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한국으로
뒷정리를 기태랑에게 떠넘기고 달려온 마을, 오이먀콘.
구석으로 가자 늦은 밤인데도 할아버지가 짐을 나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자네…! 도망가라니까 어째서!”
“이제 괜찮아요. 안전해졌거든요.”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며 곁으로 걸어갔다.
“저 할아버지 혹시….”
조심스럽게 가지고 있던 명찰을 꺼냈다.
라피타 마을에서 차냑이 건네준 명찰이었다.
명찰을 받아 든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 아들…이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면서도 무언가 내려놓지 못하는 듯했던 할아버지의 모습.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명찰을 건네받을 때 그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이걸 어디서…?”
차냑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듣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끝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어서요.”
“아닐세. 죄송하다니.”
몸을 앉힌 할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몇 년이 흘렀으니 살아있기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 머리로는 말이야.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슴으로 손을 얹었다.
“여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 죽었다고, 아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희망을 가졌었네. 혹시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사고가 나 기억을 잃어서 못 돌아오는 거라면? 언젠가 기억을 되찾와 여기로 돌아온다면? 하는 희망이었지.”
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희망은 좋은 거라고.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과 기다림은 아니더군.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과 정신은 갉아 먹혔어. 더 이상 갉아 먹히면 안 된다고 생각해 오이먀콘을 떠나려고 했지만 결국엔 그럴 수 없었지. 혹시라도 아들이 돌아온다면 이란 희망이 날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거든.”
잠시 말을 멈췄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하얀 속눈썹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몇 번인가 심호흡한 할아버지가 내 손 위로 손을 포갰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앞으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됐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한 후.
높이 떠 있는 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았다.
* * *
“진짜 데려가게 되는군요.”
김정윤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옥시나를 바라봤다.
현실을 받아들인 건지 옥시나는 넋이 빠진 얼굴로 앉아있었다.
“어… 저기 와요!”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어두운 하늘.
여기저기 둘러보던 대산의 직원이 손을 번쩍 올렸다.
그곳에선 거대한 군용 비행기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여기도 비행기 착륙할 수 있는 거였어?”
고개를 돌려 옥시나 쪽을 노려봤다.
괴물 열차에 우릴 태우려고 일부러 아쿠츠쿠에 착륙한 것이었다.
조용히 비행기를 바라보는 김정윤에게 입을 열었다.
“정윤 님 친구 분 흔적은 결국 못 찾은 거죠?”
“예. 당장은요. 하지만 정황으로 미루어봤을 땐….”
김정윤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당시 왔던 연구원들은 각자 시기와 형태는 다르겠으나 최후엔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연구를 맡았던 옥시나가 목격자를 살려뒀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서 조사하면 더 확실하게 밝혀지겠죠.”
대산엔 미리 연락을 받은 최리아가 대기 중이었다.
정부 쪽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승인을 내린 상태.
언제 러시아에서 반환 요청을 할지 모르는 만큼 조사는 빠르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요즘 들어선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김정윤이 박살이 나 있는 열차와 옥시나를 번갈아 봤다.
“이번 침공만 해도 데몬과 인간의 합작품이란 게 꽤 충격적이었거든요. 그런데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이 또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렇죠. 아마 더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으니까요.”
“그렇겠죠.”
한숨을 푹 내쉬던 김정윤이 날 돌아봤다.
“아 백운 님. 그나저나 아까 직원과 함께 무언가 만드시던데…?”
“그거요.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오이먀콘 너머.
설원 한복판에 있을 동굴 방향을 응시했다.
“지금은 안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가요. 아쉽군요. 백운 님이 뭘 그렇게 열심히 만드시는 건 처음 봐서 궁금했습니다.”
허허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착륙한 비행기로 사람들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조금 있다 비행기 안에서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김정윤이 대산 직원들에게 걸어갔다.
사라진 연구원들은 못 찾았지만 데몬이 잠들어 있었던 장소나 러시아가 만들었던 열차에 관련해선 적지 않은 자료를 수집했기에.
대산 입장에서도 수확이 아예 없는 여정은 아니었다.
“다행이네. 늦지 않게 와서.”
한참 바쁘게 연락하던 시라크가 다가왔다.
함께 있던 헌터들은 모두 모스크바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지금 전화기 불나고 있는 거 아니야?”
시라크가 손에 쥔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헌터들이 돌아가며 보고한 거겠지. 시라크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어쩐지 전화 너머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더라.”
“아주 난리더라고. 당장 옥시나 데리고 모스크바로 복귀하라고.”
“감옥 가는 거 아니야?”
“아닐걸. 지금 전화 오는 것도 일부 장관들이지 러시아 전체는 아니거든. 이미 상황은 틀어졌으니 옥시나 직속을 제외하곤 강 건너 불구경 중이야. 이참에 눈에 거슬리던 놈들을 쳐낼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시라크가 지도 한 장을 켜 보여주었다.
“정부에서 하늘길 열어달란 내 요청을 들어준 게 그 증거지. 뭐 원래라면 혹시나 엉뚱한 짓 할 걸 대비해서 내가 함께 탔겠지만… 안 그래도 될 거 같고.”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나 뿐만이 아니라 기태랑과 대산의 기둥도 한 명 타 있는 상태.
뭐가 오든 비행기 지켜내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러시아 나가려면 꽤 피곤했을 거 같은데.”
“별말씀을. 덕분에 고집불통 아버지랑 부족이 내 말을 따라주게 됐으니 내가 더 고맙지. 백운, 넌 라피타 부족과 설원을 구해준 은인이야. 은혜는 꼭 갚을게.”
“에이. 은혜는 무슨. 지금만 해도 도와주고 있잖아.”
피식 웃음을 터뜨린 시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괴물이 러시아를 다 부수기 전에 돌려보내려는 것뿐이야.”
시라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 다 실었고 인원도 전부 탑승했습니다!”
“시라크 장군님! 이륙 준비 완료했습니다!”
“갈 시간이구만.”
미소 지은 시라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 보자고. 무기왕 친구.”
내민 손을 맞잡으며 나도 미소를 그렸다.
“또 보자. 뱀 친구.”
* * *
한참 이주 준비 중인 라피타 부족.
부족 마을에서 빠져나온 차냑이 술과 음식을 들고 설원을 거닐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페리아와 사야, 그리고 헤스티아가 지냈던 동굴을 들려보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동굴 입구.
차냑이 동굴을 올려다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와보는군.”
백운이 다녀간 후 사야의 한기가 사라진 동굴.
정말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동굴로 드디어 발을 딛게 된 것이었다.
한껏 기대를 품은 차냑이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누가 먼저 다녀간 건지 들어갔다 나온 발자국이 있었다.
아직 자국이 선명한 걸로 보아 조금 전에 다녀간 것 같았다.
‘와볼 사람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차냑이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한기가 사라져서인지 청광석에서 봤던 동굴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동굴을 둘러싸고 있는 건 더 이상 푸른색의 시린 얼음이 아니었다.
얼음이 녹아내린 밝은 갈색의 바위로 보기만 해도 따듯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인가.”
넓어지는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야와 페리아, 헤스티아가 함께 지내던 공간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에서 들어와 그런지 몰라도 공간에선 피부를 간지럽히는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다.
“…!!”
공간을 둘러보던 차냑의 눈이 커졌다.
사야가 봉인되어 있었던 바위 아래.
손바닥 크기의 작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다가간 차냑이 조각상을 살폈다.
급하게 만든 건지 여기저기 허술한 부분이 많았지만,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허허….”
미소를 그리며 조각상을 보던 차냑의 눈가로 물기가 맺혔다.
조각상엔 세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헤스티아를 따듯하게 안고 있는 사야와 페리아.
함께 모인 세 사람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 *
# 시라크 장군님. 한국 인천공항에 무사히 착륙 완료했습니다.
“수고했어.”
전화를 끊은 시라크가 복도를 거닐었다.
오이먀콘의 일로 긴급하게 소집된 모스크바 회의.
회의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이 애타게 시라크를 찾았기에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묵이 감돌던 회의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짓입니까! 시라크 장군!! 나라의 주요 자산을 아무 허락도 없이 한국으로 보내버리다니!”
“누구 허락을 받고 그딴 짓을 한 겁니까?!”
“… 허락?”
잠자코 듣고 있던 시라크가 방금 말한 남자를 쳐다봤다.
그런 시라크에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 앉는 남자.
“누구의 명령도 들을 필요 없다. 이게 내가 러시아에 협조하는 조건일 텐데?”
“그, 그건….”
“그건 즉.”
시라크의 몸 주위로 검은 뱀의 형상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그 기름진 배를 찢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거고. 안 그래?”
겁먹은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하…. 그러지들 마시고 일단 시라크 님도 앉으시죠.”
주최자인 총리의 말에 시라크가 의자로 몸을 앉혔다.
“그럼 시라크 님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요? 그런 판단을 내리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라크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골 빈 새끼들이 내린 무기왕 토벌 작전 덕분이지.”
조금 전 목소리를 높이던 남자를 포함해 몇 명이 헛기침을 했다.
이번 무기왕 작전을 주도했거나 적극 찬성한 인물들이었다.
“대놓고 자기 목숨을 노린 러시아를 무기왕은 그 옥시나 하나만으로 봐준 거다. 감사하진 못할망정 아직도 소리를 지른다는 게 놀랍구만.”
“누가 누굴 봐준다는 건가?! 무기왕이 아무리 강해도 개인이네! 감히 대 러시아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안전한 곳에 앉아서 그딴 소리나 지껄이니까 뒷방 늙은이라고 불리는 거야.”
“지금 뭐라고…!?”
“내가 장담하는데 그 작전 계속했으면.”
시라크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지금쯤 모스크바는 다 개작살이 났을 거다.”
“헛소리! 무기왕이 그 정도는 아니….”
“그러고도 차고 넘친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봤거든.”
자세를 낮춘 시라크가 총리를 응시했다.
“당신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똑똑히 전해둬. 무기왕은 이기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당신들이 헛짓해서 만약 무기왕이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난 싸우지 않을 거다.”
“국가를 버리겠다는 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난 지는 싸움은 안 한다고. 그리고 늙은이.”
몸을 일으킨 시라크가 고함치던 노인에게 걸어갔다.
“오늘 이후로 군에선 당신이 벌였던 열차 연구부터 이번 무기왕 작전까지 샅샅이 다 조사할 거니까… 기대하라고.”
노인에게 얼굴을 들이댄 시라크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렸다.
“지금 쥐고 있는 거 그대로 다 내려놓게 해줄 테니까.”
말을 마친 시라크가 몸을 돌려 회의실 문으로 걸어갔다.
침묵과 적막으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회의실.
들어올 때완 달랐다.
그 누구도 나가는 시라크를 붙잡을 수 없었다.
러시아의 검은 뱀 시라크.
그가 허투루 말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못 이기는 존재라.’
마른침을 삼킨 총리가 의자로 몸을 기댔다.
시라크마저 그렇게 표현한 걸 보면 무기왕은 명백한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모스크바까지 안 오고 끝났으니….’
총리의 입가로 난처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행… 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