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첫 수업 (1)
흑역사.
이는 없었던 일로 해 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를 칭하는 은어다.
이능, 성품, 인망, 두뇌, 외모, 재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완전무결 불세출의 천재, 플마고의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에게도 흑역사가 있었다.
주수혁이 안다인과 함께 첫 수업을 받던 날.
안다인은 ‘플레이어의 전투 연습1’ 합동 수업에서 자신의 절친 김유리를 만나 입학 후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그 미소를 정면에서 본 주수혁은 성대하게 구른다.
플레이어의 몸이 아니었다면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몸 어딘가 부러질 정도로.
천하의 주수혁도 첫눈에 반한 여자의 미소 앞에선 넋이 나가는 고교생이었던 것이다.
‘안다인은 잘 웃지 않으니까 주수혁이 놀랄 만했지. 예의상 짓는 미소도 냉한 얼굴에 입꼬리만 올린 미묘한 표정이니까.’
주수혁은 그 처참한 몸개그 생중계를 반한 여자를 포함해 100여 명 앞에서 보이고 말았다.
그는 너덜너덜한 정신 상태에서 안다인과 1대 1 대련까지 하게 된다.
대련 결과는 주수혁의 참패였다.
안다인은 주수혁의 형편없는 모습에 조금 의아해하고 그걸 눈치챈 주수혁은 더더욱 고통받는다.
그게 지금부터 벌어질 첫 수업의 주요 이벤트였다.
수업 시작 5분 전.
1학년 0반 일동이 1학년 전용 제1체육관에 도착했다.
혹시 다른 0반 애들이 등교할지 모른다는 김유리의 말에 아슬아슬한 시간대까지 교실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도 등교한 1학년 0반 학생은 여전히 나, 황지호, 김유리, 한이 넷뿐이었다.
넷이 함께 이동하긴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체육관을 구경하는 척하며 주수혁의 뒤로 이동했다.
“유리!”
안다인이 김유리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안다인은 수백 송이의 꽃들이 일시에 만개한 것과 비견될 법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평소 얼음을 조각한 것 같다는 평을 받던 그 미모에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안다인을 본 학생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작 안다인과 김유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지만.
풀썩.
한편 나는 넘어지려는 주수혁을 뒤에서 받아 냈다.
대체 어떻게 넘어진 건지 몰라도 주수혁의 양발이 일순 공중에 떴었다.
대비한 덕분에 나도 함께 넘어지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아?”
“······어, 미안. 괜찮다.”
내 어깨에 기대고 선 주수혁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런 멍한 얼굴도 수려한 용모의 주수혁이 지으면 그림이 되었다.
저 뒤에서 주수혁보다 더 멍한 표정으로 주수혁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학생들도 몇 명 있을 정도다.
“정말 괜찮아? 오늘 수업에서 너 안다인하고 대련할 거 같은데. 너희 성적이 똑같잖아.”
“뭐? 아, 그렇지. 그래, 괜찮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안다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주수혁의 볼 끝이 다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이내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기 시작했다.
첫사랑에 넋을 빼놓고 있다고 하지만 주수혁은 이 세계의 주인공 중 하나다.
이제는 게임에서처럼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는 않을 거다.
‘이제 됐겠지.’
주수혁을 내버려 두고 물러나려 할 때, 주수혁이 말을 걸었다.
“고맙다, 조의신.”
주수혁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임 속 주인공이 눈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니 묘한 기분이다.
“······내 이름 알고 있었어?”
“실기 시험 때 바로 네 옆 수험장이었어. 상황 끝나고 너희가 병원으로 이동할 때 얼굴하고 이름표 봤어. 너야말로 나를 알고 있었구나.”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말하는 주수혁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얼빠진 기색은 없었다.
‘기억력 좋네.’
주수혁은 그 혼돈의 카오스가 넘치던 개판 속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어쩌면 주수혁은 장남욱과 유상훈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학교 1학년 중에 주수혁 너랑 안다인 이름 모르는 사람 없을걸.”
“하하하, 그렇게 따지면 무명의 초신성도 마찬가지일걸.”
주수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주수혁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 주고, 웃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임에서 봤을 땐 그냥 붙임성 있는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과 그 사람을 붙잡는 화술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진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주수혁에게 손을 내민 거겠지.’
수업종이 울리기 시작해 우리 둘은 말을 멈췄다.
“수업종이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향연이 웅장한 울림을 남기며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금관, 목관, 현이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 넘치는 멜로디를 자아내고 있었다.
곡을 감상하는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소리를 낮춘 대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이걸 직접 연주한 거야? 제목이 뭐더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엘가가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 중 1번 D장조야. ······와, 2관 편성까지 했어.”
“첫 수업종이라고 현악부, 관악부, 오케스트라부가 다 모여서 협연했나 보네.”
“이 곡 좋다. 다운받아야지.”
곡이 이어질수록 대화 소리는 줄어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곡을 다운받으려는 학생들이 홀로그램을 띄웠다.
은광고에서는 수업종 음원이 매일 매시간 바뀐다.
수업종을 담당하는 것은 음악관련 동아리였다.
현악부, 관악부, 오케스트라부, 피아노부, 사물놀이부, 밴드부, 국악부, 성악부, 합창부, 작곡부 등등이 수업종으로 사용할 곡들을 정했다.
수업종은 직접 연주하거나 부른 노래라면 뭐든지 가능했다.
오늘처럼 클래식일 때도 있었고 대중가요나 자작곡일 때도 있었다.
심지어 트로트나 판소리일 때도 있었다.
학생들이 만든 종 음원은 전부 은광고 방송부 홈페이지에 올라갔다.
수업종이 울리는 시간은 1분이지만 홈페이지에서 풀 버전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었다.
‘오늘은 기부금을 내고 다운 받아 봐야지.’
수업종 풀 버전은 무료로 받을 수도 있었지만 원하는 만큼의 기부금을 내고도 받을 수 있었다.
수업종 시간으로 정해진 1분이 흐르고, 아직 끝나지 않은 곡이 페이드 아웃되자 교사들이 나타났다.
대화를 멈추고 수업종을 감상하던 나와 주수혁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의신아,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주수혁은 자신의 반인 1학년 2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는 0반 아이들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학생들이 반 별로 2열종대로 모여 서자 교사 셋이 104명의 학생들 앞에 서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1학년 0반 담임 함근형.
1학년 1반 담임 김신록.
1학년 2반 담임 노영미.
함근형은 플레이어블 캐릭터고 노영미는 논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하지만 김신록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게임 속 1반 담임은 최편득이라는 쓰레기였는데.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인물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전용 메뉴로도 인물 정보가 열리지 않는다.
타이틀 히로인인 안다인이 소속한 1학년 1반의 담임은 나름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등록되지 않은 캐릭터라니.
‘최편득은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왜 담임이 바뀐 거지?’
김신록을 뚫어져라 관찰한 후에야 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에서 빈사 상태로 등장한 감독관이다······!’
입시 실기 시험 때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도망치라고 외쳤던 그 감독관이었다.
‘설정상 웅족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뒤 에너미와 함께 체육관 안에 내동댕이쳐졌다 수험을 치르는 학생들과 죽었었지······.’
원래 1반 담임은 김신록이 될 예정이었나 보다.
게임 속 최편득은 김신록이 죽자 그 자리에 앉게 된 거고.
“안녕하십니까. 은광고에 입학하신 여러분들의 첫 수업은 ‘플레이어의 전투 연습1’입니다.”
1학년 2반의 담임 노영미가 수업을 진행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전투에 흥미가 없거나 기피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물론 플레이어의 진로는 이계 공략에만 있지 않습니다. 은광고를 졸업한 후 프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지 않고 의사, 변호사, 회사원, 공무원 혹은 우리 같은 교사가 된 학생들도 있습니다.”
노영미의 말에 몇 명이 찔린 얼굴을 했다.
이계 공략을 하는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단 그냥 은광고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고라서 지원한 녀석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장남욱도 그런 케이스였지.’
한국의 교육 열풍과 명문고를 향한 향상심은 이계 충돌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했다.
“하지만 이계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근무할 사무실에도 휴가로 방문한 리조트에서도 이계의 틈이 벌어져 에너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노영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에너미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우리 플레이어들뿐입니다. 나 자신과 가족, 친구, 이웃을 지키기 위해 전투 스킬을 갈고 닦는 것은 플레이어의 기본 소양입니다.”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전부 이제 막 17세가 된 고등학교 1학년생이다.
그동안 광림 사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출중한 전투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보호받는 입장에 속했다.
하지만 이제 17세가 되어 협회의 승인을 받아 플레이어가 되었다.
노영미의 말로 자신들이 보호받는 입장에서 보호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는 걸 조금은 실감하게 되었을 거다.
“은광고 입학 조건 중에 ‘1개 이상의 전투 스킬을 갖출 것’과 ‘그 스킬을 공개할 것’ 이 있었죠. 우리 교사진들은 여러분들이 은광고를 믿고 공개한 전투스킬의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영미가 손짓을 하자 함근형과 김신록이 아이템 카드로 가득 찬 카트를 각각 끌고 왔다.
“여기에 있는 건 여러분들이 입학 시 공개한 전투 스킬에 맞춰 준비한 무기 형식의 아이템 카드들입니다. 레어도는 전부 R입니다.”
그 말에 학생들 몇 명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개인적으로 아이템 카드를 준비해 왔는데요.”
“저도요.”
부모의 재력으로 SR이나 SSR급 정도 되는 높은 희귀도의 개인 무기를 소지한 학생들에게 R급 아이템은 눈에 차지 않나 보다.
노영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확인하고 싶은 건 여러분들의 순수한 전투 능력입니다.”
1년간 학생들을 이끌어야 할 담임들이 자기 반 학생들의 전투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굳이 두 반 이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절대적인 능력치에 이어 학생들의 상대적인 능력치와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계 공략은 파티 플레이가 기본이니까.
불만스러운 얼굴도 보였지만 노영미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각 반의 담임들이 여러분들에게 아이템 카드를 배부할 예정입니다. 배부가 종료되면 다시 집합합니다.”
* * *
나는 내 스킬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전용 메뉴? 운명력? 교신?
아마 이 세계에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스킬일 거다.
공개하는 순간 플레이어 협회나 정부의 실험체로 끌려다닐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전투 스킬을 하나 이상 공개하는 것이 은광고의 교칙이다.
‘공개할 수 있는 스킬은 하나밖에 없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전투 스킬이기도 했다.
내가 공개한 스킬은 모든 무기와 방어구가 사용 가능해지는 ‘만물 사용’이었다.
“이거 전부 의신이 거야? 와!”
김유리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학생들이 받은 카드는 대부분 한 장이었다.
‘이건 좀 많네.’
내가 받은 카드는 300장이었다.
아이템 카드가 가득 들어 있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들고 있는 나를 보자 주변에 술렁거림이 퍼졌다.
바로 옆에서 아이템 카드 한 장을 쥐고 있는 황지호도 눈을 반짝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진족 중에도 만물 사용 스킬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드문데. 굉장하다, 조의신.”
내가 학교에 제출한 서류를 봤으면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황호는 시치미를 떼는 게 능숙했다.
그 정도로 뻔뻔하니 5000살을 넘게 먹고도 17살인 척 학생들 틈에 섞여 들 수 있는 거겠지만.
“사실 현존하는 무기는 전부 써 보게 하고 싶었다. 만물 사용 스킬을 가진 학생은 처음이라 지금 당장 준비할 수 있는 게 이 정도였다.”
함근형이 카드가 꽉 찬 케이스 안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스킬 레벨이 1이니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서 레벨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써 봐야······.”
“스킬 레벨 1? 개허접이네.”
1학년 2반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