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심지어 흰 호랑이 탑 친구들도 술렁거렸다.
같은 탑 친구의 제안을 저렇게 뺏는 게 맞냐는 거였다.
하지만 앙라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건 딱히 기사로서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아니다.”
“미친 놈 아니야 저거?”
황자의 말은 무시하고 앙라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건이 있고 물건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지.”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이래도 괜찮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마법학교에 적응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잘 적응한 것 같았다.
“앙라고. 그건 상인이나 할 소리 아닌...”
“물건을 구매하는 게 상인만의 전유물은 아니잖아! 기사라고 물건 안 사야 해? 여기 너희 모두가 갖고 싶은 명검이 있는데 누군가 먼저 구매하려고 한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인가? 과연 그게 현명한 짓일까?!”
앙라고는 어지간히 과제가 힘들었는지 필사적으로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 기세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압도됐는지 ‘그런가?’ ‘그런 거 같기도’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이난도는 ‘개소리 같은데’라고 말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닿지 않았다.
“자. 워다나즈! 두 배 낼 테니까 나부터...”
“잠깐. 나는 세 배!”
“......”
앙라고는 한 가지 잊고 있었다.
자기가 두 배 얹어서 끼어든다면, 다른 사람도 더 올려서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검은 거북이 탑, 리치몬드 가문의 샤일스가 끼어들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차 운송업 가문인 만큼 샤일스는 외상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이런 돈이 썩어나는 놈들 같으니.’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기들이 번 돈도 아니면서 저렇게 막 낭비해도 되나?
“리치몬드 너 이 자식... 흰 호랑이 탑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냐?”
“무슨 헛소리냐? 네가 정당한 권리라고 말했지 않나?”
“그렇다면 네 배로 올리지!”
“물러설 거 같나? 다섯 배다!”
“...잠깐. 잠깐. 다들 모여 봐라!”
앙라고는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방금 말을 꺼낸 로웨나도 같이 끌려가서 머리를 맞대게 됐다.
“이거 분위기가 혼자 힘으로 사기 힘들게 됐다. 모두 힘을 합치자.”
“힘을 합치자니?”
“다 같이 사서 나누는 거다.”
“......”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흰 호랑이 탑 놈들을 쳐다보았다.
미친놈들이 뭘 나눈다는 거야?
그러나 광기는 흰 호랑이 탑뿐만 아니라 검은 거북이 탑에게도 전염이 됐다.
샤일스도 같은 탑 친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투탄타.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비겁하게 돈으로 워다나즈를 사려고 하고 있다! 도와줘!”
“저런 뿌리까지 비열한 놈들 같으니. 저게 기사란 말이냐?”
“......”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산이 뒤에서 입을 열었다.
“워다나즈. 지금 같은 상황은 좀...”
“그, 그래. 나도 예상 못했다.”
“그렇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무슨 방법이지?”
“다들 모여 봐.”
“?”
아산은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각자 낼 수 있는 은화를 계산했다.
“우리가 무조건 먼저 사야 해. 각자 낼 수 있는 만큼 최대로...”
“기선을 제압해버려! 다시는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
이한은 좌절했다.
* * *
마음 같아서는 성 한 채 뜯어내고 싶었지만 이한은 결국 그러지 않았다.
양심의 문제도 문제고, 언제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제국 신문에 ‘에인로가드 1학년 학생의 도 넘은 사기행위... 피해자 다수 속출, 에인로가드, 이래도 괜찮은가?’로 실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가격 그만 올리도록. 그냥 말한 순서대로 도와주겠다.”
“하지만 워다나즈. 그러면 뒤의 순서는 마력이 고갈되어서 못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럴 일 없을 거다.”
“하지만...”
“없을 거라니까.”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마력은 남다 못해 넘칠 거라고!
“워다나즈. 물론 네가 보기에는 이게 좀 어수선하게 잡혀 있긴 하겠지만...”
“변명은 됐고. 여기에 주입하면 되나?”
“으, 으응.”
파지직!
마력으로 점등되는 횃불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작동되는 모습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감탄했다.
“역시...!”
“시행착오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번에 작동하는군. 이게 완성형인가?”
“원래 마력 증폭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한 번에 붙는 걸 보니까 여기서 끝내도 괜찮을지도...”
“개소리하지 말고 제대로 해라.”
이한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시무룩해졌다.
그 뒤로도 이한은 다른 학생들의 구조물들을 훑어보았다.
“워다나즈 님. 이건 작동하면 덤벼드는 언데드들을 퇴치하는 장치인데...”
“교장 선생님을 노리고 만든 건가?”
“워다나즈. 마력으로 움직이는 목제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지?”
“말이었나? 다리가 여덟 개라 거미인 줄 알았는데.”
“......”
친구들의 구조물들을 보고 이한은 안심했다.
자신이 만든 구조물의 수준이 너무 낮을까봐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이한의 생각은 황녀의 과제 설계도를 보자 뒤바뀌었다.
설계도에는 다섯 개의 마법 장치를 정교하게 연결해서 완성시킨 소형 분수대가 그려져 있었다.
환상 마법과 원소 마법, 부여 마법을 사용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로웨나는 자기 자신의 작품처럼 뿌듯해하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워다나즈 님? 황녀 전하께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고 만든 설계도입니다. 학파를 세 개나 들으셔서 걱정이 됐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이 정도 설계도를 완성하시다니 정말...”
말하던 로웨나는 멈칫했다.
옆에 있던 황녀의 추종자들도 멈칫했다.
원래 마법 전공을 3개나 듣는다는 건 매우 놀라운 일이 맞았다. 보통 한 개에서 두 개 정도였으니.
3개를 듣는다는 건 뛰어난 지성과 타오르는 학구열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긴 한데 지금 눈앞에는 그 두 배는 되는 전공을 듣는 사람이 있었다.
“...세, 세 개 들으시는 게 그렇게 대단하지 않게 보여도 이게 정말 대단한...”
“대단한 거 맞으니까 그럴 필요 없다.”
이한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사실 이한이 어쩌다보니 인생이 꼬여서 그런 거지 3개 학파를 동시에 공부하는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 맞았다.
“정말 잘 만들었군.”
“역시 그렇습니까?!”
로웨나는 뛸듯이 기뻐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 성적부터 챙겨야 하지 않나?’
아까 보니까 작품 설계도가 영...
이한은 자기가 좋다니 더 이상 뭐라고 하진 않았다. 하긴 황녀 정도의 인맥이라면 졸업 이후에 한 자리 정도 챙겨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줄 수 있는 게 돈밖에 없는 가이난도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
설계도를 마저 꼼꼼히 확인한 이한은 물었다.
“그래서 마력을 어디에 불어넣으면 되지?”
“여기입니다.”
“?”
이한은 멈칫했다.
로웨나가 가리킨 곳에는 둥그런 뼈대 하나만 달랑 있었던 것이다.
다섯 개의 마법 장치를 정교하게 연결시켜서 완성해야 하는 분수대인데 고작 둥그런 뼈대 하나라니?
“아... 다른 장치들은 다른 곳에 있나?”
만약 가이난도가 했다면 ‘입으로는 도시도 짓겠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난이도 낮춰라’라고 뒤통수를 한 대 때렸겠지만, 아무래도 황녀의 이름값이 있었다. 이한은 최대한 친절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아직 준비 중입니다!”
해맑게 대답하는 로웨나의 모습에 이한은 순간 아찔해졌다.
일주일 남았는데 장치 하나, 아니, 장치 하나도 완성 안 된 상태라니.
...그래도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것 같은데.’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지금 다른 친구들이 구조물 절반 넘게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장치 하나도 완성 안 된 상태는 위험신호였다.
“너무... 느린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아. 방법이 있나보군.”
“예! 황녀 전하에게 이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과제입니다.”
“...?”
이한은 로웨나의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까 그 방법이 뭐지?”
“글쎄요?”
“......”
새삼스럽게 로웨나의 외투에 달린 흰 호랑이 탑 학생의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랬지. 얘는 흰 호랑이 탑이었지.’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로웨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른 추종자 놈들은 없나?’
“네블렌.”
같은 푸른 용의 탑 소속인 키락 가문의 네블렌.
이한은 네블렌을 불러서 물었다.
“너무 느린 것 아닌가?”
“조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황녀 전하라면...”
“...아니. 그런 믿음 말고 단시간에 장치 다섯 개를 완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네블렌은 머뭇거렸다. 이한은 확실히 불안해졌다.
이거...?
“황녀님. 괜찮은 거 맞습니까? 좀 느린 것 같은데요?”
이한의 질문에 아덴아르트는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시간이 꽤나 촉박한 건 사실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좀...”
“괜찮습니다. 워다나즈 님!”
“황녀 전하라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입을 열었던 황녀는 추종자들의 말에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방금 황녀님이 뭔 말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랬습니까?”
“아마 할 수 있다는 말이었겠지.”
황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문제를 깨달은 표정인데.’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이한은 저런 학생을 수도 없이 봐왔었다.
저건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로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래. 너희 말이 맞겠지! 어디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된다고?”
귀찮아진 이한은 자기 할 일만 하고 가기로 했다.
황녀가 이한을 빤히 쳐다보며 눈빛으로 무언가 신호를 보내려고 했지만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미안. 네 추종자들 귀찮다.’
황녀의 추종자들은 생각보다 귀찮은 사람들이라 잘못 건드리면 이한도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마력 다 불어넣고 돌아선 이한은 옆에 지나가는 가이난도를 보며 말했다.
“가이난도. 너처럼 귀찮게 구는 추종자 없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 * *
“애들아. 태양이 원래 몇 개였지?”
“...드, 드디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 나오는구나.”
“언젠가 나올 줄 알았지.”
푸른 용의 탑 학생 한 명의 말에 친구들은 술렁거렸다.
“그게 아니라! 보라고!”
“???”
푸른 용의 탑뿐만이 아니라 다른 탑 학생들도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하늘에 떠오른 태양은 두 개였다.
“...저, 저게 뭐야?!”
“교장 선생님의 공격이다! 교장 선생님의 공격이야!”
가이난도는 자세를 낮추고 엎드렸다. 그러자 알펜 교수가 말했다.
“교장 선생님의 공격이 아닐세.”
“아. 아닙니까?”
머쓱해진 가이난도는 슬며시 일어났다.
“저건 불사조로군.”
“예?”
“불사조를 모르는 건가?”
알펜 교수는 주변에 모인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주 가끔 화염 속성의 마력이 강하게 모여들고 몇몇 특수한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응축된 마력의 덩어리 속에서 불사조가 나타나곤 했다.
“실로 신비롭고 보기 드문 일이지. 여기 모인 학생들은 모두 다 행운아라고 할 수 있겠네.”
“와...”
“저게 불사조라고?”
안 그래도 이번 주 동안 불사조를 소소하게 기념했던 학생들이었다.
저 멀리 새로 생겨난 작은 태양이 불사조라니.
그것만으로도 왠지 과제와 공부로 삭막해진 마음 한줄기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기적 같아!”
투투툭-
하늘에서 붉게 빛나는 깃털이 비처럼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깃털이 떨어진 곳마다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으아아악! 으아악! 막아!”
“미친 불사조 새끼야! 뭐하는 짓거리야!”
기적이 재해로 바뀌기까지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