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9)
은광고 정문 앞.
이미 해가 진 탓에 하교하는 학생도 보이지 않는 시각.
조명을 밝힌 시계탑이 홍규빈과 약속한 시각을 가리켰을 때였다.
“의신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일단 타.”
교문 앞에 멈춰 선 플레이어카.
열린 차창 사이로 홍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규빈이 이렇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건 첫 만남 이후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는 일 시킬 때나 만났었지.’
언제나 말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눈이 충혈되어 있거나 생기가 사라진 상태이던 홍규빈.
그래도 오늘은 기운 차 보였다.
특히, 신문부실에 들러서 갖고 온 잡지가 가득한 종이봉투를 보는 홍규빈의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그동안 바쁘셨을 텐데. 쉬지 않으셔도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어차피 오늘 부하들이랑 술 마실 예정이었거든. 그쪽 가는 게 더 피곤해.”
“아, 회식이었나요?”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빠지게 됐으니, 부하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아니야. 그냥 전에 너도 봤던 부하 둘이랑 같이 셋이서 마시는 자리였어.”
“저번에 학교에서 뵌 분들 말씀하시는 거죠?”
“응. 윤 대리가 여친이랑 헤어지고 계속 힘들어해서. 술이라도 사 주려고 했지. 카드 하나 주고 이리로 왔어.”
그러면 윤 대리와 정 사원, 둘이서 술을 마시게 된 건가.
정 사원의 깐죽거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홍규빈이 없으면 더 밉살스럽게 굴 거 같은데, 윤 대리가 괜찮을지 모르겠다.
‘윤 대리.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지난 4월.
중앙 서고 사건 때 정 사원이 윤 대리가 여친한테 차였다는 말을 언뜻 꺼낸 적이 있었다.
윤 대리는 아직 실연의 충격 속에 있나 보다.
‘많이 좋아했나 보네.’
정 사원이 위로해 주기는커녕 눈새처럼 굴 것 같은데, 둘이 술 먹으러 가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신문부에서 직접 만든 거지? 세상에. 제갈 선생님 젊은 시절 사진이 이렇게 많았어? 대체 너희는 이걸 어디서 구한 거야.”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사이.
잡지를 열어 보던 홍규빈이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목차를 살피는 홍규빈의 얼굴에는 피로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터뷰 기록 홀로그램 칩도 있잖아! 목차에 있던 것 중엔 못 본 것도 있는데. 여기와도 인터뷰했었나……. 아, 좀 바빠서 체크를 못 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구나.”
설마 이대로 앉아서 홍규빈의 잡지 개봉기, 감상기를 들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도망칠까 고민하기 시작할 때, 홍규빈이 잡지에서 시선을 뗐다.
“그럼 어디 갈까! 쇼핑부터 할래? 아니면 식사부터?”
딱히 필요한 아이템은 없고, 먹고 싶은 메뉴도 떠오르지 않았다.
랜덤 메뉴판 앱이라도 돌릴까 고민하던 중, 홍규빈이 자신이 아는 맛집으로 안내하겠다며 제안했다.
홍규빈은 알레르기의 유무를 묻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 후 수동 모드로 플레이어카를 몰았다.
짧은 드라이브가 끝났을 때.
‘간판이 없는데.’
홍규빈이 차를 멈춘 곳은 북촌 한옥마을에 있는 어느 기와집 앞이었다.
넓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음식점이라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담장에서 이능파가 느껴져.’
높은 담장을 따라 걷자 나오는 거대한 대문.
대문에는 붉은 단, 푸른 단이 곱게 장식된 청사초롱이 달려 있었다.
끼이이―!
“어서 오십시오, 홍규빈 님.”
홍규빈과 함께 대문 앞에 서자, 대문이 열리고 한복을 입은 이가 맞이했다.
정황상 예약을 하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홍규빈이 여기 VIP인가 보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한식당 같은데. 이런 곳은 웬만한 재력이나 연줄이 없으면 오기 힘들지 않나.’
홍규빈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태생이 훨씬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여러 빛깔의 깁으로 거죽을 씌운 사등롱(紗燈籠)을 든 이를 따라 걸으니, 발이 걸려 있는 정자가 하나 나왔다.
손님마다 하나의 정자가 배당되는 모양이었다.
비단으로 된 한실 방석에 앉은 홍규빈이 말을 꺼냈다.
“아, 여기 메뉴는 하나뿐이야. 매일 바뀌긴 하지만.”
홍규빈의 말대로 메뉴판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요리는 오골계로 만든 초계탕.
재료도 훌륭했지만, 닭고기의 살결을 따라 한 올 한 올 정성을 쏟아 손질한 게 인상 깊었다.
“그럼 천천히 얘기해 볼까. 여기는 보안도 잘되어 있어서 이야기하기도 좋아.”
후식으로 나온 건 제호탕(醍醐湯).
오매(烏梅)에서 씨를 발라낸 오매육에 사인(砂仁), 초과(草果)를 꿀에 재워 끓인 전통 음료였다.
“선상 파티 사건은 어떻게 됐나요?”
“사전에 얘기한 대로 됐어. 플레이어 위성에 남은 기록을 조작한 건 까다롭긴 했는데…….”
홍규빈은 플레이어 협회의 대응을 간단히 설명했다.
주오와 TC 그룹에서 이것저것 캐려 하는 바람에 대응에 조금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흑막이 눈치채진 못했겠지. 아직은.’
협회 내부에 흑막이 심어 둔 이들은 환몽 게이트로 쓸려 나갔다.
다른 방법으로 다시 협회에서 정보를 캐내려 들겠지만.
“의신이 말대로 그날 미리 대비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야근 중이겠지. 하하하!”
그 말을 하는 홍규빈의 눈동자에 빛이 잠시 사라졌었다.
홍규빈이 앞으로 해 줘야 할 일이 많으니, 너무 처지지 않게 가끔 당근을 던져 주는 게 좋겠다.
‘홍규빈은 돈도 많은 것 같으니까, 당근으로 던질 만한 소재가 제갈재걸 선생님밖에 없는데.’
게다가 둘 사이엔 아직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이 부분은 계속 지켜봐야겠다.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전에 말씀드렸던 꾀돌이라는 서족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꾀돌이라는 단어를 들은 홍규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진족 말이구나.”
잡지 하나에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릴 수 있는 홍규빈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서족이 내 배경에 관심이 생겼는지, 그걸 보고 들이댔다가 예지 스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더 집요하게 들이대기 시작했어.”
홍규빈의 배경?
그러고 보니 황지호가 이전에 홍규빈이 플레이어가 된 계기가 재밌다고 했었다.
몇 번 관찰까지 했었다고 말했다.
이상한 진족이 하나 더 붙을 뻔한 걸 홍규빈이 알지 모르겠다.
“하도 귀찮게 구니 결국 가호를 받게 됐는데…… 가호를 받고 나니 더 짜증 나게 굴었어. 꾀돌이의 가호를 받은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선택이었어.”
홍규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꾀돌이는 인간의 드라마에 환장해. 내가 아는 가장 극단적인 인간 찬가론자야. ‘전, 이런 거 아주 좋아해요’라면서 답지 않은 존댓말을 쓸 때가 가장 소름 돋아. 아마 좀 극적인 배경을 가진 인간에게 그럴듯한 이능까지 있으면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겠지.”
극적인 배경.
그럴듯한 이능.
바로 떠오르는 건 권제인이었다.
권제인의 가정사와 재능, 이능.
아마 그 꾀돌이 입맛에 딱 맞았을 거다.
‘역시 그날 꾀돌이가 권제인의 방에 함께 있었던 거야.’
생각에 잠겨 있으니, 홍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최근 꾀돌이가 바쁜 것 같긴 한데. 은광고 결계 밖에 오래 나와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네. 가자, 의신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홍규빈은 한마디 덧붙였다.
“또 이런 좋은 잡지를 만들면 꼭 내 몫도 찍어 놔.”
말하는 게 딱 금찬왕찬 콤비 수준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기숙사 방에 도착해 잘 준비를 마치고 잠들기 직전.
홍규빈이 폭풍같이 메시지를 날려 왔다.
[홍규빈] 의신아!
[홍규빈] 이거 2쇄던데. 초판 1쇄는 없니?
[홍규빈] 세 권 다 2쇄구나……!
[홍규빈] 프리미엄이 많이 붙어 있어도 괜찮아. 팔아 줘!
[홍규빈] 의신아!ㅠㅠ!
초판 1쇄에 집착하는 2학년 0반 놈들과 홍규빈의 모습이 겹쳐졌다.
제갈재걸 제자들은 다들 생각이 비슷하구나.
하지만 나도 없는 초판 1쇄를 구할 길은 없었다.
신문부 부장의 연락처라도 알려 달라는 홍규빈의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홍규빈의 구질구질한 메시지 외에도 내게 폭탄이 하나 더 떨어졌다.
‘이게 뭐야.’
기숙사 내에서 택배를 대리 수령하는 지익회에서 아침부터 연락이 왔다.
기숙사 문을 여니, 내 키보다 높게 쌓여 있는 택배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자에 찍혀 있는 건 ‘달토끼떡’의 로고.
옥토연이 투척한 달토끼떡 선물세트들이었다.
[옥토연] 은인아, 놀랐지?
[옥토연] 은인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팔고 있는 떡 종류 전부 한 세트씩 준비했어.
[옥토연] 이 떡 중 하나쯤은 은인의 취향이 있겠지!
[옥토연] 은인아, 다 먹었어?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어떤 떡이 제일 맛있어? 난 수리취가 들어간 떡 좋아하는데!
[옥토연] 은인아, 은인아…….
[옥토연] 왜 답장 안 해? ㅡㅡ
[옥토연] 뭐가 제일 마음에 드냐고!
아직 포장지도 안 뜯었는데 옥토연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답장을 안 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으니, 고맙다, 천천히 먹겠다는 인사를 간결하게 하고는 알람을 꺼 버렸다.
‘혼자서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여러 종류의 떡이 들어간 세트 몇 개를 집어 학교로 들고 갔다.
그렇게 도착한 1학년 0반.
나보다 먼저 도착한 아이가 있었다.
“의신아, 안녕! 오늘 블루베리청 만들어 왔는데 같이 먹자.”
하복 차림의 권레나.
그녀가 얼음이 담긴 보랭병을 세팅하고 있었다.
떡을 먹으면 금방 목이 마르니 잘됐다고 생각하며 둘이서 함께 자리를 준비해 갔다.
종이컵에 블루베리청을 나눠 담던 권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음…… 역시 파란색이라기보다는 보라색으로 보이지?”
“응, 그렇네.”
내 대답을 들은 권레나가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원래 블루베리는 이름과 달리 남보라색, 검은색에 가까웠다.
블루베리 음료나 음식이 파란색을 띠려면 식용색소를 섞어야 할 텐데.
“이번 주말에 권제인 선배님 뵈러 가잖아. 저번에 너무 큰 선물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나도 뭔가 준비하고 싶었는데. 어떡하지.”
권제인의 이명,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에 맞춰서 파란색의 뭔가를 준비하고 싶었나 보다.
그 푸른 바이올리니스트는 권레나가 수돗물을 떠 와도 기쁘게 마실 텐데.
그러고 보니 블루베리는 권제인이 좋아했던 것 같았다.
권제인을 만나러 갔던 날, 식음을 전폐한 그녀가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음식은 블루베리 젤리였으니까.
“권제인 선배님은 블루베리 좋아하셔.”
“응? 진짜?!”
풀 죽어 있던 권레나가 고개를 들고 환한 얼굴을 했다.
“다행이다!”
권레나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나도 기뻤다.
곧 다른 아이들도 등교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아이디어를 내줬다.
가장 좋은 의견을 제시한 건 능력자 반장, 김유리였다.
“그러면 블루베리청 말고도 뭐 하나 더 준비해 가자. 파란색을 낼 거면 블루 큐라소를 쓰는 게 좋아.”
“블루 큐라소? 그거 술 아니야?”
“블루 큐라소는 알코올이 들어간 리큐르 타입이랑, 알코올 없이 설탕이 들어간 시럽 타입이 있어.”
김유리의 짧은 설명을 들은 권레나는 블루레몬청을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청 종류는 먹지 않아도 유리병에 담아 두면 예쁘잖아. 선배님이 수제 음식 드시지 않더라도 관상용으로도 괜찮을 거야.”
“블루 큐라소……. 오늘 사러 가야지!”
“홈 카페 꾸미면서 사 둔 거 있는데. 오늘 우리 집 놀러 와서 같이 만들래?”
“응? 그래도 돼? 능력자 유리 님!”
요리는 김유리가 더 잘하는지, 권레나는 그녀의 지도를 받으며 만들기로 한 모양이다.
한이도, 사월세음도 관심을 보여서 오늘 방과 후에 김유리의 집에서 요리 교실을 열게 되었다.
“저기…… 나도 가도 돼? 가족분들이 너무 많으면 안 되겠지만.”
주저하며 말하는 민그린에게 김유리가 웃으며 답했다.
“응! 괜찮아. 지금 집에 아무도 안 계셔. 놀러 와. 아, 그냥 자고 가도 돼!”
“어, 어…… 저, 저녁은 같이 먹기로 한 애가 있어서 그건.”
그 대화를 듣던 내 머릿속엔 게임 속 전개가 떠올랐다.
‘김유리의 아버지가 입원한 거야. 어머니는 간호 중인 거고.’
게임 속에선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전후로 김유리가 정신적으로 점점 무너져 갔었다.
그리고 여름 방학에 생긴 사건을 계기로 정신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터지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아이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김유리를 바라보며 어떤 수를 둘지 생각했다.
또 내가 수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내 쪽을 보고 있는 건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