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좀 위험하지 않... 나?”
이한은 상대랑 계약하기 싫어서 말끝을 흐렸다.
상대도 이한과 별로 계약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부정형의 형태로 이글거리면서 노려보는 게 아주 살벌했다.
지금은 두들겨 패서 복종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네 등을 찌르리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한도 방금까지 번개 창으로 죽일 듯 찔러댄 상대와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네?”
시아나 사제는 이한의 말에 의아해했다.
“위험하잖아. 얘가 탈주해서 숲에 일으킨 걸 보라고.”
일렌딜이 울상이 되어서 변호에 나섰다.
“성격이 나쁜 애는 아니야. 인공으로 만들어진 애라 애초에 선함이고 악함이고 없어...”
옆에서 듣고 있던 요네르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탈주했잖아요?”
“암흑 원소를 너무 많이 주입해서 폭주한 거야...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
“......”
요네르는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살짝 줄어드는 걸 느꼈다.
“그런데 워다나즈 님.”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나 사제는 여전히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원래 위험한 걸 더 좋아하시는 거 아니셨어요?”
“...아닌데!?”
이한은 깜짝 놀라서 시아나 사제를 쳐다보았다.
대체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왜 하고 있단 말인가?
혹시 흰 호랑이 탑 놈들의 음해인가?
“어... 바실리스크도 손목에 감고 다니시길래, 위험한 소환수를 더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바실리스크?”
일렌딜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바실리스크는 절대 일학년 학생이 데리고 다닐 만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만약 일학년 학생이 바실리스크를 데리고 다닌다면 그건 미쳤거나 정말로 실력이 뛰어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니, 둘 다일지도 몰랐다.
“무슨 소리야. 시아나 사제. 선배님 오해하시겠어.”
이한은 재빨리 시아나 사제의 입을 막았다.
연금술사 출신들에게 바실리스크는 매우 탐스러운 독액 생성기인 만큼 이한은 착해 보이는 선배라 하더라도 방심하지 않았다.
‘요네르.’
‘알겠어.’
요네르는 재빨리 시아나 사제의 입을 막고 속삭였다.
“바실리스크는 좀 예외적인 경우야. 이한 원래 위험한 거 안 좋아해.”
바실리스크는 이한의 소매 속에서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선배님. 선배님께서 계약하시면 어떻습니까?”
이한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며 화살을 선배에게 돌렸다.
보아하니 일렌딜은 이 암흑 정령을 매우 아끼는 게 분명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키웠으니, 애정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한과 달리) 정령과도 친했으니...
“난 무리야.”
드라이어드 혼혈 선배는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몇 번이고 시도했는데 나하고는 계약해주지 않으려고 하더라구.”
“엇.”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으음.”
이한은 선배한테 ‘한 번 창으로 찔러보실래요?’라고 말하려다가 아까 욕을 내뱉던 모습이 떠올라서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암흑 정령을 나무로 단숨에 묶던데 이한도 충분히 그렇게 묶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좋은 정령이야.”
“네...”
“암흑 정령이 정령 중에서 지극히 희귀한 거 알아?”
“예...”
“원래...”
일렌딜은 암흑 정령이 얼마나 희귀하고 유용한 정령인지, 그리고 키우면서 얼마나 기특하고 감동적인 일들이 있었는지, 이대로 내버려두면 이 정령이 자신의 원래 차원으로 돌아갈 텐데 너무 아쉽고 슬플 것 같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계약하면 되잖습니까. 지금 계약하겠습니다.”
“정말? 고마워!”
일렌딜은 크게 감동했다.
정말로 너무나도 착한 후배였다.
* * *
문양을 받아들이자 암흑 정령의 형태가 안정화됐다.
작은 바윗돌 정도 되는 크기의 구(球) 형태로.
옆에 있던 일렌딜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행복해야 해.”
“......”
이한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내가 좀 더 잘해줬으면...”
“다음에 뵙게 되면 소환해드리겠습니다.”
“정말?”
“예.”
일렌딜은 글썽거리는 눈으로 이한의 손을 꽉 잡았다.
“너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착한 사람이야.”
“그런데 선배님. 저 정령이 절 노려보고 있는 거 아닙니까?”
딱히 얼굴이 없는 구 형태였지만, 왠지 모르게 암흑 정령이 이쪽을 노려보는 느낌이 들었다.
일렌딜은 눈을 감고 암흑 정령과 대화하듯이 ‘응, 으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아닙니까?”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맙대.”
“......”
이한은 매우 의심쩍은 눈빛으로 일렌딜을 쳐다보았다.
선배만 아니었다면 ‘거짓말하지 마십쇼’가 바로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고마워하는 태도가 아닌데.’
등과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게 삼일 간식 못 먹은 가이난도마냥 압박을 주고 있었다.
“흰 호랑이 탑 애들 같은 거 아닐까?”
요네르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흰 호랑이 탑?”
“걔네들도 맞으면 고맙다고 하잖아.”
“...아, 아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이한은 요네르의 입을 급히 막았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야. 거기. 졸지 마라. 아니 이 자식이 졸지 말라니까.
-악!
-나도 널 공격하고 싶지 않거든? 졸지 말라고. 왜 아까부터 그 페이지야?
-크윽...
-지금 설마 너희 공부를 도와주는 나한테 화내는 거 아니겠지?
-아, 아니야. 고마워하는 거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처럼 암흑 정령도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도 ‘정신 차리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더더욱 찜찜하군.’
이한은 아무리 유용하고 희귀한 정령이라 하더라도 암흑 정령은 어지간해서는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툭툭-
“?”
다람쥐 정령이 이한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옆을 가리켰다.
아까 정령들이 도망친 곳에서 빛과 함께 여청(餘淸)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기운에 이한은 갑자기 불길함을 느꼈다.
“...정령과 친하신 일렌딜 선배님? 저게 지금 무슨 현상이죠?”
“정령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
일렌딜은 잔잔한 감동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정령들이 스스로 돌아가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 힘이 소모되고 나서야 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충돌도 자주 일어났다. 설득으로 해결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령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만족해서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건 마법사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마치 빗방울처럼, 정령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빛이 하늘에서 방울방울 내려왔다.
“아름다워요...”
“정말로.”
시아나 사제와 요네르는 정령들이 자아내는 찬란한 자연의 교향곡에 압도되어 눈을 깜박였다.
충돌이나 설득이 아닌, 진심으로 정령을 감동시켜야 볼 수 있는 희귀한 광경이었다.
이걸 보니 오늘 한 고생들이 갑자기 보람차게 느껴졌다.
파아아아아아앗!
마지막 정령이 감사를 표하며 다른 차원 너머로 사라져갔다.
빛의 방울들이 점멸하더니 숲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시아나 사제와 요네르, 일렌딜은 정령들이 남기고 간 빛을 깊숙이 들이쉬었다.
온몸에 정령들의 기운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털썩!
옆에서 사람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요네르는 깜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좌절한 이한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
“......”
너무나도 슬퍼보여서 요네르는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을 정도였다.
탁탁-
다람쥐 정령과 바실리스크가 자기가 있다는 듯이 이한을 위로했다.
* * *
괘씸한 제자들을 전부 붙잡은 우레걸음 교수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1학년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기겁해서 찾으러 갔을 것이다.
평소에도 이 정도로 깊숙이 숲에 들어왔으면 위험한데, 심지어 오염체까지 들끓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우레걸음 교수는 침착했다.
일행 중에 워다나즈가 있었으니까.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움직였나보군. 성질 급한 녀석 같으니.’
우레걸음 교수는 흔적을 찾아서 따라갔다.
“어이, 이 녀석들아! 왜 멋대로 먼저... 워다나즈는 왜 저러고 있는 거냐?”
“교수님. 정령들이 돌아갔어요.”
“뭐?! 그런 경사가...!”
우레걸음 교수는 깜짝 놀랐다.
정령들을 진심으로 감동시켜서 돌려보내면 언젠가 정령들의 보답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다른 차원의 괴팍한 존재들을 만족시키는 건 쉽지 않았기에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일어나다니.
“너희들은 정말 운이 좋구나!”
“그. 교수님.”
“워다나즈 님이...”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이한의 눈치를 보며 우레걸음 교수의 눈치 없는 발언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우레걸음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일이다. 어쩐지 정령의 향기가 가득하다 싶더니... 너희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결국 정령들은 은혜를 잊지 않거든.”
“교수님. 교수님.”
“??”
우레걸음 교수는 그제야 요네르가 이한을 가리키는 걸 눈치 챘다.
“왜 저러고 있는 거냐?”
“정령들이 돌아가서요.”
“그게 무슨... 아!”
드워프 교수는 그제야 이한이 오늘 이 고생을 왜 했는지 떠올렸다.
그 고생을 했는데 정작 정령들이 돌아가다니.
어찌나 뒷모습이 비통해 보이는지 우레걸음 교수는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나 싶었다.
“그... 그런데 정령들을 어떻게 감동시킨 거냐?”
“문제를 일으킨 인공 정령을 붙잡아서 복속시켰어요.”
“누가???”
요네르는 다시 이한을 가리켰다.
우레걸음 교수는 정말로 경악했다.
아까 붙잡은 제자 놈들한테 들었지만 폭주한 인공 정령은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정령 자체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렸지만, 원소 과다로 폭주한 상태 아니던가.
아무리 정령한테 인기 있고 싶어도 그렇지 그런 놈한테 목숨 걸고 달려들다니.
“그걸 잡았다고???!!”
“선배님이 도와주시긴 했는데...”
“?”
교수는 그제야 일렌딜을 알아차렸다.
총명한 제자는 옆에서 열심히 손상된 나무와 풀들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일렌딜.”
“앗. 교수님.”
그제야 우레걸음 교수의 도착을 알아차린 일렌딜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일어섰다.
“오셨어요?”
“지금 이 사태에 대해 할 말 없냐?”
“죄송합니다...”
일렌딜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던 우레걸음 교수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말했다.
“...그래. 죄송하면 됐다. 너도 잘하려고 그랬겠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
요네르는 깜짝 놀랐다.
아까 다른 선배들은 어떻게든 붙잡아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펄펄 날뛰던 분이, 왜 일렌딜 선배한테는?
“왜 그러냐?”
우레걸음 교수는 시선을 느꼈는지 요네르에게 물었다.
“어, 다른 선배님들도 용서해주신 건가요?”
“무슨 수염 떨어질 소리를? 징벌방이지.”
“그럼 일렌딜 선배님도 징벌방에 가세요?”
“아니.”
“...?”
1학년이 의문을 가지는 걸 충분히 이해한 우레걸음 교수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일렌딜은 평소 하는 일이 많아서 징벌방에 가면 안 된다.”
학교 건물보다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일렌딜은 우레걸음 교수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사람에 속했다.
이런 제자가 징벌방에 가면 숲은 누가 돌보겠는가.
“물론 내가 귀찮아져서 안 보내는 게 아니다. 평소 하는 일을 존중해서 감안해주는 거다.”
“아 네.”
요네르는 믿지 않았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혹시 이한도 이제 징벌방에 못 가나요?”
“무슨 소리를.”
우레걸음 교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못 갈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