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08화
29-역사는 거꾸로 간다
그 물음에 좌중이 입을 다물고 경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로서도 상당히 궁금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들이 경완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그 이유는 정청완 중장의 병력을 극복할 수 있느냐일 테니까.
경완이 대답했다.
“제가 중국의 초능력 병사들이랑 싸운 자료를 찾아보시면 가늠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옛날 일이지 않은가?”
다른 기업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정청완 중장의 병력은 매우 특별한 장비를 가지고 있거든. 순수 초능력만 가지고는 대응이 쉽지 않을 거야.”
“아, 그거? 내가 그거 들었을 때에는 이거다 싶었지.”
또 다른 기업인도 끼어들어 한마디를 했다. 다들 중화 영역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흐음. 다들 쿠데타 때 인적 소모가 좀 크셨던 모양이네요?”
경완이 한마디 하자 다시 침묵이 깔렸다. 하긴 누구 좋으라고 쿠데타를 용인한단 말인가? 어느 기업인도 다시는 총칼 앞에 비자금을 상납하거나, 상납하지 못해서 재산을 빼앗기는 일을 경험하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래서 저항하려고 휘하 초능력자들을 부리는 와중에 초능력자에게 쥐약인 중화 영역에 크게 당한 것일 테고. 그러니 초능 특수전 부대의 특별한 장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경완은 짐작했던 일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의 불편해하는 침묵에서 저들의 초능력 전력도 상당히 피해를 봤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읽어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통령을 만난다고 초능 특수전 부대원과 충돌했던 경험을 꺼냈다.
“쉽진 않더라고요.”
“붙어봤는가?”
처음 질문을 던진 기업인이 물었다. 디디 그룹의 김민식 회장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에서 벌어진 교전을 모르는 거 보니까 대통령이든 누구든 단단히 입막음을 한 모양이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썰을 풀었다.
“중화 영역이라고 하던가요? 대단하더라고요. 그 영역 안에 들어가면 초능력이 무효화되니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고 싸워야 했죠. 하지만 그렇게 싸워보니 그에 대한 대응 매뉴얼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누가 이겼나?”
“그에 대한 답변은 적절치 않아요. 왜냐면 운이 얽힌 요소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경완은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초능 특수전 부대의 위용을 올려쳤다.
내 몸값을 높이려고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경쟁자의 가치를 올려치면 그 경쟁자를 싫어하는 스폰서가 내 몸값을 함부로 후려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사람들은 경완이 이겼다는 말에 다들 소리 없이 감탄했다. 역시 이경완이라는 감탄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누구를 환영하는 건가요?”
거기서 경완은 화제를 돌렸다. 일단 미끼는 이 정도면 충분히 뿌렸다 싶었다.
그의 물음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자네를 환영하는 거지.”
“농담이시죠? 제가 오실 줄은 몰랐잖아요.”
“그래, 맞네. 농담일세.”
시답잖은 말이 오갔다. 경완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친분을 쌓아보려는 노력이었다.
다만 그러한 시답잖은 말들 사이에서 경완은 오늘의 연회가 리셉션의 의미 대로가 아니라 기업 간의 연대를 구축하는 자리라는 걸 읽을 수 있었다. 정호태가 초대받은 건 위버멘쉬 코리아가 해줄 역할이 아쉬워서 그런 거고.
저들도 경완이 동행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그 강대한 폭력을 가지고도 은둔자로 지냈으니까.
아무리 정호태가 위버멘쉬 코리아는 경완의 지시를 받는다고 발표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모두 이경완이라는 인재를 위버멘쉬에 포용하기 위한 방책으로 여겼을 뿐.
고로 경완이 옆에 있는 상태에선 정호태와 나누려 했던 이야기를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위버멘쉬 코리아와 이야기하려는 거지 이경완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경완은 정호태의 활동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와 떨어졌다.
경완은 홀로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들로 배를 채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분위기를 좋게 한다고 젊고 잘생긴 남녀들을 데려다 놓았고, 끼리끼리 모여서 연회장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긴 늙다리들만 모여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영감님들이 음습한 음모를 꾸미는 분위기에 연막을 쳐줄 테니까.
재벌 2, 3세 및 모델, 연예인이 뭉친 몇 개의 그룹에선 홀로 있는 경완은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흥미는 있지만 다가가기 꺼려하는 눈치랄까? 마치 코끼리나 기린이 고래 구경하는 느낌에 비유할 수 있었다.
어색하지만 나름 같이 있는 것이 허용되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한구석에선 웃으면서 현재의 정국을 헤쳐나가기 위한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연회장은 한국을 장악한 재벌의 자신감이 표출된 장이기도 했다. 권력은 언젠가 가지만 돈은 영원하다는 마인드랄까?
서로 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친목도 도모하고 앞일도 상의하는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은 경완이 막 접시 하나를 다 비웠을 때였다.
-잠깐! 여기는 함부로……!
밖에서 소란이 인다 싶었는데 갑자기 문이 박차듯 열리며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병사들 뒤로 양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검사 신분증을 꺼내 들며 조용해진 연회장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검찰 특수부의 황차대 검사라고 합니다. 여기에 삼천 그룹 회장님 손자분 있으시죠?”
마치 있는 걸 알고 왔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황차대 검사는 좌중을 훑어보더니 삼천 그룹 회장의 손자라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그러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잡으려는 이와 안 잡히려는 이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 소란에 급히 등장한 한 장년의 남자가 황차대 검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호텔 관계자로 보이진 않았다.
“도대체 무슨 혐의로 잡아간다는 건가!”
“마약 복용과 유통입니다.”
대답하는 황차대 검사의 표정은 이런 지겨운 일을 맡아서 피곤하다는 듯 지루함이 가득했고, 그런 표정은 장년의 사내에게 모욕감마저 주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귀빈들 있는 자리에서 뭐하는 짓인가?! 내일 따로 불러내도 되잖아!”
격분해서 내뱉는 남자의 말에 황차대 검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식이나 손자분들 마약 반입하고 마약 처먹으며 노는 거 애써 모른 척하거나 무마하는 사람들이 귀빈이라니. 연회장 수준 참…….”
“뭐어?!”
“다 그런 분들은 아니니까 진짜 귀빈분들께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황차대 검사는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손짓했다. 삼천 그룹 회장 손자라는 젊은 남자가 병사들에게 붙잡혀 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너희 내가 누굴 줄 알고 이러는 거야?!”
“알죠. 아무리 검찰이라고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잡아갈 순 없답니다.”
“너희 세상이 오래갈 줄 알아?!”
“오래가든 아니든 그동안 콩밥이나 좀 먹읍시다.”
황차대 검사는 시니컬하게 대꾸하며 연회장에서 사라졌다. 연회장 분위기가 엉망이 된 건 당연했다.
정호태가 소리 없이 경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경찰도 아니고 군인을 데려와서 잡아가는 검찰이라니…… 살벌한데요?”
“경고죠, 경고. 수작 부리는 거 다 보고 있다는.”
경완이 대꾸했다.
군부 정권은 검찰을 장악한 이후 반부패수사부의 명칭을 다시 특수부로 바꾸었다. 왜? 단순히 부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벌을 노리는 칼로써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방금 잡혀간 저 재벌3세의 경우를 봐도 그 목적은 명료해 보였다. 아마 예전이라면 특수부가 아니라 강력범 전담부서로 넘어갈 일이었다. 그리고 솜방망이 처벌로 풀려났겠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조폭 나부랭이 마약사범과 재벌 3세 마약사범이 같은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마땅히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그것이 비록 군부 정권에 의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경완은 사라진 병사들을 보며 작게 말했다.
“정청완 중장이 참 똑똑해요.”
“왜요?”
그 말을 들은 정호태가 궁금해하자 경완이 조용히 설명했다.
방금 일어난 체포쇼는 여러 가지 방향을 노린 것 같았다.
하나는 재벌들의 동향을 군부 정권, 아니 정청완 중장이 주시하고 있다는 경고였으며, 또 하나는 검찰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군부 정권의 실력과 권위를 보여주었다.
그런 것들을 보여준 이유는 허장성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타초경사의 계가 아닐까?
“타초경사라면 오히려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정호태가 의아해했다.
“무협지에서나 그렇지 실제로는 삼십육계에 나온 계략이래요.”
가벼운 도발이나 미끼로 적의 본색을 드러내게 한다는 게 타초경사의 진정한 의미였다. 무협지에서처럼 타초경사의 우(憂)가 되려면 체포쇼에 위기감이나 분노를 느낀 재벌들이 일치단결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경완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겁이 많다. 겁이 많으면 싸움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야성을 가진 맹수라면 두려움에 더욱 광폭해지겠지만, 민주화 이후로 재벌로서 안락함을 흠뻑 만끽한 이들에게 그런 위기감과 야성이 남아 있을까?
하물며 저 재벌들이 완전한 위계서열을 갖춘 조직도 아니고, 저들이 보유한 엄청난 재산만 빼고 보면 오히려 각자의 이익에 따라 모인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지금 연회장 안에 도는 어색한 분위기가 그러한 정황을 방증했다.
아마 각자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복잡하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조직성이 생각만큼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갑시다.”
경완의 말에 정호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연회장을 벗어났다.
정호태는 경완과 함께 차 뒷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위버멘쉬 코리아는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무력적으로 건들지 못하게 조직을 구성해야죠.”
“어려운 문제네요.”
후자(後者)는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어렵다. 몰래 척살팀을 만들어서 부패한 판검사 암살하던 인간들에게 뭐가 어렵나 싶겠지만, 경완이 말한 대상은 배때기에 칼을 쑤시면 들어가는 판검사가 아니라 찌르기 전에 칼이 들어갈지, 칼을 찌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초능력 병사들이었다.
전자(前者)도 생각보다 어려웠다. 예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 위버멘쉬 코리아는 재벌이라는 그간의 고객과 군부 정권이라는 실세 사이에서 균형점을 잡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냥 재벌과 손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정호태의 말에 경완은 대답했다.
“당장은 아니에요.”
정청완 중장은 재벌을 손보기 위해 경완과 위버멘쉬에게 중립을 요구했다.
상호불가침 조약이 파괴되면 그땐 정청완 중장도 모든 것을 걸고 도박에 나설 것이다. 재벌과 이경완의 협동은 가공할 정도로 강력할 테니까.
물론 그럼에도 경완은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지만 상처뿐인 승리가 될 것이 뻔했고, 이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지금의 재벌을 도와봤자 그들이 고마움을 간직하고 경완에게 고개를 숙일 것 같은가?
정청완 중장이 없었을 때부터 그들과 경완은 서로 결이 맞지 않는 족속이었으니, 경완에겐 재벌과 손을 잡는 것보다 정청완 중장과 손을 잡는 편이 더 나았다.
대가리 여럿을 상대하는 것보다 대가리 하나만 상대하는 편이 덜 번거로웠으며, 결이 맞지 않은 인간들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줄 생각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