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월하의 선상 파티 (4)
대한민국 4대 그룹 중 하나, 주오 그룹.
주오 그룹의 총수는 주씨가 맡았지만, 공동창립자인 오씨의 자제들은 주오의 주요 계열사와 재단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현재 오씨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오 회장의 손녀가 오혜지.
그녀는 현재 도망 중이었다.
‘수혁이와 드레스 코드를 맞춰서 두 벌이나 준비해 둬? 미쳤어!’
주수혁이 승선 전에 턱시도를 처리했다는 말에 안심했었다.
비록 주수혁이 그 턱시도를 입지 않았지만, 애초에 이 애매한 길이의 티 랭스 드레스는 오혜지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달맞이 파티 전에 적당한 핑계를 대고 드레스를 갈아입으려 했던 오혜지.
비서가 그녀에게 보여 준 여분의 옷은 또 그 지긋지긋한 샌드핑크색 드레스였다.
‘샌드핑크색…… 좋지도, 싫지도 않았는데 이젠 완전 싫어졌어.’
오혜지는 그 색을 본 순간, 반사적으로 창가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오혜지는 달빛을 받으며 자신의 광림, 달 아래에서 도약력과 이동 속도를 상승시키는 ‘월하의 위태천(韋馱天)’을 발동시켰다.
오혜지의 광림이 제대로 발동되면, 주오의 경호팀 중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
오혜지는 선체 외벽의 난간이나 장식품을 밟으며 도약 중이었다.
‘싸움은 자기들이 해 놓고 왜 우리 세대를 결혼시키는 걸로 수습하려는 거야. 노망이 무섭다, 무서워. 수혁이는 좋아하는 애도 있는데.’
주수혁은 현재 첫사랑 겸 짝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주수혁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며칠 관찰하면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학생회의 다인이였지.’
주수혁과 입학 공동 수석을 차지한 천재 1학년생, 안다인.
시야에 안다인이 들어오면 멍청한 얼굴을 하는 주수혁.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초인 주수혁이, 안다인 앞에선 늘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오혜지는 그 모습이 매우 마음에 들어, 두 사람을 조용히 응원하고 있었다.
‘다인이도 수혁이한테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서로 짝사랑 중인가.’
오혜지는 두 귀여운 후배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럼 수혁이한테도 다음 예비 턱시도가 갈지도 모르니까 열심히 도망 다녀볼까!’
집에 가면 샌드핑크 옷을 전부 갖다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며, 인기척이 없어 보이는 복도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혜지는 소리 없이 복도에 깔린 러그 위로 착지했다.
‘사람이 있어.’
검은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이들이 멀리 서 있는 게 보였다.
오혜지는 가장 가까이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응?’
문을 닫으니, 조금 달콤한 향이 섞인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선내는 기본 흡연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몇몇 구역은 흡연이 가능했다.
‘스모킹 라운지였나. 운도 없지.’
담배 냄새가 몸에 배기 전에 창밖으로 뛰어내리려 했던 오혜지.
오혜지가 창가로 다가갔을 때였다.
“이 근처는 사람을 물렸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선객이 있었다.
오혜지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턱시도 차림의 남성이 보였다.
타이를 풀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를 쥐고 있는 인물.
오혜지도 아는 자였다.
‘……수겸 오빠!’
주수혁의 육촌 형이자 친언니 오혜정의 약혼자가 될 뻔한 주오의 일벌레, 주수겸.
오혜지가 아주 어렸을 때는 주수겸과 교류가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의 주수겸은 언제나 오혜지에게 다정했었다.
‘주오의 난도 그랬지만, 몇 년 전에 있었던 약혼식 가출 사건 때문에 더 미묘해.’
초등학교, 중학교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온 주수혁과 달리, 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주수겸과는 만날 기회가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오혜지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을 때.
위이잉―!
주수겸이 스테인리스로 된 스탠딩 재떨이 위로 담배를 비벼 끄며 버튼을 조작했다.
모든 창문이 열리며 바닷바람이 쏟아져 담배 연기가 흘러나갔다.
‘오빠가 담배를 피웠었나? 잠깐, 지금 나 때문에 담배를 끈 거 같은데.’
사과해야 하나, 배려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자리를 비켜 줘야 하나 망설이는 오혜지.
열린 창문 옆에 기대선 주수겸은 머뭇거리는 오혜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혜지가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
쿠우웅―!
굉음과 함께 선체가 흔들렸다.
오혜지는 창틀을 붙잡으며 경악한 눈을 했다.
‘총톤수가 5만 톤이나 되는 키모폴레이아가 이 정도로 흔들리다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디바이스로 안내문이 발송되었다.
전방에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이 관찰되어 잠시 정박한다는 안내였다.
‘달맞이 파티도 연기될 예정인가 보네. 회항할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다.’
이계 충돌 이후, 드물지만 지면이나 해저에서 자연 이능파가 방출되어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오혜지가 안내문에 첨부된, 자연 이능파가 방출된 지역이 표시된 해도를 체크하며 생각에 잠겼을 때.
“장비 카드를 꺼내.”
“네?”
주수겸이 바다 저편을 노려보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 * *
주오 그룹, TC 그룹 차기 총수의 암살.
아무리 진족의 수장이라도 인간계에서 그 정도의 입지를 가진 인간을 죽이는 건 어렵다.
더더구나 몰래 사람을 죽이는 암살.
죽이기도 어렵지만, 자신의 정체를 내보이지 않고 일을 마치기도 쉽지 않을 거다.
저강렵도 사용할 수 있는 수가 제한된 셈이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노릴지 추려 가야지.’
첫째, ‘언제’.
‘저강렵은 자정 이전을 노릴 거다.’
상보심금파는 하루 사용 가능한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
‘그분’의 요청에도 사용을 꺼리던 저강렵을 생각하면, 언제 노릴지 짐작이 갔다.
‘자정 직전에 상보심금파의 갈래를 사용하면 금방 0시가 지나 제한 횟수가 회복되니까 리스크가 적어. 내가 저강렵이라도 자정 전을 노릴 거야.’
다음은 둘째, ‘어디서’,
‘사람이 적은 장소. 둘이 각자 배정된 선실에 있을 때를 노리고 싶겠지.’
하지만 자정이 지나도 스케줄상, 두 차기 총수가 선실에서 쉬기는 어려울 거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어떻게’ 암살을 진행할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저강렵은 달맞이 칵테일파티를 취소시키려 들 거야.’
갈라 디너 1시간 후부터 새벽 늦게까지 예정된 달맞이 칵테일파티.
달맞이 칵테일파티가 시작되면, 두 차기 총수의 동선을 파악하는 건 어려워지고 파티 도중에 자정이 지나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맞이 칵테일파티를 취소시킬 것인가.
‘흑막이 보인 패턴이나, 게임 속 정보를 합치면 어떻게 나올지는 짐작이 가.’
흑막이 주로 쓰는 계책은 성언격동(聲言擊東), 기실격서(其實擊西).
성동격서(聲東擊西)로도 불리는 방략.
동쪽을 친다고 소리치고 서쪽을 노리는 계략이었다.
‘잠실 야구장 사건에서도 두 개의 이계로 경호팀을 떼어 놓고, 세 번째 이계로 총수를 노렸어. 양동작전은 흑막이 가장 즐겨 쓰는 전술이었어.’
첫수로는 배를 정지시키고, 파티를 중단시키고.
두 번째 수로 선내의 플레이어를 떼어 놓고.
세 번째 수로 경호팀을 처리하고.
마지막 수로 차기 총수를 잡으려 들 것이다.
‘방금 선체를 뒤흔든 게 저강렵의 첫수겠지.’
해저에서 뿜어져 나온 이능파로 인한 파도가 일순 키모폴레이아를 뒤흔들었다.
선장이 승객에게 보낸 안내문을 보면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이라 되어 있지만, 아마 아닐 거다.
증거도 있었다.
딩동.
[옥토연] 은인아! 방금 그거 저강렵임!
[옥토연] 자연 이능파처럼 위장하긴 했는데, 내 월궁계도는 못 속여. 돼지 새끼가 상보심금파의 첫 ‘갈래’를 쓴 거야!
저강렵이 가진 상보심금파의 아홉 이빨, 아홉 갈래.
기적을 발휘하거나 강력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건 하루 아홉 번.
갈래를 사용할수록 점점 강도는 약해지고, 마지막 아홉 번째의 갈래는 저강렵의 말에 의하면 현재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 한다.
‘갈래는 쓰면 쓸수록 약해지지만, 마지막 이빨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들었는데, 잘된 일이야.’
남은 갈래는 일곱.
그리고 이 일곱 개의 갈래 말고도 저강렵에겐 남은 수가 있었다.
삐이이이이익!
디바이스에서 알람음과 함께 메시지, 좌표가 포함된 지도가 떠올랐다.
[긴급 알림 SR++급 이계 생성 안내]
예상대로 저강렵의 두 번째 수가 왔다.
흑막의 지원, ‘이계 부르기’.
저강렵이 키모폴레이아를 멈추게 한 건, 파티 중단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제 경호팀을 제외한 선내의 플레이어가 움직이겠지.’
이계는 키모폴레이아의 후미에 생성되어 있었다.
이 배의 최고 등급의 선실들이 몰려 있는 선수(船首)와는 반대편에.
* * *
오션뷰 스위트룸.
갑자기 배가 멈춘 후.
장남욱에 의한 대피 매뉴얼, 각 승객에게 배정된 구명조끼와 구명보트 위치에 관한 긴 해설과 잔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계 경보로 인해 분위기가 일변했다.
“SR++급 이계라고? 또 전조 현상 없는 이계가 나온 건가!”
약간 패닉을 일으키는 장남욱.
주수혁은 곧바로 장비 카드를 꺼내 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
도시후도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시후야, 쉬고 있어.”
“하하, 괜찮아. 배도 멈췄고. 이계에서 에너미 잡으면 기분이 좀 풀릴지도 모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몇 번 토한 탓에 도시후의 얼굴에는 여전히 생기가 없었다.
도시후의 안색을 본 주수혁이 웃는 낯으로 거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네가 억지로 나가려 하면, 기절시킬 거야. 기절 당한 상태로 기다릴래, 아니면 얌전히 기다릴래.”
평소에도 주수혁은 당할 수 없었는데, 지금 몸 상태로 싸웠다간 박살이 날 거다.
곧 싸워야 할 주수혁의 힘만 빼는 꼴이 될 테니, 도시후는 빠르게 포기하기로 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주수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굳어 있는 장남욱을 향해 말했다.
“남욱아, 시후 감시하고 있어 줘.”
“어! 아니야, 나도 싸울 수 있어! 저번에도―”
장남욱은 말을 멈췄다.
저번 잠실 야구장 사건 때, 에너미들이 얼마나 강력해 보였는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꼴을 보였는지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장남욱이 호흡을 가다듬고 서포트라도 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주수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SR++급 이계 하나뿐이잖아? 전력은 충분해. 배에는 의신이, 효돈이, 원우 형, 혜지 누나가 있잖아. 그리고 우리 육촌 형이랑 사범님도 있고! 시후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래.”
주수혁의 말에 납득하면서도 장남욱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수혁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문을 열었다.
“그럼 다녀올게!”
주수혁이 사라진 방 안.
소파에 누워 있는 도시후와 석상처럼 굳은 채 서 있는 장남욱 두 사람뿐.
도시후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남욱아, 끝말잇기라도 할래?”
“안 할래.”
제안을 거절당한 도시후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 * *
선내에는 현재 우수한 플레이어들이 넘쳐 난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NPC들.
누구 하나 SR++ 이계 하나에 질 이들이 없었다.
‘선내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다들 이계 공략에 나서겠지.’
경호팀을 제외하고.
그들은 아직 차기 총수들의 곁에 남아 있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차기 총수는 경호팀을 설득해서 전장에 내보낼 거야.’
게임 속 잠실 야구장에서 그런 것처럼.
벌써 배의 후미 쪽에서 공략이 시작되었는지, 토벌 안내문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SAT―K의 알람에 섞여 메시지 착신음이 들렸다.
딩동.
[옥토연] 진족 하나가 구름을 타고 선수 쪽으로 접근 중이야! 나름 은신술을 한다고 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내 눈엔 다 보이는데에― 여전히 결계술도 은신술도 꽝이네!
서유기에서 묘사되길, 저팔계는 근두운보다는 느린 구름을 탄다고 하였다.
구름을 타고 여기에 올 진족은 저강렵뿐.
저강렵이 직접 키모폴레이아로 오고 있었다.
‘미니맵에도 보이기 시작했어!’
전용 메뉴의 ‘주변 지도 열기’를 확인해 보니, 이쪽으로 접근 중인 점 하나가 보였다.
[옥토연] 저강렵이 ‘갈래’를 쓸 생각인가 봐……! 자연 이능파 현상을 가장해 키모폴레이아의 결계를 깨려는 거야!
콰아아아―!
주변의 이능파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상보심금파의 갈래가 주인인 저강렵이 원하는 형태로 힘을 발휘하려는 거다.
‘이 정도 규모를 가진 선박의 결계 등급은 잠실 야구장과 마찬가지로 R+++급. 보통이라면 저강렵이 원하는 대로 깨지겠지.’
콰콰콰―!
고밀도의 이능파가 키모폴레이아를 향해 쏟아졌다.
밤하늘을 가르는 이능파의 압력.
저 정도의 힘이라면 R+++의 결계는 깨지고, 덱 위에 맨몸으로 서 있는 나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다.
나는 그 힘의 흐름을 담담히 바라봤다.
파아아……!
하지만 상보심금파의 갈래가 구현해 낸 힘은 빛의 장막에 가로막혀 사라졌다.
일순 빛나다 사라지는 섬광.
황지호의 힘이었다.
딩동.
옥토연의 옆에서 월궁계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황지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내가 키모폴레이아에 심어 둔 결계는 깨졌다.
결계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저강렵.
그 점에 착안해, 결계술에 능한 황지호가 사전에 교묘히 작업을 해 뒀다.
‘됐어. 호족의 개입 여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황지호의 힘을 빌려 갈래를 하나 소모시켰어.’
이것으로 남은 갈래는 여섯 개.
[황지호] 잘해라.
황지호의 차례는 끝났다.
내가 잘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황지호가 개입하게 될 거다.
정말 내가 잘해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