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이한의 마법이 다시 펼쳐지면서 아까보다 더 굵직한 벼락이 검은 그림자를 꿰뚫었다.
파직!
그 즉시 저주가 이한에게 돌아왔지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사라졌다.
세 번을 더 맞고 나서야 도철은 이한이 저주로 잡을 수 없는 상대란 걸 깨달았다. 가죽에 두른 응보의 저주를 걷어낸 뒤 도철은 사악한 울음을 터뜨렸다.
-■■■■■■!
“잘 했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마!”
벤도졸 교수는 도철이 태세를 바꾸는 사이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 절벽 밖으로 몸을 던지더니 거대한 화이트 와이엄으로 변해 도철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드래곤의 피가 섞여 있는 아룡종들 중에서도 난폭하고 사납기로는 손꼽히는 와이엄은 살벌한 공격력을 자랑하며 도철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
-뒤져라, 이 돌놈아!
도철은 고통 섞인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흔들었다. 검은 그림자가 형태를 변화하며 화이트 와이엄을 요격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벤도졸 교수는 도철이 자신을 찢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놈을 물고 뜯었다.
화이트 와이엄의 이빨에 깃든 흰 서리독이 돌기 시작하자 도철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걸 보자 이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건 마법사보다는 광전사에 가까운 전투방식이었다.
‘앞으로 교수님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말아야겠군...’
도철도 비슷하게 느낀 모양이었다. 미친 마법사와 서로 드잡이질을 벌여봤자 자기만 손해라고 느꼈는지 전략을 바꿨다.
-막아라! 놈이 침입한다!
“!”
이한은 산봉우리를 감싼 안개 사이로 불길한 그림자가 파고드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
“아니, 빈틈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하셔놓고 교수님께서 밖에 나가시면 어떡합니까!”
자기 입으로 ‘도철 놈은 교활해서 유니콘만 노릴 수 있으니 빈틈 보여주면 안 된다’라고 해놓고 정작 자기는 달려 나가서 싸우다니!
-놈을 죽일 수 있으니까 그랬지! 어떻게든 막아라!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저걸 말이라고...’
순간 다친 유니콘이 비틀거리면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새끼를 번갈아보면서 던지는 그 눈빛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걱정 마라! 어떻게든 막아줄 테니까!”
이한은 정 안 될 경우 비장의 수단들까지 동원할 각오를 하며 마법을 외웠다.
“박무여, 퍼져라!”
방어 주문이 끝나는 즉시 안개 사이로 파고든 도철이 형태를 갖췄다.
밖에 있는 거대한 형체와 달리, 고작해야 들개 정도의 크기였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흉흉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한은 <배그렉의 일순 예지>를 믿고 선공을 시작했다.
쉭!
섬뢰창으로 변한 지팡이와 망토에 부여된 번개가 주변에 벼락을 토해냈다.
도철은 아가리를 벌리더니 끈적끈적한 암흑을 쏘아냈다. 번개와 부딪친 암흑이 스멀스멀 지팡이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명체라면 누구든 갖고 있는 활기 자체에 타격을 주는 암흑 원소.
이런 암흑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도철은 정말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문제는 도철의 상대도 정말 까다로운 마법사란 점이었다.
이한은 스멀스멀 타고 올라온 끈적한 암흑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낸 뒤 주문을 외웠다.
“암흑이여, 여기에 모여라.”
강대한 마력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도철이 뿜어낸 암흑의 통제권이 이한한테 옮겨갔다.
원소 마법에서 원소에 대한 통제권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옮겨갈 수 있다지만, 상대가 통제하고 있는 원소를 이렇게 쉽게 뺏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도철도 어이가 없었는지 사악한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이한을 노려보았다.
물론 이한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암흑이여, 휩쓸어라!”
도철은 이를 갈며 몸을 다시 그림자로 바꾸더니 공격을 피했다.
‘...만만치 않다.’
이한은 도철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마 도철도 이한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적의 움직임은 변화가 자유롭고 속도가 빨라서 이한이 맞히기 힘들었다.
동시에 도철이 가진 특별한 능력들은 이한에게 통하지 않았다. 저주나 암흑 원소처럼 그 안의 원리가 단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은 거대한 마력의 벽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드득!
저 멀리서 도철의 등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화이트 와이엄으로 변한 벤도졸 교수가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살벌하게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라! 이 놈을 찢어죽인 다음에 도우러 갈 테니까!
“교수님 목숨부터 챙기십시오!”
-네놈한테 한 말이 아니라 유니콘한테 한 말이야!
“......”
이한은 괜히 걱정해줬다고 후회하며 다시 움직였다.
“주인의 명령에 맞춰서 얼어붙어라!”
박무 속에서 이한의 얼음 분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도철은 본능적으로 얼음 분신에게 덤벼들어서 급소를 노렸다.
“바람처럼 민첩해져라.”
고나달테스의 민첩 마법이 이한에게 깃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한은 <제한된 시간 가속> 마법까지 사용했다.
‘확실하게 데미지를 준다!’
팍!
각종 강화 마법과 마력을 총동원한 신체 능력. 거기에 시간 가속까지 동원되자 이한의 돌진은 제국의 소드마스터들이 보여주는 돌진과 흡사한 빠르기에 도달했다.
뒤늦게 분신이란 걸 깨닫고 몸을 빼려고 했지만 도철의 반응은 한 박자 늦었다. 새벽별이 몸을 깊숙하게 베고 지나가자 도철은 깨갱하며 비명을 질렀다.
-■■!
마력으로 만든 분신체에게 새벽별처럼 마력을 흡수하는 흑자석 검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분신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도철은 눈빛에 악독한 살기를 흘리며 몸을 나누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벌떼들이 내는 소리와 함께 검은 벌레들이 허공을 비산하며 뒤에 있는 유니콘의 새끼를 노렸다. 유니콘의 새끼는 겁에 질려 피하지도 못했다.
“!”
이한은 새삼 악 성향 몬스터들이 얼마만큼 독한 놈들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혀를 내둘렀다.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이나 악마들은 미친 사람처럼 보여도 비교적 질서를 중요시하고 순응하는 이들.
그에 비해 야생의 몬스터들 중 사악한 심성을 가진 놈들은 팔다리가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남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몸으로 막는다!’
이한은 마력을 믿고 움직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만큼 몸으로 막아내는 게 가장 안전했다.
파파파파파파팍!
검은 벌레 무리로 변한 도철이 이한과 사납게 충돌하며 안에 파고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흉흉한 기세와 소리가 민망해질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물어뜯기고 있던 도철의 본체는 원통함과 어이없음을 담아 이한을 노려보았다.
뭐 저런 새끼가 있단 말인가??
-뒤져라!
마지막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벤도졸 교수는 도철의 숨통을 기어코 끊어버렸다.
변신을 풀고 착지한 교수는 피칠갑이 된 채 외쳤다.
“유니콘은 무사하냐!?”
“예. 괜찮습니다.”
이한은 유니콘의 새끼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한이 벌레 무리를 전부 막아낸 만큼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
“교수님은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조금 긁힌 거지!”
벤도졸 교수의 발밑에는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이한은 못 본 척 했다.
“잘 막았다. 잘 막았어! 도철 놈의 공격이 막기 쉽지 않을 텐데, 아주 쥐 잡듯 잡더군! 목자(牧者)의 재능이 있...”
벤도졸 교수는 이한이 몸으로 공격을 막은 게 꽤나 기특했는지 평소 심술궂은 태도를 버리고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걸어오자 유니콘의 새끼가 겁에 질린 울음소리를 냈다.
현재 교수의 겉모습이 지나치게 흉악했던 것이다.
“아, 아이고. 겁을 줬군! 미안하다, 미안해!”
벤도졸 교수는 피가 줄줄 흐르는 이마를 막고 허겁지겁 유니콘 새끼를 달랬다. 두려움을 없애는 데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상처부터 치료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가 몰라서 안 하냐!? 놈의 저주와 암흑 원소로 만든 상처는 쉽게 안 낫는다. 시간이 필요해.”
“그렇습니까?”
이한은 저주나 암흑 원소로 당한 상처가 없었기에 그렇구나 싶어서 대답했다.
벤도졸 교수는 욱해서 욕하려다가 참았다. 방금 앞의 놈이 세운 공도 있었지만, 유니콘의 새끼한테 겁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유니콘의 새끼는 슬슬 이한의 뒤에 숨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벤도졸 교수는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영리한 움직임을 봐라. 참 귀엽지 않느냐?”
“알겠으니까 교수님은 빨리 치료에 전념하십시오.”
“더 돌봐주라고!”
교수의 고함에 유니콘의 새끼는 놀라서 움츠러들었다. 벤도졸 교수는 자신의 입을 주먹으로 때렸다.
“요 입, 요 쓸데없는 입 같으니!”
“...교수님. 그냥 좀 저리 가십시오.”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온 이한은 벤도졸 교수를 몰아냈다.
지식 때문에 교수를 옆에 두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었는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그냥 밀어낸 다음 자기가 유니콘과 직접 소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한!”
마침 아래에서 친구들이 올라왔다.
야영지에서 벌인 싸움이 상당히 격전이었는지 다들 먼지투성이에 피곤한 얼굴이었다.
“몬스터들이 아래로 몰려왔었어!”
“알아. 여기도 도철이 습격했었거든.”
가이난도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번개걸음 교수님은 뭐하시는 거야!”
“내 말이 그 말이다!”
“으악! 말하는 시체다!”
“......”
벤도졸 교수는 가이난도한테 고함을 치려다가 참고서 붕대를 감았다.
슥-
성체 유니콘은 학생들이 올라온 걸 둘러보더니 닐리아에게 다가왔다.
아까 거절했던 유니콘이 다시 다가오자 닐리아는 의아해했다.
“왜... 어, 어어. 뭐야?! 왜?!”
유니콘이 소매를 잡아끌자 닐리아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걸 지켜보던 벤도졸 교수는 무릎을 쳤다.
“알았다!”
“뭘 말입니까?”
“유니콘이 다른 정령들을 질투해서 쫓아낸 게 아니었어! 유니콘은 정령까지 질투할 만큼 마음이 좁지 않거든! 위험한 상황이라 지켜줄 만한 사람을 옆에 둔 거군!”
아까는 위험한 상황이라 믿음직해보이는 이한을 옆에 둔 거고, 지금은 도철을 쓰러뜨려서 안전해졌으니 닐리아를 옆에 데리고 온 것이다.
벤도졸 교수는 통쾌하다는 듯이 이한을 비웃었다.
“널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널 그냥 이용한 거야!”
“어, 그럼 교수님 계신데 이한을 데리고 온 거 자체가 문제 아니에요? 유니콘이 교수님을 못 미더워했다는 게 되는데...”
“커헉.”
벤도졸 교수는 당황해서 입 안에 고인 피를 토해냈다.
“한,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으니까 부른 걸 거다.”
그러는 사이 유니콘 새끼는 앉은 이한의 무릎 위에 누워서 새근새근 졸고 있었다.
학생들은 저길 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벤도졸 교수가 한 번 더 피를 토하면 정말 쓰러질지도 몰랐던 것이다.
* * *
번개걸음 교수와 사냥꾼들이 귀환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어딜 돌다 이렇게 늦게 온 거요!”
“...도철의 습격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역시 그랬나.”
번개걸음 교수는 사정을 듣고 한숨을 팍 쉬었다.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으면 빨리 뛰어와야지! 유니콘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책임졌을 거야!”
“벤도졸 교수. 지금 다친 상태 같은데...”
“다쳤어도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친 상태 같은데, 그 상태로 나한테 두들겨 맞고 싶냐는 뜻이었지.”
“......”
벤도졸 교수의 분노가 한층 꺾였다. 번개걸음 교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도 도철을 하나 죽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더 있더군요.”
“!”
벤도졸 교수는 경악했다.
안 그래도 성가신 놈들이 이렇게 여럿 있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도철이 원래 무리를 지어서 사는 놈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사람들을 밖으로 보내고 우리끼리 사냥합시다. 여러 마리 있으면 학생들은 좀 위험할 수 있으니.”
“안 돼.”
“?”
벤도졸 교수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번개걸음 교수는 의아해했다.
“지금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철이 여러 마리 있다면 유니콘부터 옮겨야 해. 남은 사람들은 시간을 끌고. 이동 도중에 습격을 받으면 새끼가 너무 위험하다.”
번개걸음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야. 지금 도철 중에 두 마리가 뒤졌다. 얼마나 열이 받았을지 짐작이 안 가나? 같이 데리고 가지. 그걸로 만족해.”
“안 돼! 무조건 유니콘부터 옮겨야 한다.”
“진짜 아무래도 뒤질 때까지 맞고 싶은 모양이군...”
번개걸음 교수도 도철 한 마리 잡고 오느라 피곤했는지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벤도졸 교수도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니었다.
두 교수가 진심으로 맞붙는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나마 제정신인 요네르가 이한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말려야 하지 않아?”
“응. 그래서 불렀어.”
“...누구를?”
“교장 선생님을.”
이한은 구리 반지를 흔들었다.
해골 교장을 소환할 수 있는 구조용 신호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