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제국의 가장 거친 땅에서 자란 아무르였다. 금세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부끄러운 모습을... 말 이름에 놀라다니.”
아무르는 옷에 묻은 먼지와 지푸라기를 탁탁 털어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아무리 에인로가드라고 하더라도 그리폰을 구했을 리 없었다.
아마 말 이름이 그리폰인 게 분명했다.
말에 무시무시한 몬스터의 이름을 붙이는 건 꽤 흔한 일이었으니...
“아니요. 진짜 그리폰입니다만.”
“......”
일어나던 아무르는 다시 휘청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어디서 그걸 구했소? 아니, 그보다 마법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요?”
아무르는 보기 드물게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이 그리폰을 잡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학생이 그리폰을 잡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마법사들이었다.
스승이 되어서 제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괴팍하다지만 이건 좀...
“음.. 그게...”
“교수님이 갖고 온 거예요.”
보다 못한 요네르가 대신 말했다. 아무르는 멍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정말이오?”
“사실 여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들으신다면 이해하실 겁니다.”
“이해 못 할 것 같소만...”
아무르는 일단 이한의 설명을 기다렸다.
이한은 그리폰이 진짜 그리폰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 말로 변신한 그리폰이라고 설명했다.
교수가 학생들이 몬스터에 익숙해지게 만들려고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보다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죠?”
설명을 끝낸 이한이 물었다. 아무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상하오.”
“!”
그... 그런가?
이한이 살짝 당황해하는 사이 아무르가 말을 이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괴팍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이 정도면 사실 괜찮은 편입니다.”
“이한... 그냥 말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요네르가 이한을 말렸다.
더 말해봤자 아무르가 이상한 오해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저게 오해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참 동안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보여준 괴팍함에 괴로워하던 아무르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날 수 있는 탈것을 찾았다니 잘 됐소.”
“예. 아직까지 첨탑 마구간의 길을 찾진 못했지만, 곧 찾아낼 겁니다.”
“천천히 하시오. 서둘러서 하면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아지니. 탈출은 나가는 것보다 들키지 않는 게 더 중요하오.”
‘대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요네르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폰이 좋아하는 건 뭐가 있습니까?”
“음. 신선한 말고기를 좋아하오.”
“...그것 말고는 뭐 없습니까?”
“덜 신선한 말고기도 좋아하는데...”
일단 말고기를 제외하고, 이한은 그리폰이 좋아할 만한 간식을 챙겼다.
고기 통조림들과 설탕들이 배낭에 차곡차곡 쌓였다.
“참. 이고르가 마을에 왔는데 만나봤소?”
“이고르란 분은 누구십니까?”
이한이 의아해하자 아무르는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하도 자연스러워서 몰랐지만 이한은 여기 마을 사람이나 모험가가 아니었다. 저 마법학교 안의 학생이었다.
“내 사촌이오. 여기 마을에서 희귀한 동물들을 모험가들에게 팔곤 하지.”
마법사들이 소환수를 키우는 것처럼 잘 훈련 받은 동물들은 언제나 모험가의 좋은 친구였다.
그런 만큼 희귀하고 강력한 동물들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대부분 자리에 없는 녀석이라 놓쳤나보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은 제가 사기에 비싸지 않을까요?”
이한이 학생들의 주머니를 갈취, 아니, 정당한 노력으로 긁어모으고 있긴 했지만 정말 부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마을에서 각종 식료품과 책들을 살 정도는 됐지만 비싼 동물을 살 정도는 아닌 것이다.
“꼭 비싼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니 한 번 둘러나 보시오. 내가 말해둘 테니 잘 알려줄 거요.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가시오.”
‘굳이?’
이한은 굳이 검은 거북이 탑이나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데리고 가야 하나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아무르 앞에서 선량하고 성실한 학생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 * *
“당신이 그 그리폰을 길들였다는 학생 맞소?!”
“......”
이고르는 이한을 만나자마자 다급하게 속삭였다.
다른 학생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제가 길들인 게 아니라...”
“아니오?”
“맞긴 합니다만 그게.”
“맞다는군!”
가게 안에서 이고르를 돕던 동료 모험가들이 달려오더니 이한을 둘러쌌다.
“정말로 그리폰을 길들였소?”
“대체 어떻게?”
“쉿. 목소리를 낮추게. 비밀로 하기로 했단 말이야.”
“알, 알겠네. 그래서 어떻게 그리폰을 길들였소?”
이고르는 아무르와 비슷하게 생기고 비슷하게 차려입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그건 그리폰을 어떻게 길들였는지에 대해 아주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아무르도 호기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에인로가드 학생이라 불쌍해서 괴롭히지 않은 거지...
“정말 운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목숨을 구해줬다고? 과연!”
“그렇다면 말이 되지!”
수염 덥수룩하고 먼지투성이인 모험가들이 납득한 것 같자 이한은 안심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폰은 순순히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타고난 게 분명해.”
“다음에 고르곤을 잡으러 갈 때 같이 갈 수는 없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실력 있는 모험가는 어디에서나 대접을 받는 귀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귀한 존재는 몬스터들에게 사랑받는 친화력을 가진 존재였다.
모험가들은 어떻게든 이한을 데리고 함께할 수 없나 탐을 냈다.
“다들 진정하게. 이 학생은 에인로가드의 학생이야.”
“아차...”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고르의 친구들은 빠르게 포기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마법사들이 쫓아와서 짐승으로 만들지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졸업하고 나서 생각이 난다면 꼭 여기로 연락 주게.”
“우리의 일은 위험, 고통, 낭만으로 가득 차있으니. 함께하기에는 충분할 것이오.”
“...?”
이한은 자부심 넘치는 모험가들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저걸 지금 진지한 제안이라고 하는 것인가?
‘모험가들 중에 미친 사람들이 많다더니 정말이로군!’
지금 저걸 진지한 제안이라고 말한다니...
“자. 따라오시오.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게 됐소.”
이고르는 사과하고 가게 안을 안내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제국을 돌아다니며 희귀한 동물을 찾고 잡는데에 쓰는 만큼 가게 안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새로 들여온 동물들이 그만큼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르륵!
새장 안에 갇혀 있는 새가 스스로 타오르더니 갑자기 얼어붙었다. 이고르가 설명했다.
“정령조. 정령의 힘이 깃든 보석만 먹는 희귀한 새요.”
‘미친 동물이군.’
이한은 경악했다.
일주일만 데리고 있어도 파산이고 한달쯤 데리고 있으면 빚쟁이로 만들어 줄 동물이었다.
“미안하지만 저건 이미 살 사람이 정해져 있소. 인근의 귀족 분에게 팔기로 했지.”
“괜찮습니다.”
이한은 거저 줘도 받기 싫었다.
“마법학교 학생이라면... 비둘기나 쥐가 쓸만할 것 같소.”
훈련 받은 비둘기는 날아다니며 몰래 편지를 전달해줬고, 훈련 받은 쥐는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곳을 오고 다니며 함정을 해제할 수 있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구비해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얼마입니까?”
“공짜요. 아까 그리폰에 대해 물어봤으니 대가를 내야지.”
“아니 그런. 감사합니다.”
이한은 너무 거절하지 않고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리폰 깃털이라도 좀 갖고 나올 거 그랬나?
-이 사슴은 얼마쯤 하지?
-윽. 무리다. 절대 못 사겠는데.
-워다나즈한테 돈을 더 빌려서 사면 안 되나?
-아무리 워다나즈가 관대해도 저거 사겠다고 돈 빌려달라고 하면 널 죽일 것 같은데...
-관둬. 어차피 나중에 소환마법 배울 거잖아.
‘이 자식들이 눈치가 없군.’
이한은 눈썹을 찌푸렸다.
남이 장사하는 가게 가서 ‘마법으로 하면 되지’같은 소리는 하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마법사들이 눈치 없다고 욕먹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고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법사들은 직접 계약해서 소환하는 방법도 있긴 하오. 그것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값이 들지 않으니... 당신은 어떻소?”
“이한은 이미 정령하고 계약했어요.”
요네르의 말에 이고르는 감탄했다.
“과연... 하긴 그리폰의 충성을 받을 정도로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령의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하겠지.”
“...아닙니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이한은 당황했다.
정령의 사랑은커녕 두려움만 잔뜩 받고 있는데...
그러나 이고르는 이한의 말을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모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노력해도 운이 나쁘다면 얻을 수 없는 게 그리폰의 충성이었다.
그런 충성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타고난 친화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예.”
“허리춤에 있는 그 소환수는 혹시, 샤르칸이오?”
이고르는 이한의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장신구 모양의 뼈를 보고 설마 싶었다.
잠들어 있는 샤르칸이었다.
“예. 샤르칸입니다.”
“역시! 설마 했는데...”
상대가 이상한 오해를 할 것 같아서 이한은 빠르게 해명에 나섰다.
“언데드입니다.”
“보면 아오. 더 대단하군.”
“...제가 만든 게 아니라 다른 흑마법사 분이 만든 걸 선물로 받은 겁니다.”
“당연히 알고 있소. 설마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 저걸 만들었겠소? 언데드 몬스터, 그것도 샤르칸이라면 그 성질머리가 정말로 더러울 텐데... 이렇게 잠들게 해서 데리고 다니다니. 정말 친화력이 대단하오.”
“......”
이한은 그냥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불러낼 때 몸을 뭘로 만들어주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물로 몸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양이 상당히 많이 필요할 텐데? 설마 주변에 강이나 연못이 없으면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이오?”
“마법으로 불러냅니다만.”
“......”
이고르는 깜짝 놀랐다.
샤르칸 정도 되는 몬스터의 근육과 살을 전부 불러낸 물로 채워주다니.
이게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란 말인가!
‘대단하다!’
대단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신입생도 이 정도일 줄이야...
이고르는 자신의 가게를 둘러보는 학생들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들이 여기 있다!
“왜 저러시지?”
“우, 우리가 안 사고 너무 떠들기만 했나?”
“전서구는 살 건데...”
학생들의 속삭임을 듣지 못하고 혼자서 뿌듯해한 이고르는 작은 녹색 유리병을 꺼내더니 이한의 손에 쥐어줬다.
“이걸 받으시오.”
“이게 뭡니까?”
“녹주옥(綠柱玉) 용액이오. 정수를 녹여 만든 액체지. 이걸 물에 섞어주면 샤르칸이 아주 좋아할 거요.”
“이런 걸... 그냥 받아도 됩니까?”
이한은 머뭇거렸다.
적당한 공짜는 뒤탈이 없었지만 너무 큰 공짜는 뒤탈이 조금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고르는 괜찮다는 듯이 이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몬스터나 정령에게 사랑 받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나 같이 몬스터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모험가에게 중요한 일이오. 행운을 불러오거든.”
“...정말 오해입니다.”
이한은 진지하게 이고르가 걱정됐다.
* * *
이한은 선물받은 녹주옥 용액을 보며 혀를 찼다.
이고르는 이한이 아무리 사양해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에서 하루 묵으면 안 돼?”
“안 돼.”
“왜?”
“그러면 넌 남아.”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원래 새벽 일찍 출발해서 학교로 돌아가도 됐다.
하지만 이한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해골 교장의 예상을 무조건 앞질러가야 한다.’
지금쯤 바짝 독이 오른 해골 교장이 뭔 개지ㄹ... 아니, 함정을 파놓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제님들도 다 왔지? 출발하자.”
“그런데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다른 탑 학생분들은...”
사제 중 한 명의 질문에 이한은 못 들은 척했다.
다른 탑 학생들 설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 출발하자!”
“못 들으신 걸까?”
샤아아아악-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걸어가던 도중,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마법으로 빛을 불러내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앞은 더 어두워지고 있지?
마법학교의 학생들이군.
갑옷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중무장한 기사 한 명이 나타났다.
온몸에서 죽음의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는 언데드 기사였다.
이한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데스 나이트!’
나는 주인의 명령으로 이 길을 지키고 있다. 마법학교의 학생들은 한 명을 바치면 길을 지나갈 수 있다.
아산은 자신도 모르게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가이난도는 아산의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려고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