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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8화 (18/925)

5. 1학년 0반 (4)

이레나가 유난히 동그랗게 보이는 눈을 깜빡이며 작게 바르작거렸다.

눈을 뜬 이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이레나를 안아 들고 있는 나도 내 앞에서 교사 휴게실 문을 여는 성시완도 조용히 이레나를 지켜봤다.

“아······.”

갑자기 이레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얼굴을 보니 감이 왔다.

정말로 이레나는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들어와라.”

함근형이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수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우리들을 향해 손짓했다.

샤워실에서 전신 드라이를 받으면 3분 정도에 다 말랐을 텐데.

함근형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기가 싫어서 수건 하나만 들고 와서 미리 기다렸나 보다.

사박.

이레나를 모포째로 함근형의 맞은편의 소파 한가운데에 내려놨다.

함근형이 이레나와 나를 번갈아 보다 성시완을 바라봤다.

“기숙사생들한테는 0반이 친 장난인 걸로 해 뒀어요······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하는 게 좋을까요?”

“그래라. 넌 감기 걸리기 전에 머리 좀 말리고.”

“괜찮은데······ 아, 감사합니다.”

함근형이 군데군데 조금 얼어있는 머리카락을 한 성시완에게 수건을 던졌다.

이레나를 생각해서라도 자리를 비우는 게 좋겠다.

함근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잘 들어가라, 조의신. 내일 얘기하자.”

나와 성시완이 퇴실하려 할 때.

이레나가 모포 사이로 불쑥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어?”

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가는 팔이 힘없이 내 교복 셔츠 자락을 잡고 있었다.

“······아, 미안.”

이레나는 주저주저하다 손을 놓았다.

이레나는 어딘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레나가 처한 상황.

이레나의 부모님.

환몽 경매.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이레나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지 감이 잡혔다.

‘······어른이 무서운 건가?’

30대 후반의 나이에 험상궂은 인상의 함근형.

고3이지만 지익회장다운 관록이 느껴지는 성시완.

반면에 고1 또래 중에도 중간 체격인 데다 아직 교복을 입고 있는 나.

이레나가 이 셋 중에선 나를 가장 편하게 여길 것 같았다.

여기에 남는 게 좋겠다.

“함근형 선생님, 조금 이따가 가도 될까요.”

“······그래.”

나와 이레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시완은 벽에 기대서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기숙사생 두 명을 여기에 두고 갈 생각은 없나 보다.

나는 이레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옆에 앉자 이레나가 다시 손을 뻗어 내 셔츠 자락을 잡았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인가.

‘함근형보다는 내가 말을 거는 게 낫겠다.’

내가 함근형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함근형이 내 의도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아니면 오늘은 들어가서 쉴래?”

억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려 하면 역효과가 날 거다.

이레나에게 도망갈 여지를 남겨 주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기다리자.’

한참 동안 이레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하지만 함근형도 성시완도 나도 재촉하지 않았다.

괜한 압박을 주지 않도록 적당히 시선을 돌리면서 우리들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오늘 부모님이 플레이어 협회에서 영구 제명을 당하셔서······.”

이레나의 부모와 연관된 일이었나.

함근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듯 굳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입을 가렸다.

“그런데 그게 다 나 때문이라고,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레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다 나 때문이고, 난 살 가치가 없는 것······ 같아서.”

이레나의 말은 점점 뚝뚝 끊겨 갔다.

뒤로 갈수록 숨죽인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그 후 1학년 여학생 생활 지도 담당 교사에게 이레나를 맡기고 교직원 사택을 나섰다.

내 옷자락을 잡은 야윈 손을 풀어내는 게 환몽 경매를 깨뜨리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    *    *

지익회에 이번 일을 보고하기 위해 성시완은 먼저 돌아갔다.

함근형은 성시완을 대신해 나를 1학년 건물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따라 나왔다.

“환몽 게이트죠?”

함근형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최근에 플레이어 협회가 영구 제명 처분을 내린 건 환몽 게이트에 연루된 플레이어들뿐이에요.”

이레나는 게임 속에서는 0반이 아니었다.

갑자기 0반이 된 건 분명 환몽 게이트 탓이겠지.

함근형은 조금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레나는 적벽괴도가 참가자들의 손에 남겼다는 시델렌티움의 동전 낙인도 없었다. 경찰에도 협회에도 협력적으로 증언을 했다. 부모가 좀 크게 연루되어 있어서 0반행이 결정됐지만.”

환몽 게이트는 현재 플레이어계의 가장 큰 스캔들이다.

만약 이게 알려지면 이레나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었더라도 부모의 죄를 짊어지게 될 거다.

함근형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이레나한테 아무 잘못 없는 거 알아요.”

“······그래.”

내 말을 들은 함근형이 안심한 표정을 짓다가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오늘 네가 이레나를 살렸구나, 조의신.”

사납고 매서운 인상의 함근형이었지만 웃고 있으니 학생을 격려하는 평범한 교사로 보였다.

“레나가 1층까지 떨어졌다면 살아남더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겠지······ 그리고 지금의 레나는 자기가 살 가치가 없어서 벌을 받은 거라 생각했을 거다.”

함근형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잘했다. 의신아.”

함근형의 배웅을 받고 기숙사 방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잘 준비를 하러 샤워실로 향할 때였다.

거실 한구석에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이건······.’

이레나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금색의 리본이었다.

언제 떨어졌던 걸까.

주름이 가지 않도록 리본을 조심해서 움켜쥐어 보았다.

오랜 시간 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리본이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레나의 부모······.’

해야 할 일이 하나 늘었다.

어떤 수를 둬야 할지는 금방 떠올랐다.

*    *    *

오늘 아침도 훈련 겸 솜뭉치 수색 겸 천익산을 가볍게 달렸다.

말이 가볍게 달리는 거지 일반인의 전력 질주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천익산 산책로를 주파했다.

날이 추워 다들 실내에서 단련을 하는 걸까.

‘산책로에 나밖에 없네.’

조금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오니 저 멀리서 ‘은광 트레이닝 코스’를 선택한 기숙사생들이 줄을 서서 이동 중인 게 보였다.

은광고에도 플레이어 훈련 커리큘럼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커리큘럼을 따라가느냐 마느냐는 학생의 선택에 맡겼다.

자유롭게 여가 시간을 조절하며 혼자 공부해 나가는 학생.

규칙적인 생활 관리와 같이 계획을 실천하는 동료가 필요한 학생.

은광고는 이 두 타입 모두를 위해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줬고 중도 참가나 포기도 인정해 줬다.

시간에 매이면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자율 학습을 택했다.

‘개인적으로 신체 단련을 해나가는 게 움직이기 편하겠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내 종합 능력치는 Lv.10이었다.

3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은 Lv.13이 되었다.

보통 1학년생 레벨이 10에서 20사이인 점, 지금이 학기 초인 점을 고려하면 신체 능력은 1학년생 사이에선 중간 정도일 거다.

‘플레이어의 궤적’의 특성상 내 신체 단련의 우선순위는 낮다.

광림을 써 버리면 캐릭터에 맞춰 종합 능력치가 바뀌니까.

애초에 종합 능력치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레벨에 따라 상승하는 한계 데미지가 체감하니 레벨에 목을 맬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쓸 수 있는 패는 늘려 두는 게 좋을 거야.’

내 광림은 다른 이들에 비해 이질적이다.

어제 컨트롤에 성공해서 외견까지 바꾸지 않고도 해당 캐릭터의 힘을 사용하는 법은 습득해 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플레이어의 궤적을 쓰는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적벽괴도라는 게 알려지면 유상훈이 10년은 놀려 먹겠지.’

손발과 시공간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칭호인 적벽괴도.

그게 나라는 게 밝혀지는 건 막아야 했다.

이 이유가 가장 컸다.

‘적벽괴도 칭호 붙인 기자 얼굴이 궁금하네.’

가능하다면 나 같은 부끄러운 칭호를 붙여 주고 싶다.

“솜뭉치야,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솜뭉치 수색은 오늘 아침도 허탕이었다.

정해둔 훈련 시간이 끝나자 웨어러블 디바이스 알람이 울렸다.

나는 등교할 준비를 하기 위해 기숙사로 돌아갔다.

*    *    *

수업 시작은 9시고 아침 조례는 8시 30분에 시작한다.

지금 시각은 8시였다.

현재 1학년 0반 교실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안녕!”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였던 김유리가 먼저 인사해 왔다.

“어, 안녕.”

답인사를 하자 김유리는 자리에서 일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김유리는 같은 나이의 학생의 평균 신장보다 훨씬 커 곧은 자세로 일어서 걷는 모습이 의연해 보였다.

게임 공식 일러스트에서는 주로 목련과 함께 그려졌었는데 실제로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김유리’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김유리

[칭호] 은광고 1학년 0반 반장

[가호] 이름을 감춘 진족의 조언,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세요’

[광림] (봉인 중)

[상태] 정상

[종합 능력치] Lv.15

[스킬]

펜싱 Lv.4

위험 감지 Lv.2

스프린터 Lv.2

······.

······.

······.

설정을 확인해 보니 김유리의 광림이 봉인되어 있었다.

‘게임하고 변한 게 없구나.’

김유리는 17세가 되어 처음 광림을 경험한 후 공황 상태에 빠진다.

김유리는 자신의 광림을 두려워했다.

자진해서 0반에 들어가고 플레이어 협회에 직접 봉인을 의뢰하여 주기적으로 광림 봉인술을 받을 정도로.

‘절친인 안다인에게도 그걸 숨긴 채 죽었지.’

결국 김유리는 광림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난 김유리야. 잘 부탁해.”

“조의신이다. 잘 부탁한다.”

명찰도 달고 있고 이미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상투적인 인사를 나눴다.

“의신아. 어제 반장, 부반장 정하려 했던 거 기억나? 반장은 내가 하기로 했는데 한이가 학급 임원 하기 싫다고 해서. 너나 지호한테 맡기고 싶은데. 아, 혹시 반장하고 싶으면 양보할게.”

다른 애들은 안 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라고 덧붙이는 김유리는 처음 보는 거나 마찬가지인 내게도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진행하는 걸 보니 중학생 때도 반장이나 학생회장 같은 임원직을 맡았을 것 같다.

‘앞으로의 전개를 생각하면 반장이나 부반장은 반드시 하고 싶은데.’

김유리같이 제대로 된 학급 임원 파트너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황지호는 임원 맡는 거 귀찮아 할 거야. 내가 부반장 할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황지호, 아니, 황명호라 해야 하나.

어쨌든 황호는 지금 맡고 있는 이사장직도 귀찮아하는 눈치다.

“와, 다행이다. 1년 동안 열심히 하자.”

김유리가 밝게 말했다.

워낙 괴짜가 많기로 유명한 0반이니 부반장 할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했나 보다.

“의신아, 디바이스 코드 알려 주라.”

“그래. 네 코드도 보내 줘.”

앞으로 반장, 부반장을 할 사이다.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편할 거다.

우리는 홀로그램을 전개해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코드를 교환하고 조례 시간을 기다리며 잡담을 나눴다.

“의신이 네가 그 ‘무명의 초신성’ 맞지? 0반에 올 줄은 몰랐어.”

“어쩌다 보니까 왔어.”

나도 올 줄은 몰랐다.

황호와의 거래의 결과로 반강제로 온 셈이니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어.’

주요 캐릭터가 있는 1반, 2반과 물리적으로 가깝다.

0반에도 구하고 싶은 캐릭터들이 많고.

무엇보다 은광고 분위기상 학생답지 않은 짓을 해도 ‘0반 또 저러네’ 하고 별 의심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0반 되게 좋은 거 같아. 다른 반은 한 반에 오십 명인데 0반은 스무 명이 안 넘어가잖아.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기도 쉽고, 교실도 넓게 쓰고.”

김유리는 0반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 것 같다.

“공통 시간표 봤어? 오늘 오전 ‘플레이어의 전투 연습1’ 수업은 합동 수업이야.”

플레이어의 전투 연습1 .

첫 수업.

게임 내에서도 조금 비중 있게 다루어지던 이벤트다.

김유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반은 사람이 적어서 1반, 2반하고 같이 한대.”

1학년 1반, 1학년 2반은 이 세계의 주인공인 주수혁과 안다인이 있는 반이었다.

첫 수업은 주인공들과 함께 받게 될 것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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