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첫 트롤 놈들 이후로 몬스터 파티가 열렸다.
몬스터와 조우하고, 싸우고, 나아가고, 다시 조우하고, 싸우고, 나아가고…….
나오는 몬스터 놈들도 다양하다.
그린 스킨 놈들과 더불어 짐승의 변종, 돌연변이보다 키메라라고 부르는 게 맞을 만큼 기괴하게 생긴 놈들도 보았다.
당연히 몬스터 종류에 따라 대처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사실 몬스터가 쏟아지는 건 문제가 아니다.
정말 문제는 내가 싸우지 못하고 병풍처럼 구경만 해야 한다는 점이지.
전투의 양상은 전체적으로 치열했는데 그걸 보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려 죽을 것 같다.
참기로 했다.
막 기사들에게 의심이 피어난 시점이니 사리는 게 맞다.
그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몬스터 놈들을 죽이다 보니 금방 하늘이 어둑해졌다.
우리는 해가 저물기도 전에 야영을 준비했는데, 이런 야산의 경우 머물 만한 베이스캠프를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적당한 공터를 찾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셀은 숲에서 마른 가지를 모아 오더니 금방 모닥불을 지폈다.
기사란 놈이 야영 준비가 왜 이리 능숙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둘째 치고…….
오셀의 행동이 내가 아는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라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기가 날 텐데 괜찮은 건가?”
“기본적으로 산맥 초입부의 몬스터는 대부분 주행성이라서 괜찮습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단 거군.”
“보석 산맥에서 백 퍼센트를 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요.”
오셀이 말을 이었다.
“야행성인 몬스터도 물론 있습니다만, 그놈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조우하는 순간 어차피 죽을 테니까요.”
“…….”
이건 겁주기인가?
잘 모르겠다.
“불침번은 저희끼리 수행할 테니 도련님께선 염려 말고 푹 주무십시오.”
“그래야지. 난 자다 깨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거든.”
나는 그리 말한 다음 일부러 훈계라도 하듯 말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확실히 불침번 서란 말이야. 알겠어?”
“…주의하지요.”
오셀이 미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쩐지 할 말을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무시하고 침낭을 꺼냈다.
창고에서 챙긴 다른 마도구와 달리 침낭은 그냥 평범한 침낭이다.
그래도 질이 좋은 편이라 금방 몸이 따뜻해졌다.
오늘 고생한 것도 있어서 금방 졸음이 몰려왔지만… 이대로 한가하게 눈 붙일 생각은 없다.
나는 코 고는 척이라도 할까 싶다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얌전히 있었다.
할 것도 없으니 운공이라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님도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아르잔이 있었다.
이 녀석도 일단 침낭을 펴놓긴 했는데, 금방 눈을 붙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잠이 없는 건지, 나처럼 이놈들을 의심하고 있는 건지.
“본가에서 근무하셨다고요? 집사님 같은 분을 뵌 적이 없다니… 아쉽군요.”
“그렇습니까.”
집적대는 기사 놈은 아마 빅터라는 이름이었을 거다.
생긴 것도 껄렁해서 기사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사실 이건 오셀을 비롯한 다른 기사 놈들을 보면서도 느낀 점인데…….
설상가상으로 이놈들은 산행에 대비해 옷차림까지 가벼운 경장으로 바꾼 상태라 더욱 그랬다.
“본가로 복귀하면 같이 식사 한 끼 어떻습니까? 근처 도시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을 알고 있는데…….”
“제안엔 감사드립니다만, 이후엔 바로 일터로 복귀할 예정이라.”
“아.”
대응하는 게 귀찮을 만도 한데 아르잔은 성실하게 대꾸했다.
비록 무표정한 얼굴로 철벽을 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로선 좀 더 영양가 있는 얘기를 나눠 줬으면 했는데, 졸음이 두 배로 체감될 만큼 따분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도 버틴다.
버티다 보면 저놈들이 어떤 허점을 내보일까 싶어서다.
이러한 생각이 바뀐 건 약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냥 자야겠다.’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내린 판단은 아니었다.
두 가지 근거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기사들이 며칠간은 나를 노릴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의심하고 있는 건 나만이 아니다.
기사 중에서 최소 두 명이 나를 경계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한 시간 동안 곯아떨어진 연기를 하고 있는데, 최소 두 놈이 나를 끈덕지게 관찰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시선만 깨달은 단계라 정확히 누군지 특정할 수는 없었으나… 일단 한쪽은 오셀일 확률이 높다.
신중한 놈들인 건 분명하니 하루 이틀 내로 움직일 것 같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 다른 근거는 아르잔의 존재다.
저 녀석은 정말로 잘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을 의심하는 것 같다.
실은 같은 패거리고, 나를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글쎄.
별로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
아르잔이 어떤 인간인지는 전생에서 지독하게 겪었다.
협박과 회유가 불가능한 인간.
켕기는 짓을 할 바에 혀를 깨물고 죽을 만큼 올곧은 녀석이 아르잔이다.
결정적으로 기사들은 애초부터 아르잔의 동행을 반기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살며시 육체의 긴장을 풀었고…….
산맥에서의 첫날은 흐물흐물해진 긴장감 속에서 지나갔다.
* * *
이튿날, 나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
몸이 속박당해 있다거나, 어딘가 다쳐 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여전히 자는 척하며 주변을 확인해 보니, 불침번을 선 기사 한 놈이 꺼져 가는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아르잔은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는데, 한숨도 자지 않은 것치고는 안색이 괜찮아 보였다.
‘밤을 새우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데.’
아마도 며칠 정도는 한숨도 안 자도 그럭저럭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듯하다.
나를 두들겨 팰 때부터 낌새는 느꼈지만, 아르잔도 평범한 집사는 아니었다.
뭔가 상황이 재밌으면서도 귀찮다.
기사 놈들도 기사 놈들이지만 아르잔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가주가 나를 부른 이유는 또 뭐고.
어쩐지 너무 생각 없이 저택을 나선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가주의 명을 불복하고 도망치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후로 이틀, 사흘이 지날 때까지.
기사들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가 전열을 돌파하는 일도 없었고, 묘하게 감시하는 듯한 시선도 사라졌다.
마치 첫날의 그 일은 해프닝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상황.
그렇다면 첫날에 내가 느꼈던 건 위화감들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괜한 의심병이 도져서 홀로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마도 내가 조금만 덜 삐뚤어진 놈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즉 나는 아직도 이놈들을 의심하고 있다.
어쩐지 내가 위화감을 느꼈단 걸 눈치채고, 사리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고.
이러한 심리전은 결국 끈기 싸움으로 이어지는 법이고, 마음에 한 톨이라도 더 여유를 가진 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저놈들이 나만큼 확신을 품고 있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막 몬스터를 썰어 버린 오셀이 다가왔다.
“나는 멀쩡하지. 그런데 오셀 경, 단원들 말인데.”
“예.”
이쯤에서 한번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는 심정으로 말했다.
“조금만 더 품위 있게 싸울 수는 없나?”
“…….”
오셀이 멍청하게 두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말했다.
“무슨…….”
“전투가 끝날 때마다 악취 때문에 코가 아플 지경이야. 경의 기사들이 몬스터와 싸울 때마다 살점이고, 핏물이고 뒤집어써서.”
“…….”
“실은 송곳니기사단에게 환상을 갖고 있었어. 배드니커가 자랑하는 양 날개 중 하나이고, 그 명성은 제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싸우는 모습을 보니, 뭐랄까… 천박하기 이를 데 없군.”
오셀이 뒤늦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나는 어쩐지 그게 굳은 미소처럼 느껴졌다.
평소라면 무슨 말이라도 했을 녀석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나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어려운 문제인가……. 사실 품위란 타고난 성품으로부터 배어나는 거니. 그래도 배드니커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와.
이 말은 나 스스로 생각해도 얄미웠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파괴력이 달라진다.
루안 배드니커.
가문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당하는 망나니 도련님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후로도 나는 오셀과 기사들의 속을 빈번히 긁어 놨다.
“전열을 좀 다듬어야 할 것 같은데? 효율적이지 못해.”
“아. 좀만 쉬고 가자. 다리 아파.”
“이 스튜는 뭐야? 돼지죽인가? 아니, 이건 돼지도 안 먹겠다. 시발 나무껍질을 끓여도 이것보단 맛있겠어.”
참고로 마지막은 진심이라 말이 좀 길어졌다.
내가 오직 말로만 이것들을 갈구며 떠올린 건 다시금 넷째 사형이었다.
넷째 사형은 말했다.
사람의 역린이란 찾는 게 어렵지, 파고드는 건 간단하다고.
처음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오셀이었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그러지 못했다.
반응에 점점 성의가 없어지더니 나중엔 아예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효과가 있었던 공격은 따로 있었다.
“수준 낮아서 못 보겠군.”
낮게 읊조린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모두 바뀌었다.
‘슬슬 감이 좀 오는데.’
사람의 빈틈.
일류 기사단의 단원이라면 잘나가는 집안의 자식이 대부분이지만, 꼭 다 그렇지는 않다.
경우에 따라선 평민이 입단하게 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이놈들이 평민은 아닐 것이다.
평민이라면 천박하다는 말에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터. 기사란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런 비난은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
‘서자 출신들인가?’
꼭 그렇지 않더라도 가문에서 대우받지 못한 반쪽짜리들이다.
반쯤 배우다 만 듯한 예법, 귀족이라는 단어에 가진 애증.
그러니 천박하다는 말은 이들에게 있어 일종의 역린이다.
어쩐지 도발이 너무 잘 먹히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들에게 있어 가장 꼴 보기 싫은 인종이 바로 나 같은 놈이 아닐까?
명문가에서 태어난 주제에 사고만 치고 다니는 머저리 말이다.
물론 풀리지 않은 의문도 있다.
서자 출신이라고 해도 번듯한 기사단의 단원인 놈들이 왜 나를 적대하는 것일까.
나는 기사들의 표정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는데,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아르잔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녀석의 안색이 다른 의미로 볼만했다.
충혈된 눈동자와 눈 밑의 기미.
사실 웬만큼 안목이 좋지 않다면 깨닫지 못할 변화였지만… 글쎄.
그때 아르잔이 내 시선을 깨달았는지 나를 보았다.
“괜찮아?”
“…예.”
목소리도 잠겨 있다.
컨디션이 무너진 모습, 혹시 기사들도 깨달았을까?
나는 지금 상황과 아르잔의 상태, 기사들이 마지막에 보였던 살벌한 표정을 조합하니 금방 결론이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쉬겠습니다.”
전방에 있던 오셀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슬슬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밤, 늦어도 내일은 일이 터진다.
* * *
머리가 무겁고 눈꺼풀은 더 무겁다.
따뜻한 모닥불이 눈을 포근히 감겨 주려는 듯한 기분.
아르잔은 눈가에 억지로 힘을 주며 불길을 노려봤다.
그러면서 자문했다.
오늘로 산맥에 들어온 지 며칠째더라?
‘나흘.’
금방 답을 내놓았으나, 잠시나마 떠올리지 못했단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아르잔은 어떤 때라도 상황 파악만큼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때 말하는 상황이란 세 가지 요소를 의미하는데, 시간과 장소, 마지막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다.
그리고 아르잔은 이 셋 중 확실히 파악한 게 단 한 가지도 없단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무뎌진 건가?’
아르잔은 멍한 얼굴로 모닥불 너머를 보았다.
다섯 중 넷은 잠들었고, 나머지 한 명이 불침번을 서고 있다.
아르잔은 현재 담요만 두른 채 나무에 기대고 있었는데, 반쯤 눈을 감은 상태라 언뜻 보면 영락없이 잠든 걸로 여길 거다.
즉 아르잔은 저들 앞에서 나흘 동안 자는 척 연기한 것이다.
누군가 왜 굳이 사서 고생하느냐고 묻는다면… 스스로도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겠다.
때때로 논리적인 근거보다 감을 더 우선시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번이 그렇다.
무시해선 안 될 신호.
이러한 감 덕분에 몇 번 정도 목숨을 건진 경험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사흘 동안 한숨도 안 잔 건 좀 그런가.’
이럴 때마다 요령 없는 자신에게 질려 버린다. 괜한 헛수고를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의심이 과했던 걸까?
애초에 철혈공의 서신을 들고 온 자들이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철혈공의 이름을 사칭하지 않는다.
겁이 없다거나, 용감하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끝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음.’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이 이상은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쪽잠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다만 아르잔은 완전히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
담요를 살짝 몸에 두른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만 살짝 숙인다.
잠든 건지, 모닥불을 보고 있는지 긴가민가한 자세.
거기에 지난 나흘 동안 빅터란 이름의 기사 빼고는 딱히 가까이 오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 빅터의 불침번은 제일 처음 순서였고, 지금은 잠들었으니 위험 요소도 없다는 뜻.
이런 여러 정황으로 아르잔의 경계는 서서히 그 단계를 낮춰 갔고, 몸에 쌓인 피로는 서서히 수마로 그 형태를 바꿔 나갔다.
…….
…….
…….
밤이 깊어 가며 숲은 점점 고요함에 휩싸였다.
벌레 소리조차 울리지 않는 공터엔 모닥불 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퍼졌다.
화르륵…….
바람 한 점 불지 않음에도 불길의 기세가 차츰 약해지기 시작한다.
태울 것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서상 현재 불침번인 오셀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휘청이던 불길이 곧 사그라들 것이 자명하고, 손 닿을 곳에 장작이 있다.
하지만 오셀은 땔감을 던져 넣는 대신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끈질겼군.”
이 목소리가 신호였다.
침낭 속에 있던 기사들이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그렇군요.”
“평범한 집사는 아닌 듯합니다.”
“상관없다.”
오셀은 여전히 불길을 응시하며 말했다.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