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22)
“잘했다! 정말 멋진 연주였어, 제인아!”
저 멀리에서 이능을 거둔 재러드 리가 바닥에 쓰러져 통곡하고 있었다.
재러드 리 외에도 조명, 음향을 담당한 팀원들도 대놓고 울거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게임, 또 이 세계에서 얻은 정보로는 권제인이 막나가면 팀원들이 말리고, 막아 주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는데.
그녀의 유일한 혈육, 권레나가 엮인 일이라서 그런 걸까.
단체로 정신 줄을 놓아 버린 것 같다.
“제인아…….”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참고 있습니다. 그만하세요.”
“흑, 윽……. 아, 애들이 듣기 전에, 흐윽, 좀 닥쳐!”
그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다 들렸으니까.
1학년 0반 아이들은 영원의 호수 팀원들의 상태를 보며 당황스러워했다.
“뭐냐. 어…… 연주는 좋긴 한데.”
“눈물이 날 만큼 멋진 공연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하하하, 영원의 호수 팀원분들 반응이 격하구나. 응! 보통 최상위에 랭크된 팀일수록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고 들었어!”
독특한 분위기.
다른 곳은 몰라도 염준열을 아끼는 붉은 사자는 여기와 비슷할 거다.
“저번에 봤을 때와 인상이 바뀐 것 같은데. 이유가 있는 건가.”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관찰했다.
“다들 음악적 감수성과 표현력이 풍부하신가 보다! 역시, 권제인 선배님의 팀원들다워!”
한편, 권레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같이 감격에 겨워했다.
권제인에게 남다른 팬심을 품은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호수를 건너온 권제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연주, 어땠어?”
하필 권제인은 권레나의 바로 옆에 있던 한이에게 물었다.
조카에게 직접 연주의 감상을 묻기에는 수줍었던 걸까.
하지만.
‘곤란하네.’
한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호연관 내한 공연 때 스태프로 참가하지 않은 탓에 신상 조사를 하지 않았나 보다.
“선배님, 감상이라면 제가 먼저 말해도 될까요!”
눈치를 보던 김유리가 끼어들었지만, 그 전에 한이가 먼저 감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멋졌어요. 선배님이 활을 움직일 때마다 울리던 공기의 진동도, 이능에 반응해 움직이던 빛의 입자도, 연주를 듣는 우리 반 아이들의 표정도요.”
한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권제인.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뒤늦게 한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되었어요. 좋은 연주를 해 주셔서 감사해요.”
한이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은사, 공청훤에게나 보여 주는 귀한 미소였다.
그 표정을 본 반 아이들 전부가, 심지어 황지호도 조금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래, 괜찮다면 다음에도 내 연주를 들어 줄래?”
“네!”
한이의 멋진 감상을 들은 후.
권제인은 우리를 팀 빌딩으로 안내했다.
팀 빌딩으로 걸어가는 동안 권레나의 긴 감상을 경청하는 그녀를 관찰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정문의 결계를 통과하자 아이들의 감탄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안이 다 이계 금속으로 되어 있어!”
“실내장식도 멋져요! 이계 금속을 얼마나 가공해야 이 정도로 꾸밀 수 있는 걸까요.”
팀 빌딩 로비를 지나쳐 건물 내부를 연결하는 보안 포털을 두 개 통과했을 때.
눈을 반짝이며 빌딩 내부를 감상하던 황지호가 중얼거렸다.
“거슬리는 진족의 기운이 느껴져. 자주 이곳에 오나 보군.”
서족의 수장 꾀돌이를 말하는 건가.
황지호의 반응을 보니 꾀돌이는 이곳을 자주 오고 가지만, 지금은 부재중인 것 같다.
쉬익―
세 번째 보안 포털을 통과한 후.
그녀가 높은음자리표가 양각된 문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나타난 곳은 응접실이었다.
보안 포털을 세 개나 통과해야 나타나는 응접실인 만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마 아주 가까운 지인을 부를 때나 사용하는 곳이겠지.’
푸른 벽지와 같은 색의 깃털 패브릭 소파.
응접실 가장 안쪽에 설치된 작은 무대.
무대 위에는 빈 보면대와 음향기기, 3D 입체 재생 장치가 놓여 있었다.
권제인이 소소하게 지인을 불러 모아 연주회를 열기도 하는 모양이다.
“앉으렴.”
권제인의 권유에 따라 앉자, 그녀가 인원수에 맞춰서 종이를 하나씩 건네 왔다.
종이의 내용은 무려 메뉴판.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직접 손님 대접을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우리 팀 셰프가 대기 중이야. 메뉴판에 없는 것도 괜찮아. 재료를 사 올게.”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팀이 1학년 0반 접대를 위해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어서 각자 디저트 메뉴를 하나씩 선택했다.
오늘은 날이 좀 더운 탓에 대부분의 아이가 고른 건 아이스크림이나 빙수, 혹은 파르페였다.
아이들이 전부 메뉴를 고른 후.
“레나야, 지금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영원의 호수 팀 셰프는 엄청 유명한 파티시에라고 들었어. 비교되기 전에 주는 게 좋을 거 같아.”
김유리와 권레나가 작게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 권제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정말 별거 아니지만,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요.”
메뉴가 나오기 전, 권레나가 토트백에서 유리병 두 개를 꺼냈다.
반 아이들과 같이 만든 블루베리청과 블루레몬청이었다.
권제인은 병 두 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는 한참 동안 굳어 있다 말했다.
“나한테 주는 거니?”
“네!”
“직접 만든 거야?”
“네……!”
권제인의 묘한 반응에 권레나가 점점 불안해할 때.
“재러드, 이 병은 영구 보존하고 싶어. 관련 스킬이나 광림을 가진 플레이어를 소개해 줘.”
“지금 당장 알아볼게!”
재러드 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하도 울어서 볼품없는 얼굴을 한 그였지만, 목소리 하나만큼은 우렁찼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영원히.”
“네?!”
권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리를 했다.
권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저기…… 또 만들어 드릴게요. 그냥 드셔 줬으면 하는데요.”
“또 만들어 줄 거니?”
“선배님만 괜찮으시다면…….”
그 대답을 들은 권제인이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레나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나요?”
“물론이지. 바이올린은 잘 연주하고 있니?”
“네! 아직 이능 바이올린과 어울리는 활을 못 찾아서 아르코 주법 대신 피치카토만 연습하고 있지만요. 저번에 선배님이 연주하셨던 ‘귀향’의 도입부인 피치카토 파트가 정말 멋져서…….”
갑자기 권제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자신이 말실수했나 싶어 당황한 권레나가 말을 멈췄다.
침묵이 이어질 때, 권제인이 입을 열었다.
“레나에게 이능 활을 선물하는 걸 깜빡했어. 미안해.”
권제인의 사고 회로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몹시 미안해하다 홀로그램을 전개해 수많은 이능 활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활을 골라 봐.”
“네? 이건 권제인 선배님이 쓰시는 이능 활이잖아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벙쪄 있던 권레나가 경악했다.
“내가 쓰던 건 마음에 안 드니?”
“그럴 리가요! 저, 저 이번에야말로 마음만 감사히 받으면 안 될까요?”
“마음 말고 활도 감사히 받아 줬으면 하는데. 마음에 안 들면 새것을 구할게.”
“선배님…….”
결국, 권레나의 손에 이능 활 하나가 넘어갔다.
카드를 받는 그녀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와, 쩐다.”
“제가 자리가 비웠을 때 저런 느낌으로 이능 바이올린을 선물하셨군요.”
“하하하! 저번에도 저랬다고? 재미있는 장면을 놓쳤군.”
맹효돈, 사월세음, 황지호가 수군거리는 가운데, 여자아이들 사이에선 침묵이 돌았다.
예전에 당했던 비슷한 일을 떠올리며 해탈한 표정의 김유리.
자신이 입술을 바르게 읽은 건지 몇 번이나 의심하다 이능 활 카드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는 한이.
카드를 쥔 상태로 넋이 나간 권레나.
메인 셰프가 직접 디저트를 들고 응접실로 찾아온 후에도 분위기는 미묘했다.
“선배님, 인터뷰를 진행해도 될까요.”
분위기도 바꿀 겸, 신문부원으로서 일도 할 겸 운을 뗐다.
“그래. 다들 여기에서 쉬고 있어 줘. 재러드에게 말하면 뭐든 준비해 줄 거야.”
나와 권제인이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 반에서 한 명 더 일어났다.
“여기 신문부가 한 명 더 있는데.”
황지호가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저놈도 일단은 신문부였다.
‘따라올 때부터 뭔 짓을 할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정체를 밝힐 생각인가 보네.’
그를 빤히 관찰하던 권제인이 눈을 크게 떴다.
호연관 공연 당일, 권제인은 30대 버전의 황호와 마주쳤으니 황지호의 정체를 알아볼 거다.
좋지 않은 대화가 나오기 전에 말을 끊었다.
“일단 가죠.”
* * *
네 번째 보안 포털을 통과하자 푸른 바이올린이 양각된 문이 보였다.
이전에 왔었던 권제인의 개인 방이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황지호가 본론을 꺼냈다.
“그날 석촌호수에 있던 조의신이 신경 쓰여서 인터뷰어로 지정한 건가?”
“그때 의신이를 본 게 신경 쓰이긴 했어요, 호족의 수장님.”
“역시 너 정도의 플레이어라면 바로 알아보는군. 숨기지 않긴 했지만.”
권제인은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나와 황지호를 번갈아 봤다.
조카와 같은 반에 호족의 수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머리가 아플 거다.
“팀 빌딩에 서족의 수장 놈 기운이 가득한데. 알고 있는 거냐.”
“꾀돌이 씨에게는 빚이 많아요. 자유로이 빌딩 출입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어요.”
“혹시 그놈이 웅족의 심문을 도왔나?”
“네.”
권제인의 말에 황지호가 눈을 빛냈다.
불완전했던 가설 하나가 사실로 바뀌었다.
‘서족의 수장은 플레이어 협회의 주요 인물인 홍규빈과도 가까운 사이로 보여서 짐작은 했는데…….’
권제인은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으로 ‘그분’의 수를 하나 막아 냈다.
그녀를 도와 오랜 기간 웅족까지 심문해서 정보를 캐냈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배신자인 긴 꼬리의 후보가 하나 줄었어.’
홍규빈이 말하는 그 ‘극단적인 인간 찬가론자’인 서족의 수장 꾀돌이.
그는 배신자가 아닌 게 확실했다.
이제 남은 후보는 넷.
우족(牛族), 사족(蛇族), 마족(馬族), 원족(猿族)이다.
“당신과 의신이가 왜 함께 움직이는지 물어도 될까요?”
권제인의 질문에 생각이 중단됐다.
황지호는 별 고민 없이 바로 답변했다.
“조의신은 우리 호족의 은인이다. 그가 우리를 도왔고, 우리도 그를 돕고 있지.”
황지호가 권제인 앞에서 저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관찰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마지막 말을 안 했으면 조금은 감동했을지도 모르는데.
“의신이는 인간이죠? 거기에 아직 열일곱 살인데, 호족의 은인이라니…….”
“하하하하! 그래, 이 녀석은 확실히 인간이고, 열일곱 살이지. 몇 번이나 조사해 봐서 알아.”
황지호의 말이 이어질수록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얼른 이 화제에서 벗어나야겠다.
“우선 인터뷰부터 하죠.”
사전에 신문부원들과 문새론으로부터 건네받은 홀로그램 자료를 전개하며 말했다.
황지호가 나를 보고 갑자기 처웃긴 했지만 무시했다.
다행히 권제인도 곧 자료를 읽고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준비한 모든 질문이 끝났을 때.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그래. 뭐든 물어봐.”
권제인을 만나면 직접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선배님의 이능 바이올린을 만든 장인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어떤 점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은데.
무엇부터 물어볼까 고민하다 본인에게 듣는 게 빠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권제인에게 다리를 놔 달라고 부탁해 볼까.
“지금 그 장인과 연락할 수 있나요?”
“아니, 못 해. 얼마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의를 표하기 전에, 권제인이 몇 마디 덧붙였다.
“그분의 수명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 재주를 아낀 상위 존재들이 수명을 늘려 주신 거야. 제자에게 모든 걸 전수하신 후에 가셨다고 들었어.”
“그분에게 제자가 있나요?”
“응.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어. 그 제자가 내 학교 후배가 될 예정이라면서 그분이 소개해 줬었어.”
권제인의 후배?
권제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프로 플레이어가 되었다.
여러 음대에서 명예 학위를 받긴 했지만.
‘권제인이 나온 학교 중 어디를 말하는 거지.’
내가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이번에도 내 예상을 벗어나는 말을 했다.
“그 아이가 무사히 합격했다면, 지금 은광고 1학년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