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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3화 (13/172)

13화

“집사 쪽도 말입니까?”

“그래.”

그러자 기사 중 한 명이 염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본가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복장도 그렇고, 혹 징수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과거 경력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현재지. 어찌 됐든 지금은 애송이 도련님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지 않나.”

“…….”

“배드니커의 울타리는 필요한 부품만을 지킨다. 본가에서 쫓겨났다는 건 그 범위를 벗어났다는 뜻. 처리해라. 책임은 내가 지겠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인 뒤, 한창 잠에 빠진 루안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누가 뭐래도 루안 배드니커다.

아르잔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걸 깨달은 지금도 그 우선순위엔 변동이 없다.

기척도, 소리도 없이 소매에서 비수가 드러났다.

쐐액, 날이 선 비수가 루안의 목덜미를 향했다.

채챙!

“……!”

직후 기사들은 급히 비수를 휘두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그들의 급소를 노리고 투사체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물러서십시오.”

뒤이어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희미해지는 모닥불 너머로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보였다.

잠에 빠졌다고 여긴 아르잔이 비수를 꺼낸 채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셀이 말했다.

“집사, 잠든 척 연기를 한 거였나?”

“…….”

“경계심이 지나치군. 아니면 우리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위화감이라면 쭉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반신반의였을 텐데.”

“예.”

아르잔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가장 안심한 순간, 한 번 더 의심했습니다.”

“…….”

그 말에 오셀의 눈동자에서 약간의 이채가 일었다.

짐승의 번뜩거림 같은 종류였다.

“그런가.”

오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 꺼져 가는 모닥불을 발로 짓밟았다.

훅-. 사방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고.

한밤중의 전투가 시작됐다.

* * *

아르잔은 주변이 삽시간에 암흑에 휩싸였으나 당황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적은 총 다섯이고.

지휘는 오셀이 했으니 그자가 머리일 확률이 높으며.

현재 상황- 즉 모닥불이 꺼져 주변이 캄캄한 이 상황은…….

‘나에게 유리하다.’

일 대 다수의 전투에서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건 말할 것도 없이 다수다.

협공이란 무엇보다 서로 간의 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손발이 맞지 않는 협력자란 어떤 의미에서 적보다 까다롭다.

어둠은 그들의 협공 난이도를 최소 두 배는 높여 주겠지.

물론 이들은 기사다.

그 정체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일단은 기사.

협공에 대한 훈련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받았을-.

‘…….’

아니, 아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할 뻔했다.

모닥불의 잔불을 꺼트린 건 아르잔이 아니라 오셀이다.

이 상황을 의도한 건 상대라는 뜻인데.

무려 사흘 동안이나 본색을 감출 만큼 음험한 놈들이, 다수가 가지는 불리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까?

‘틀려. 이자들은 전문가다.’

또 하나의 간과.

일 대 다라고? 틀렸다.

아르잔은 혼자가 아니었다.

카앙!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비수를 쳐냈다.

아르잔을 노린 게 아니다.

이자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루안 배드니커였다.

모닥불을 꺼트린 것도 그 이유다.

적의 목적이 전투가 아닌 암살이라면, 어둠은 아르잔이 아닌 이들의 편이 맞다.

아르잔의 표정이 굳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도련님과 떨어지면 안 되겠고.’

칠흑 속에서 행동반경에 제한이 생기는 건 치명적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아르잔은 눈을 감았다.

후우,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내리깔렸고, 찰나보다 짧은 시간이 흐른 직후 두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거렸다.

팍!

그리고 아르잔은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이 돌발적인 행동에 암중에 있던 두 기사가 굳었다.

‘루안이 있는데도 이런 무모한 돌진을 한다고?’

‘망나니 도련님의 목숨 따위는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거냐?’

물론 그렇지는 않다.

도련님을 지켜야 하니까 지금 움직인 거다.

아직 상대의 위치 정보가 뇌 내에 남아 있는 지금.

“모습을 숨겨라!”

뒤늦게 아르잔의 의중을 파악한 오셀이 외쳤으나, 아르잔이 두 명의 기사 코앞까지 당도한 후였다.

루안은 말했다.

아르잔의 경험은 대인전에 치중되어 있다고.

정확한 말이다.

스걱.

마물에 비하면 인간의 신체란 얼마나 연약하고, 또 급소투성이인가.

단련한 기사라고 해도 그 사실에 변함은 없다.

아르잔의 비수가 번뜩인 순간 기사 두 명은 핏물을 뿜으며 쓰러졌다.

산맥에서만 수십 마리의 마물을 도륙한 자들의 최후치고는 허무하다.

두 명의 목숨을 빠르고 확실하게 앗아간 아르잔은 달려들었을 때보다 더 신속한 동작으로 원위치로 복귀했다.

여기까지 소모된 시간은 3초 이하.

‘남은 건 셋.’

순식간에 상대의 전력을 절반 정도 줄인 셈이었으나, 전투는 이제부터일 것이다.

“…….”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동료 둘이 죽었는데도 상대가 전혀 동요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아르잔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 집중했지만.

그러한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침묵이 오래 지속될수록 잊었던 피로나 노곤함이 다시금 덮쳐왔다.

‘빌어먹을…….’

몸이 너무 무겁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중간 쪽잠이라도 자둘걸.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적은 여전히 섣불리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하다.

아마 아르잔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시간이 끌수록 이쪽이 더 불리해질 텐데, 그렇다고 먼저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아르잔으로선 일분일초가 피 말리는 대치 상황,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체감으로 1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상대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떠났나?

쉬익!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번뜩거렸다.

아르잔은 고개를 비틀어 간신히 피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직후 전방에서 오셀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뜩이는 칼날이 보인 순간 아르잔도 반사적으로 비수를 휘둘렀다.

까앙!

칼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아르잔은 순간적으로 비수를 놓칠 뻔했다.

오셀의 완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해서다.

힘을 아낄 여유는 없다. 까득 이를 간 아르잔이 허벅지에 힘을 주며 소리를 내질렀다.

꽈앙! 오셀은 용수철처럼 폭발하는 힘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음…….”

그리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침음을 흘린다.

오셀은 조금 당황한 눈으로 아르잔을 보았다.

“신기하군. 이 정도의 실력자인데도 내가 들은 바가 없다니.”

“…….”

“점점 그 정체에 흥미가 생기지만… 일단은 무기부터 버리도록.”

“헛소리를.”

“헛소리? 벌써 잊었나.”

오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 동료는 아직 두 명 더 있다.”

아르잔이 뒤를 돌아보니, 루안의 침낭 주변에 서 있는 기사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검도 침낭을 겨누고 있는 것도.

루안은 아직 퍼질러 자는 걸까.

어쨌든 조금만 움직여도 침낭 안의 철부지 도련님은 핏덩이가 될 거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뻔한 전법이었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숫자가 가지는 이점이었다.

그럼 어떻게 판단해야 했을까?

처음에 무리해서라도 더 죽였어야 했나.

아니면 루안을 둘러멘 채 바로 도망쳤어야 했나.

모르겠다.

아르잔은 누군가를 지키며 싸웠던 적이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무기를 버려.”

“…….”

“아니면 얼간이 도련님 따위 죽게 내버려 둬도 상관은 없나.”

이들의 지시에 따르면 안 된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죽게 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저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들은 곧장 루안을 죽일 거다.

살인에 거부감이 없는 자들이라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편이 차라리 낫지 않나?’

결과적으로 루안은 죽겠지만, 아르잔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둘 다 죽는 것보단 하나라도 사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찰나 아르잔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쳤고.

마지막에 떠오른 건 루시아 배드니커의 얼굴이었다.

툭.

그 얼굴이 뇌리에 스친 순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르잔은 비수를 버렸다.

오셀은 내던져진 비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것 말고도 있을 텐데.”

아르잔은 안주머니와 등, 소매, 발목, 허벅지 숨겨 뒀던 비수를 하나씩 내려놨다.

“…….”

오셀은 십수 자루나 되는 비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짧게 겨루며 경험한 전투 방식이나 무기의 보관법이 어쩐지 눈에 익다.

게다가 아르잔은 이렇게 몰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저것은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단 감정을 절제하는 어떤 훈련을 받은 걸로 보였다.

결정적인 건 아까 꺼낸 발언.

‘가장 안심했을 때 한 번 더 의심하라.’

오셀은 그 가르침을 알고 있다.

어디 알기만 할까.

“집사 아르잔, 왜 한 번도 본가에서 보지 못했는지 알 것 같군. 내 예상대로라면 배드니커에서도 네 존재를 아는 건 극히 소수일 터. 정체까지 꿰고 있는 자는 한 줌도 되지 않을 테지.”

“…….”

“어느 정도 짚이는 바는 있지만, 가급적이면 직접 듣고 싶은데. 이제라도 말할 생각이 있나.”

오셀의 목소리엔 옅은 열기가 묻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 배드니커의 결정적인 치부를 목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대답하기 싫다면 그것도 좋겠지. 시간은 넘치니까. 그럼 다른 걸 묻겠다.”

“…….”

“너와 루안 배드니커. 누구의 사지부터 잘리고 싶나?”

그 순간 아르잔은 오셀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거부감이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았다.

애초부터 이 남자는 계속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드러난 이 비열한 낯짝이야말로 이 남자의 진면목일 것이다.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는 와중에도 아르잔은 패닉에 빠지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마지막으로 남은 전력이나 수단을 확인했고… 그 어떤 방안도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단 사실에 조용히 체념했다.

아둔했다.

처음부터 좀 더 확실히 경계했어야 했는데.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철혈공의 이름을 사칭할 리 없으니까.

결국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그릇된 판단을 하고 말았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제 팔부터 자르십시오.”

“흐음.”

거리낌 없는 대꾸에 오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저기 있는 건 루안 배드니커다. 혈통주의자인 철혈공마저 버린 쓰레기. 본가에서 갑자기 호출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필시 좋은 일은 아닐 테지.”

“…….”

“이 자리에서 죽어도 철혈공은 나서지 않을 텐데, 너는 왜 저 쓰레기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지?”

“도련님은 쓰레기가 아닙니다. 당신 따위가 모욕할 존재는 더욱 아니고.”

“재미없는 대답이군.”

오셀은 흥미가 식은 얼굴로 검을 꺼냈다.

사지를 하나만 자른다고 했지만, 고작 그걸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르잔은 죽음을 직감했다.

달빛이 스며든 칼날은 움직임에 따라 여러 빛으로 번뜩이며 지난 삶을 비췄다.

최초의 기억은 고통.

이후로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실험.

죽음은 사방에 펼쳐져 있었고, 살기 위해선 감정을 거세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목숨을 건진 건 딱히 아르잔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무의미한 인생이었으나, 그러한 삶에도 볕은 있었다.

‘네가 내 아들의 선생이 되었으면 해.’

‘너라면 그 아이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들었던 루시아의 부탁이야말로 아르잔의 볕이었다.

교육이란 것에 선망을 품었다.

이런 나라도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을 거라고. 잘못된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저주받은 과거를 속죄할 유일한 길이라고.

분에 넘치는 바람이었고, 욕망이었나.

사실 아르잔은 알고 있다.

사람에겐 저마다 분수가 있고, 적성이 있다.

그리고 아르잔의 적성이란 죽이는 것이다.

‘마지막 기회.’

일견 포기한 듯한 아르잔이었으나, 조용히 힘을 응축하고 있었다.

목표물이 가장 방심하는 순간이 있다.

이겼다고, 끝났다고, 목적을 이뤘다고 여길 때.

그 틈을 파고들면 셋 중 둘은 확실히 죽일 수 있다.

그래도 한 명이 남지만, 그것만으로 루안이 살 확률은 제법 오를 터.

‘핫.’

아르잔은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빌어먹을, 죽이는 게 싫어서 평생을 도망쳤는데 결국 인생의 마지막조차 살인으로 장식하게 생겼다.

운명이란 걸 만든 놈이 있다면 그 낯짝을 보고 싶을 지경.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인다는 것이었지만…….

그 사실은 아르잔에게 딱히 위안이 되지 못했다.

“정체가 뭐냐고? 말 잘했어.”

후방에서 무언가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온 건 그 순간이었다.

아르잔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검은색 물체는 어깨 끝을 스치고 지나 오셀에게로 날아갔다.

오셀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다, 무슨 생각에선지 얼굴을 굳히며 그 물체를 몸으로 받아냈다.

쿠당탕!

오셀이 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검은색 물체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모습을 감췄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하는 사이 또다시 한 명의 기사가 짐짝처럼 날아왔다.

이번엔 오셀도 몸으로 받지 않고 피했다.

쿠당탕, 바닥을 구른 기사가 피를 토했다. 이 기사는 앞의 녀석과 달리 의식이 있었다.

“쿨럭……!”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저, 저놈이 이상한 수를…….”

“하여간 한심한 새끼.”

쯧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

“처맞고 그런 핑계 대면 안 쪽팔리냐?”

아르잔이 멍한 얼굴로 어둠 속을 보았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며, 달빛 아래 금발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유가 뭘까.

아르잔은 그 모습이 평소보다 이른 새벽이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셀, 나도 하나만 묻자.”

루안 배드니커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암살자 새끼들이 왜 배드니커에 얼쩡대고 있는 거야?”

오셀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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