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화
“교수님?”
이한의 부름에 벤도졸 교수는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유니콘의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다. 녀석에게 힘을 쓰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교수의 말에 따라 이한은 저항하지 않고 유니콘이 따라오라는 대로 따라갔다.
다 자란 성체 유니콘은 생각보다 온순했다. 다쳐서 그런 건지, 벤도졸 교수가 있어서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이한이 좀 무서워서 그런 건지 성질을 부리지 않고 안내했다.
“!”
유니콘이 안내한 곳은 작은 연못이었다. 산봉우리 위의 구름이 고인 연못은 특이한 색과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이건...”
“유니콘은 머무르는 곳을 자신에게 맞춰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별세계(別世界)라고 봐도 좋겠지.”
서리거인의 왕이 강림한 것만으로 주변 현실을 자신의 영역으로 침식시켰던 것처럼 유니콘도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제야 이한은 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안개를 누가 불러왔는지 깨달았다.
벤도졸 교수의 마법이 아니라 유니콘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저 연못의 물을 퍼서 유니콘을 돌봐줘라. 유니콘이 만든 연못인 만큼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유용할 거다.”
“혹시 유니콘이 계속 비통 산맥에 머무르는 것도 이 장소 때문입니까?”
“그래. 이런 별세계를 새로 만드는 건 체력 소모가 심하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데다가 새끼까지 데리고 있는 유니콘이 다른 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드는 건 위험한 일이지.”
“과연...”
“흥!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닌가보구나.”
벤도졸 교수는 피눈물을 흘리느라 터진 눈의 실핏줄을 치료했다.
부럽고 질투나는 놈이었지만 확실히 머리는 좋은 놈이었다. 괜히 번개걸음 교수가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철퍽, 철퍽-
이한은 천천히 연못의 물을 퍼서 유니콘에게 끼얹어줬다. 유니콘은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때 졸고 있던 바실리스크가 소매 속에서 깨어나더니 유니콘을 발견했다.
-......
바실리스크는 소매 속에서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지만, 불행히도 소매 속이었기에 시선은 닿지 않았다.
탁탁탁탁탁탁탁탁!
“?”
갑자기 꼬리로 미친듯이 손목을 두들기자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흥! 바실리스크의 사랑을 받으면서 유니콘의 사랑까지 받으려고 하다니. 세상이 널 용서할 것 같으냐?”
교수는 심술궂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이한을 저주했다.
제자고 뭐고 이한이 바실리스크한테 물리고 유니콘한테 차이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무시하고 새끼 바실리스크와 대화했다.
“어쩔 수 없잖아. 다친 거 보이지? 다음에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참아. 그래. 착하다. 착해. 어휴. 네가 폰리그보다 더 착하지.”
“......”
바실리스크가 만족하고 다시 눈을 감자 벤도졸 교수는 경악했다.
저...
저 놈이 감히 알량한 말장난으로 순진무구한 바실리스크를 속여!?
“바, 바실리스크를... 순진무구한 바실리스크의 마음을 농락하다니...! 네놈이...! 감히...!”
“교수님. 여기 연못 뒤쪽에 생긴 꽃밭은 약초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다! 물로 몸을 씻어줬다면 다음은 약초를 이용해서 약을 만들어줘라.”
벤도졸 교수는 화를 내다가도 이한이 묻자 대답해줬다.
중요한 건 유니콘을 돌보는 거였으니까.
“연금술은 할 줄 아나?”
“조금은 할 줄 압니다.”
“도브룩의 환혼 물약은?”
“만드는 걸 도와드린 적 있습니다.”
사실 도브룩의 환혼 물약은 절대 이한 수준에서 만들 물약이 아니었다.
에인로가드 저학년들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물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요네르의 언니인 요아넨의 일을 도우면서 환혼 물약 제조를 보조한 적이 있었다.
벤도졸 교수는 이한이 환혼 물약 제조를 도운 적 있다는 말에 제법이라는 듯 쳐다보았다.
“가문이 연금술을 다루기라도 하나보지?”
“어... 안 하진 않습니다만...”
“그걸 알면 이야기가 쉬워진다. 거의 비슷한 원리의 물약이니. 이리 와라!”
벤도졸 교수는 솥을 놓더니 손수 불을 붙이고 물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니콘이 희미한 울음소리를 냈다. 가까운 곳에 불이 있어서 덥다는 뜻이었다.
교수는 펄쩍 뛰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시끄럽고 성가신 놈들이 여럿 와서!”
“그냥 참으라고 하면 안 됩니까?”
“너... 너... 입 다물지 못하겠냐!”
벤도졸 교수는 제국에서 가장 지독한 야만인을 보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난폭하고 야만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저딴 소리를?
“불을 잘 지켜봐라. 30분 끓이고 나면 끄고 잠시 휴식해도 좋다.”
“굳이 멈출 이유가 있습니까?”
“드라필라를 손질해야 하니까.”
드라필라는 뿌리 안에 액체 성분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식물이라서 손질하고 안의 성분을 추출하는 게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억지로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가는 뿌리가 파괴되고 액체가 섞여버리는 만큼, 벤도졸 교수가 직접 해야 했다.
“저도 손질할 수 있습니다만...”
“하! 네놈이 깨끗하게 손질하면 유니콘의 이름에 맹세코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가르쳐주마!”
* * *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잠깐 기다려봐라. 안 보인다.”
네 발로 솥 앞에 엎드린 채 있던 벤도졸 교수는 낑낑대며 고개를 들었다.
“그냥 괜찮으니까 두 발로 서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야, 유니콘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가 우스워 보이냐?!”
‘그냥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걸 좋아하시는 거 아닌가?’
이한은 벤도졸 교수를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음해를 받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한 채 벤도졸 교수는 남은 과정을 지시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손질 솜씨가 뛰어나더군. 끙.”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 같은 녀석을 본 기억이 없는데... 탈 것 훈련 강의를 안 들었냐?”
“그야 저는 작년에 들어왔으니까 뵌 적이 없죠.”
“......”
벤도졸 교수는 입으로 물고 있던 커피잔을 툭 떨어뜨렸다.
“...네가 지금 2학년으로 올라간다는 거냐???”
“예. 번개걸음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잖습니까?”
분명 설명할 때 신입생들의 도움을 받아 이번 일을 해결하려고 왔다고 말해주셨는데?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녀석의 말은 원래 잘 안 들어서.”
“......”
“놀랍군. 1학년이었다니.”
“감사합니다.”
“그런 놈이 그리폰과 바실리스크의 사랑을 받다니. 제기랄. 세상은 더럽게 불공정하군...”
“......”
이한은 ‘저도 원해서 받은 거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아까 교수가 흙을 손바닥으로 퍼서 던지려던 게 기억이 난 것이다.
“좋다! 네 능력을 인정하도록 하마. 순진무구한 맹수들을 교묘한 거짓말로 농락하는 건 고쳐야하겠지만...”
“거짓말 안 했습니다.”
“...너 정도면 동물들을 돌볼 기초는 있다.”
“!”
벤도졸 교수가 갑자기 인정해주자 이한은 기쁘기보다는 떨떠름했다.
교수의 인정이란 게 생각보다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것이다.
특히 벤도졸 교수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뭔 개짓거리를 시키려고 저러시는 거지?’
“아닙니다. 저 부족합니다.”
“기초는 있다니까.”
“아니라니까요. 착각이십니다.”
“...네가 교수냐? 네가 교수냐고!”
벤도졸 교수는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폭발시켰다.
눈앞의 학생 놈은 모르겠지만 벤도졸 교수는 어지간해서는 학생들을 잘 인정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고학년 학생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동물을 돌보는 건 뛰어난 마법보다는 투철한 헌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앞에 있는 소년도 원래라면 바로 인정하는 대신, 몇 년 넘게 꾸준히 하는 일을 보고 성실하다 싶으면 그 때 가서 인정을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폰과 바실리스크의 사랑을 받고 유니콘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니 굳이 시험하거나 관찰할 필요는 없겠다고 인정해 준 거였는데...
이 건방진 놈이 아니라고 떽떽대며 부정하다니!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온갖 미친 교수를 상대해 온 이한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학교 안이고 강의 도중이면 모를까 방학 때 밖에서 만난 교수한테 겁을 먹을 만큼 이한은 만만하지 않았다.
“있다고 했잖아!”
“없습니다.”
“...그래! 없다, 없어! 네 마음대로 해라!”
벤도졸 교수는 발을 구르더니 고개를 돌렸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상태라서 별로 위협은 되지 않았다.
한참 침묵하던 벤도졸 교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니콘의 털을 빗어줘라.”
“예.”
짜증은 짜증이고, 유니콘이 저 놈을 마음에 들어한 만큼 저 놈이 돌봐줘야 유니콘이 편안해했다.
“털 빗어줄 때 조심해라!”
“예. 한 올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유니콘의 털은 매우 희귀하고 비싼 마법 시약인 만큼, 우연히 털이 빠질 경우 버리지 말고 챙겨야 했다.
이한의 대답에 벤도졸 교수는 돌아버리기 직전의 얼굴로 대답했다.
“노새보다 못한 자식아, 유니콘이 아프지 않게 빗어주라는 거잖아!!”
“아. 예. 그것도 신경 쓰겠습니다.”
유니콘은 느긋하게 이한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벤도졸 교수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한이 잘 돌봐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니콘이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툭-
유니콘은 머리를 비비더니 이한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남겼다.
아주 작은 뿔의 조각이었다.
“!!”
이한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벤도졸 교수가 놀란 것만큼 놀라진 않았다.
벤도졸 교수는 애지중지 돌봐준 유니콘이 웬 무례하고 수상한 제자한테 속아 넘어가려고 하자 간절하게 말했다.
“저 놈한테 속지 마라! 저 놈은 네 녀석을 돈으로 보고 있어!”
‘아니. 어떻게 아셨지?’
이한은 뜨끔했다.
사실 아까부터 유니콘의 털이나 뿔조각은 얼마쯤 할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르릉!
그 순간 천둥소리 비슷한 게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벤도졸 교수는 벌떡 일어나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놈이다!”
“무슨...”
“도철 놈 말이다! 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번개걸음 교수는 뭘 하러 간 거야!”
벤도졸 교수는 씩씩대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산봉우리를 감싼 안개 너머로 불길한 검은 그림자가 빙빙 도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게 도철입니까?”
“그래. 놈은 그림자로 변신해서 마법의 틈을 파고들 수 있지.”
저 산봉우리 아래에서 몬스터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몰려오는 게 보였다.
이한은 도철이 산맥의 몬스터들을 몰아서 이쪽으로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녀석들이라면 막을 수 있을 거다.’
아래쪽에서 야영지를 차린 친구들을 믿기로 마음먹고,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먼저 선공을 취하면 안 됩니까?”
“안 돼! 놈은 응보의 저주를 가죽에 두르고 있다.”
도철은 단순히 신체 능력만 뛰어난 몬스터가 아니었다.
저런 강력한 저주들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덕분에 어지간한 마법사들도 상대를 꺼리는 위협적인 몬스터였다.
응보의 저주도 그런 악명을 만드는 데에 한몫했다.
공격을 받으면 그만큼 돌려주는 강력한 저주!
“저주 말입니까?”
“그래! 놈은 우리와 맞상대하는 걸 피하고 유니콘만 죽이려고 할 거다. 빈틈을 보여줘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
이한이 굵은 벼락 줄기를 쏘아내자 벤도졸 교수는 순간 미친놈인줄 알았다.
실제로 벼락에 적중당한 검은 그림자는 교활하게 울부짖었다. 마법사에게 그대로 저주를 돌려줄 속셈이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이한에게 저주가 돌아왔다.
벤도졸 교수는 어린놈이 새까맣게 타버리지 않을까 싶어 초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