자들은 어린 문도들의 일탈은 모른 척해 주었다.
나도 단세웅을 만나러 가기 전 초대를 받았지만, 연회에 참석해서 떠들썩하게 놀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단세웅의 거처를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
멀리서 전해져 오는 소란스런 소리에, 술판이 벌어졌음이 짐작됐지만.
조금 더 걷자 소리는 먹먹해졌고, 사위에는 침묵이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잠시 횃불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운남에서 보는 별자리의 위치는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대가 높은 덕분인지 날씨가 쾌청해서인지, 별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간 그 별들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 와중.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
횃불의 비친 불그림자 끝에 달갑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실까.”
“……단세웅 문주와 무슨 말을 나눈 거지?”
“내가 말해줘야 할 의무라도 있나?”
내가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는 순간.
“궁금한 것이 있다.”
질문이라…….
참으로 용소아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왜 아직 살아 있는 것인지 말이다.”
“…….”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내가 묵림에서 죽기를 바라기라도 한 걸까?
“네놈도 강순탁 그자처럼 내가 죽기를 바랐나?”
“그와의 관계는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궁금한 건…….”
갑자기 입을 다무는 용소아.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보지 못한 표정.
잠시 입술을 짓씹던 그가 천천히 눈을 치켜뜬다.
“네가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다.”
무감한 표정이 당연한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건 명백한 호기심.
당연해야 할 것이 왜 흐트러져 있는지에 대한 의문감.
‘……뭐야.’
싸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지금 죽이겠다는 거야?’
그는 나의 죽음이 당연한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