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7화 (17/925)

5. 1학년 0반 (3)

플레이어의 신체 능력과 지적능력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다.

사고 회전 속도도 훨씬 빨랐다.

옥상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본 순간 내 머리는 매우 빠르게 돌아갔다.

내 기숙사 방은 17층.

떨어진 곳은 20층 건물의 옥상.

건물 높이를 고려하면 내 위로 약 10-15m 위에서 떨어지는 셈이다.

떨어지는 이의 무게는 확인할 수 없으니 정확한 위치에너지는 계산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높이다.

일반인이라면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즉사할 만한 충격량이 올 거다.

내 현재 근력, 능력치 레벨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가 다치거나 죽지 않더라도 떨어지는 사람을 놓칠 가능성이 있었다.

‘광림을 써야 해.’

기숙사에는 외벽 감시 CCTV가 설치되어 있다.

겉모습도 능력도 자유자재로 바꾸는 내 광림을 만천하에 드러내면 행동에 제한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 외견을 바꾸지 않고 광림을 쓰자.’

최악의 경우 실패해서 플레이어의 궤적이 노출될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눈앞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백호군······.’

가장 먼저 떠오른 캐릭터는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몇 시간 전에 만났던 백호군이었다.

호족인 데다 대검을 사용하는 백호군의 근력이라면 이 정도의 충격은 견뎌 낼 것이다.

백호군의 최종장 버전은 사용 시간이 너무 짧아 쓸 수 없다.

하지만 천신의 진노 디버프가 걸린 통상 버전이라면 문제없이 사용 가능했다.

‘백호군의 힘을 내 몸에 강림시키자. 대신 그 힘이 몸 전체를 감싸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 힘을 완전히 묶어 두는 이미지로 발현하면 돼······!’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첫 시도지만 성공해 내야 한다.

플레이어의 궤적을 이미지대로 발현시키는 데에 온 집중력을 쏟았다.

파아아―.

백호군의 카드가 빛으로 변해 내 몸을 감싼 것과 동시에 떨어지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에 한순간 묵직한 느낌이 들었지만 백호군의 종합 능력치가 적용되어 안정적으로 그 사람을 받아 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17세의 조의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공했다. 변하지 않았어!’

손이 미끄러지기 전에 나는 뒤로 몸을 무너뜨려 발코니 안에 안착했다.

“아······ 으아아아악!”

“떨어졌다! 사람, 사람이 떨어졌어!”

창문 밖으로 떨어진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위층에서 비명 소리가 울린 후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품 안에서 기절한 인물을 내려다보았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그것도 얼마 전에 만나 대화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이레나’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이레나

[칭호] 은광고 1학년

[가호] 귀자모신의 주시 ‘그 눈을 뜰 때까지 지켜보리라’

[광림] (비활성화 중)

[상태] 심신 미약 ― 전 능력치와 스킬 레벨 소폭 하락, 침묵맹세2, 기절

[종합 능력치] Lv.8

[스킬]

함정 해제 Lv.3

에너미 탐지 Lv.2

채찍술 Lv.1

[설명]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건 환몽 경매에서 만난 이레나였다.

염준열의 모습을 한 나를 그 자리에서 빼내려고 필사의 충고를 하던 그 아이였다.

‘이레나······.’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하자 카드들이 하나하나 빛을 잃고 내 안으로 돌아왔다.

운명력의 발동으로 창밖으로 날아갔었던 카드, 이레나의 캐릭터 카드는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    *    *

기숙사에서 사고 발생 시 가장 먼저 알려야 할 곳은 지익회(地翼會), 기숙사 소속 학생들의 자치 기구였다.

은광고에는 기숙 사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설 관리는 학교의 거주 지역 관리팀이 맡았지만 기숙사 내의 학생 관리, 갈등 중재, 규칙 제정, 상벌점 관리 등은 지익회가 담당했다.

옛날에는 은광고에 기숙 사감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감들의 인사권을 특정 이사들이 독점하고 채용이 불투명하게 진행된 결과 문제가 발생했다.

플레이어 자격조차 없는 사감들은 연줄은 있었지만 무능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명문고 소속의 플레이어들에게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사감들은 알량한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우수한 은광고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즐겼다.

‘게임 속에서도 사건 몇 개가 언급 됐었어.’

‘수능 전날 3학년생 단체 기합 사건’

‘지익관 자습실 성추행 사건’

‘지익관 학생 식당 공개 체벌 사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수많은 고발과 고소를 거쳐 사감들은 벌금형, 집행 유예 등의 법의 심판을 받았으나 아슬아슬하게 감옥에는 가지 않았고 사감직에서 잘리지도 않았다.

이사진과 사감은 결탁하여 매년 기숙사 운영, 관리비의 명목으로 나온 예산 수십억을 착복했고, 그 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사들이 철저하게 사감을 보호한 결과였다.

사감들은 이사진을 등에 업고 더욱 뻔뻔하고 집요하게 학생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상황이 개선되는 건 15년 전, 한 학생회장이 취임하고 나서였어.’

15년 전, 학생회장의 주도로 기숙 사감, 비리 이사 퇴출에 은광고 학생들이 뜻을 모았다.

학생회는 그들의 퇴직, 사임, 해임을 촉구하는 ‘은광고 학생 서명 운동’을 벌였다.

휴학 중인 학생들, 병원에 입원 중인 학생들과 해외에 단기 유학 중인 학생들도 우편으로 서명을 보냈다.

서명 운동은 폭발적인 성원을 받으며 진행되어 전교생의 서명을 받아 내는 대기록을 세우지만, 대다수의 이사들은 계속 뻔뻔하게 굴었다.

‘고작 3년이면 졸업하는 학생들이 학교 경영에 관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본이사회는 거만한 명문고 학생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라는 꼰대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일이 계속 커졌다고 했었지.’

서명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은광고 전교생에 이어 교사진도 학생 측에 가담했다.

은광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수업 거부와 은휘관 본관 앞 침묵 시위를 진행했다.

학생회는 사건 진행 과정, 증거와 기록들을 영상화하였다.

영상화한 자료는 38개 언어의 자막을 첨부해 각종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고 언론사와 적극적으로 인터뷰하여 이 사태를 낱낱이 공개했다.

한국 최고 명문 플레이어 특목고에서 일어난 초유의 사태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렸고 외신도 이에 주목해 이사진들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웠던 황명호 이사장이 돌아와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며 이 논란은 끝났다.

그 과정에서 횡령, 배임이 공공연하게 드러난 이사 다섯 명이 해임되고 사감들은 전원 백수가 된 후 여죄가 드러나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학생에 의한 기숙사 자치 운영 기구 ‘지익회’였다.

지익회는 학생회, 선도부, 총동아리회에 이은 은광고의 대표 학생 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내 기숙사 방 발코니에 수동 조작 에어보드를 타고 날아온 인물이 그 지익회의 회장, 은광고 3학년 성시완이었다.

‘누가 바로 지익회에 연락을 넣었나 보네.’

기숙사 외벽 감시 CCTV에 남은 영상 기록을 보면 이 방을 특정 가능했을 거다.

긴급 사태에 대비해 학생 기구 대표자에게는 교내에서 사용가능한 수동 조작 에어보드와 그 면허가 발급되니 성시완은 바로 여기까지 날아올 수 있었을 거고.

그렇다고 해도 2분 만에 온 건 너무 빨랐다.

“CCTV 보고 왔다, 괜찮니?”

성시완은 매우 서둘러서 왔나 보다.

샤워 중에 뛰쳐나왔는지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티셔츠는 뒤집어 입은 상태였다.

3월 초의 밤바람을 맞은 머리카락 끝이 조금 얼어붙어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떨어진 애는 기절했어요.”

“그래······ 들어가도 돼?”

“들어오세요.”

성시완은 발코니에 에어보드와 신발을 내팽개치고 방 안으로 들어와 소파 위에 눕혀 둔 이레나를 살폈다.

한편, 밖은 아직 웅성거리고 있었다.

1학년 기숙사는 총 20층.

1층에서 10층까지는 여자 층.

11층부터 20층까지는 남자 층.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17층이다.

이레나가 여기에 있으면 바로 눈에 띌 거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회복 아이템은 필요 없겠다.”

성시완은 안심한 듯 한숨을 푹 쉬고, 손에 쥐고 있던 회복 아이템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의신아, 미안한데······ 일단 0반이 장난친 걸로 해도 될까.”

“네?”

“의신이 너도 레나도 0반 이잖아. 내가 장난쳤다고 하기엔 앞뒤가 안 맞고, 문제가 되면 내가 책임지고 해명할게. 네가 레나를 구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성시완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성시완이 망설임 없이 1학년생한테 고개를 숙인 것도 놀랐고,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놀랐다.

‘설마 기숙사생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는 건가?’

하지만 가장 놀란 건 이레나가 0반이라는 사실이다.

게임 속에서 이레나는 0반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장난으로 처리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자살 소동에 휘말리는 것.

장난에 휘말리는 것.

어느 쪽이 더 문제가 될지는 생각하나 마나였다.

적어도 이레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기 전까진 이 일을 덮어 둘 필요가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시완은 안심한 표정 반, 미안한 표정 반을 짓다 발코니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크게 소리 질렀다.

“들어가라. 0반 애들이 장난친 거다!”

그러자 웅성거림이 잠시 멎다가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익회장 형 왔다. 야, 들어가래!”

“0반, 아 인정. 입소 첫날부터 실화냐.”

“0반 놈들아 살살 달려라. 오늘 입학 첫날이다!”

“스킬 훈련이었나?”

“미리 만우절 준비하나 보다. 진짜 떨어진 줄 알았네.”

“OT에서 들은 대로네. 쩐다.”

1학년 기숙사 이곳저곳에 열려 있던 창문이 다 닫히고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너무나도 빠른 수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숙사 오리엔테이션에서 기숙사에 있었던 괴사건들과 대처법에 대해 소개했었는데······ 사례로 든 사건 5개 중에 4개가 역대 0반들이 친 사고들이어서 그럴걸.”

역대 0반이 너무 강함.

대체 역대 0반은 무슨 짓을 했기에.

아니, 잘 생각해 보니 게임 속 0반들이 한 행적을 생각하면 저 반응은 충분히 그럴 듯했다.

학교 물탱크 내용물을 전부 커피 우유로 바꾼다거나.

학교 부지 안에 있는 호수 위에 거대 얼음성을 짓거나.

철거 예정인 구교사 건물에서 수십 건의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거나.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었다.

그 사례로 들었다는 사건 5개가 무엇일지 매우 신경 쓰였다.

기숙사 OT에 갈 걸 그랬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성시완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전화를 걸었다.

“함근형 선생님. 저 시완인데요. 아······ 교직원 사택까지 들렸어요? 맞긴 한데 중간에 구조되어서요, 부상자는 없습니다······ 네, 0반이요······ 네? 두 명 다 0반이었는데요. 이레나랑 조의신이요. 네. 금방 가겠습니다.”

성시완은 0반 담임인 함근형에게 연락을 한 것 같았다.

성시완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함근형이 무슨 말을 했을지 예상은 갔다.

“함근형 선생님 뵈러 가야 될 것 같다. 발코니로 바로 나가자. 에어보드 탑승 인원 확장 모드로 적용하면 4인승으로 바꿀 수 있어.”

성시완이 발코니에 내버려 뒀던 에어보드를 조작하는 사이, 나는 그가 건네준 모포 아이템을 이레나에게 덮어 줬다.

‘······많이 야위었네.’

이레나는 지난 환몽 경매에서 봤을 때보다 핼쑥했다.

새하얗게 질린 작은 얼굴이 안쓰러웠다.

나는 이레나가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찬바람을 맞지 않도록 모포로 꼼꼼하게 감싼 후 안아 들었다.

“출발할게.”

나와 이레나가 올라탄 걸 확인한 성시완이 에어보드에 시동을 걸었다.

성시완은 이레나를 배려해 에어보드를 아주 천천히 몰았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응?”

“대처하는 게 익숙해 보이셔서요.”

성시완은 내 방에 막 왔을 때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회복 아이템, 모포, 담임에게 바로 연락을 취하고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준비성과 행동력은 이 상황에 익숙한 사람이 보일 법한 것들이었다.

“······명문고나 명문대 자살 사건은 매년 있어. 특히 플레이어만 다니는 학교에서는. 우린 그 전까지 어딜 가도 15%에 속하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잖아.”

성시완은 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모호하게 말했다.

“플레이어들끼리 모아 두면 그 특별함이 없어지니까 견디지 못하는 애들도 있어.”

성시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곁눈질로 내 품 안에 있는 이레나를 바라봤다.

“입학 첫날인 레나에겐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성시완의 말을 듣는 사이 에어보드는 교직원 사택 건물 앞에 착륙했다.

함근형이 기다리는 교사 휴게실에 도착하기 전.

이레나가 눈을 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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