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일주일 전의 당신은
캄캄한 산속 길.
기태랑의 뒤에 바싹 붙어 하산을 시작했다.
그 기태랑이었다니.
정상에서 피를 뒤집어쓴 귀신… 인 줄 알았던 기태랑을 만난 지 10분.
- 괜찮나?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말을 걸어온 기태랑.
기태랑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구룡산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나저나 처음 만나자마자 꺄라니.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스윽.
다시 한번 기태랑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여전히 피에 흠뻑 젖어있는 모습.
소연 님이랑 희연 님은 대단한 거였어.
내가 비슷한 몰골이었을 때 마주쳤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비명은커녕 인상만을 찡그리며 호다닥 자리를 피했었던 두 사람.
이제 보니 비명을 안 지른 것만 해도 대단한 담력이었다.
잭 더 리퍼가 쿨타임이라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반사적으로 꺼내어 휘두르고 말았을 것이다.
어차피 안 통했겠지만.
다이아몬드 인간, 기태랑.
내가 오해하고 면도칼을 휘둘렀더라도 기태랑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을 터다.
오히려 다이아몬드에 부딪힌 내 팔이 더 아팠겠지.
“크워어어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내려가고 있을 때.
앞쪽에서 데몬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
펑!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기태랑이 지름길이라며 날 데리고 온 길.
관리되던 곳이 아니어서인지 길에선 심심할 때마다 데몬이 튀어나왔다.
- 데몬!
처음엔 튀어나온 데몬에 호들갑 떨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었지만,
- 펑!
- 펑!
- 펑!
몇 번의 동일한 상황이 반복된 후 지금은 단검을 꺼내긴커녕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데몬! 이라며 눈을 크게 뜨는 것조차 낭비라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적을 처리해버리는 기태랑.
역시 1급은 클라스가 다르구만.
1급의 명품 클라스를 느낌과 동시에 저렇게 한 마리 한 마리 다 터뜨려버리니 피범벅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호다닥.
잰걸음으로 기태랑의 뒤로 바싹 붙었다.
피는 좀 튀길지언정 가장 안전한 자리였다.
게임에서 버스 타면 이런 느낌이려나.
5:5 대전 게임을 할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버스 기사.
기사는 4명의 멱살을 잡고 승리까지 버스를 운행하곤 했는데, 기태랑에게서 그런 기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기사 중에서도 운전 실력이 최고인 베스트 드라이버의 향기가!
기사님한테 바짝 붙자.
데몬이 계속 등장할 테니 듬직한 버스 기사의 등에 바짝 붙어서 가야 안전….
휙.
움찔.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기태랑에 나도 모르게 움찔해버렸다.
너무 바짝 붙은 모양이다.
“….”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구만.
첫 만남 꺄에 이어 거머리처럼 바짝 달라붙는 행동까지.
이상한 놈이라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 10급 헌터 지원자라고?”
“어…. 네. 맞습니다.”
아까 한 대답으론 부족했는지 기태랑이 재차 물어왔다.
여전히 안 믿긴다는 듯 묘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는 기태랑.
“왜 꼭 10급이야? 이유가 있는 건가?”
“음… 급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국가 조직에 깊이 속하게 된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전 그런 걸 안 좋아해서요.”
기태랑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복지라고 여겨서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하는 걸 안 좋아한다니, 특이하구만. 뭐,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오.
이해한다는 기태랑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TV나 영상에서만 보던 유명 인사가 내 말을 납득해주고 있다니.
신기한 느낌이다.
“사실 안 믿었거든. 개미굴을 쓸어버렸던 사람이 10급 헌터에 지원하다니? 밑에 있던 애들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었다.”
봤구나.
얼굴이나 이름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동영상에 보니와 리드의 탄환 빛줄기가 너무 제대로 찍혀버렸다.
기태랑 역시 조금 전 크럭커에게 쏘아진 빛을 보고 알았을 터.
피식.
감탄사밖에 뱉지 않는 나에 기태랑이 실소를 터뜨렸다.
“설마 그렇게 화려하게 쏴대고선 정체는 비밀이었는데…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 아니에요.”
그러고 싶었지만.
나도 양심이란 게 있었다.
영상에 그렇게 찍혀있는데 비밀이라니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나마 얼굴이 안 팔려 길 가다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걸 다행으로 여길 뿐이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더 높은 급수로 지원할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 생각이 있다면 내가 추천서를 써줄 수도 있는데.”
!?
모두가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1급 헌터의 추천서라니.
예상컨데 기태랑의 추천서가 있다면 승진 하이패스는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높은 급수까지 올라가면 많은 부를 쥘 수 있을 테고 인기도 많아….
짝!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10급이 좋아요.”
정신 차려야 한다.
성공 가도를 달릴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책임과 제약이 생겨버린다.
“1급 헌터의 추천서를 거절하다니. 아마 최초일 거다.”
어깨를 으쓱 올린 기태랑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TV에서 봤을 땐 엄청 껄렁껄렁하고 성격도 괴팍해 보였었는데.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그냥 시원시원한 아저씨였다.
아, 그냥 아저씨는 아니고 멋있고 쎈 아저씨.
“그런데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처음 만났을 때 반응이 묘하던데.”
“그건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피칠갑을 하고 나타나셨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죠.
“아니, 그거 말고. 나라는 걸 알고 나서 말이야.”
“아.”
구룡산의 정상.
기태랑이 괜찮냐며 물어온 순간, 달빛이 기태랑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었다.
대충 뒤로 넘겨놓은 갈색 머리와 만사가 귀찮다는 듯 반쯤 감긴 눈.
달빛 덕분이었다.
내게 말을 건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1급 헌터라는 걸 알게 된 건 말이다.
하지만, 기태랑이 말하는 것.
앞에 있는 게 기태랑이란 걸 안 후 나도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었던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또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하 갑자기 유명인을 만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대답을 기다리는 기태랑에게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의 나로썬 기태랑의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식.
“그렇구만.”
다소 뻔한 답변에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기지개를 켜는 기태랑.
“어디 다친데는 없으니 잘 따라올 수 있지?”
“넵!”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기태랑의 뒤로 바짝 붙어 보였다.
“좋아, 그럼 속도를 올려볼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 * *
기태랑을 쫓아오다 보니 순식간에 도착하게 된 구룡산 입구.
그곳엔 죽상을 하고 있는 김경찬과 임수빈이 앉아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니.
저 둘을 말하는 거였구만.
“아!!”
“배… 백운 님!”
나와 기태랑을 발견한 두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에요!”
김경찬의 얼굴엔 안도의 표정이, 임수빈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말 죄송해요. 백운 님을 혼자 보내버리다니.”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죽상이었구만.
김경찬과 임수빈은 아직 헌터가 되지도 않은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이야.
“아니에요, 제가 그러자고 한 건데요 뭘.”
나를 제외하고 모두의 마음이 뭉클해지는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
지금이었다.
말해야 되는 타이밍이다.
“저 경찬 님. 아까 빌려주셨던 화기, 부서져 버렸어요.”
차마 크럭커의 입에 던져 넣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던져 넣었을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내 탄환에 맞고 가루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못했다.
덥썩!
“그런 건 신경쓰지 마세요! 백운 님이 무사하다는 게 중요하죠!”
이 착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둘의 반응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시간이 늦어서 차도 다 끊겼을 텐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빈아!”
“네! 잠시만요!”
김경찬이 말하기 무섭게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시작한 임수빈.
어차피 차가 안 끊겼더라도 집이 없는 처지라 돌아갈 곳도 없었는데.
뭘 하려는 걸까.
“예약 완료했습니다.”
예약?
꼬옥.
“!?”
김경찬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희의 죄송한 마음입니다! 거절하지 말고 꼭 받아주세요!”
* * *
끼이익.
와우.
3일 연속 의도치 않은 공짜 호텔행이라니.
드디어 인생이 피는 건가.
김경찬과 임수빈이 예약해준 구룡산 근처의 호텔.
눈앞에 날 기다리고 있는 침대가 보였다.
폭!
푹신한 침대로 몸을 던졌다.
자고로 침대란 씻고 몸을 던지는 게 국룰이지만, 지금은 샤워 대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처음 만났을 때 반응이 묘하던데.
기태랑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TV에서나 가끔 보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머나먼 사람.
그것이 내가 느꼈던 기태랑이었다.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내가 유물관의 아재에서 회귀한 지는 이제 막 일주일이 되려는 찰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어서 그런지 나름 지금의 나에게 적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과 일주일 전까지의 일들이 남 일처럼 느껴지고 그런 건 아니었다.
음.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활약을 하며 데몬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온 1급 헌터, 기태랑.
그의 능력이 다이아몬드 인간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기에 모든 이가 기태랑을 무적이라고 불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험한 전투 속에서도 기태랑은 단 한 번도 상처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국가 차원에서의 엄청난 손실입니다.
-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 서울에선 영웅을 추도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적이라 여겼던 기태랑이 목숨을 잃고 만 것.
- 정부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 영웅의 죽음에 대해 규명하라!
기태랑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보도된 게 없어서일까.
추도의 기간이 끝난 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정부와 언론이 기태랑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시했다.
그건 아닐 거 같은데 말이지.
무능력자로 유물관에서나 일하던 내가 뭘 알겠냐마는.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감추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숨기고 자시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아마 정부든 언론이든 몰랐을 것이다.
아니, 누구보다 진실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 다이아몬드는 검으로 벨 수 없다. -
초등학생도 알 만한 상식과 법칙을 깨버리고 국가의 영웅을 베어 죽인 범인이 대체 누구인지 말이다.
스윽.
감았던 눈을 떠 천장을 바라봤다.
대한민국 1급 헌터, 기태랑.
불과 일주일 전까지의 나에게 있어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