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28)
이전에 체스 대회에서 만난 나와 염준열은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했었다.
지금 연락처를 말하면 사실상 정체를 밝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절대 스승님을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가끔 가르침이 필요할 때나 급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사용할게요!”
염준열의 태도가 묘했다.
저 모습을 보니 그저 스승님과 자주 연락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
“키모폴레이아의 선상 파티 전날에 스승님을 아는 듯한 진족을 만났어요. 스승님께 바로 알리고 싶었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나를 아는 것 같은 진족?
누구를 말하는 거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진족이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죠. 하지만 스승님의 말씀을 따랐어요. 모르는 분이라 함께 가지 않았어요.”
역시 내 제자는 똑똑하고 예의도 바르고 겸손하고 향상심이 넘치고 스승의 말도 잘 듣는 착한 제자였다.
그런데 붉은 드레스라고?
플마고 게임 스토리상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진족은 한 명뿐이었는데.
“후예는 드문 존재죠. 그 진족 분께는 ‘말썽꾸러기 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누구일까요. 제가 아는 후예 중에서는 딱히 짐작 가는 분이 없어요.”
그 말썽꾸러기는 염준열도 아는 후예다.
‘김신록 선생님이네.’
그 후예는 비탄의 웅녀한테도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나…….
대체 5천 년 동안 무슨 짓을 한 걸까.
‘염준열에게 접근한 건 비탄의 웅녀인 게 확실해.’
그녀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는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 세우고 있던 가설이 다시 떠올랐다.
‘저강렵이 실종된 원인에 비탄의 웅녀가 개입한 건 아닐까.’
누구나 저강렵이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갑판에서 상보심금파를 들고 맞선 나라면 안다.
‘그때 저강렵은 도망치지 않았어. 내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유기’에서 본 저강렵의 성정과 그때 본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저강렵은 행방불명이 된 걸까.
‘저강렵의 의지와 관계없이 실종된 거라면 누군가가 개입한 거겠지.’
그 누군가는 현재 저강렵에게 원한이 있고, 이를 갚을 능력이 되는 존재일 거다.
‘붉은 드레스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비탄의 웅녀밖에 떠오르지 않아.’
그녀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저강렵을 찢어 버릴 법했다.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의 계기가 된 사건.
그 스토리에서 적호가 치명상을 입은 순간, 그녀가 등장했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비탄의 웅녀가.
적호가 죽은 순간부터는 게임 장르가 변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섬뜩한 형상을 하고 스토리에 개입했다.
‘……결국 적호는 죽었지만, 비탄의 웅녀가 개입해서 사건이 수습됐었는데.’
그녀의 그런 게임 속 행보를 알았기 때문에 환몽 경매 때 거래를 청할 수 있었다.
‘갑판에서의 보인 저강렵의 태도.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는 비탄의 웅녀. 이 둘과 현재 상황을 조합해 보면 답이 나와. 저강렵의 실종의 원인이 된 건 비탄의 웅녀일 가능성이 커’
현명한 그녀라면 내가 저강렵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고 알아서 처리해 줬을 거다.
그녀가 적호의 안위를 위협하는 흑막의 행보를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염준열에게 접근한 걸까.’
내 정보를 캐기 위해서일까.
그래도 내 제자한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했어. 앞으로도 모르는 존재는 따라가지 마.”
“네!”
염준열이 힘차게 대답했다.
지나치게 착한 후예라 친절을 베풀다 모르는 이를 따라갈까 여전히 걱정되긴 하지만.
“그런 일도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서 스승님과 연락할 수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체스 대회에서도 지고, ‘이능 삼키기’도 성공 못 했는데. 제가 너무 뻔뻔한 부탁을 하는 걸까요?”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염준열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이미 용제건에게도 들켰는데, 만약 들키더라도 용족의 후예에게 들킨다고 뭐 하나 달라지겠나.
“……역추적하지 말아 줘.”
“네! 그러지 않을게요.”
“다음에 만날 때 디바이스 코드를 알려 줄게. 기다려.”
플레이어는 회선을 여러 개 갖는 경우가 많다.
권제인도 디바이스는 하나지만 코드는 여러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 나는 디바이스는 두 개에 회선을 하나 동기화하여 쓰는 중이었으니 회선을 하나 정도 늘리는 건 괜찮겠지.
“이건 다음 수업 때까지 예비로 가지고 있어.”
“감사합니다, 스승님!”
SR---급 소모형 아이템, ‘메시지 없는 전서구’.
말 그대로 메시지 없이, 이능파밖에 전할 수 없는 일회성 소모품 아이템이었다.
내 이능파를 담아 목적지를 설정한 후, 염준열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러면 수업을 시작하자.”
“네!”
염준열이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제자가 이렇게나 열의가 넘치니 스승인 나도 할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30분 정도가 흘렀을 때.
“스승님, 드디어 성공했어요……! 봐 주세요, 스승님의 불꽃이 제 뜻대로 움직여요!”
드디어 내 제자가 처음으로 이능 삼키기에 성공했다.
붉게 물든 머리카락과 세로로 열린 동공을 하고 웃는 염준열.
아직 그는 용족의 힘을 개방하지 않으면 이능 삼키기가 불가능한 것 같지만, 그라면 금방 힘을 제어해 낼 것이다.
“그래, 잘했어.”
“감사합니다!”
칭찬을 들은 염준열의 기분을 반영한 그의 홍룡이 불꽃을 이글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으로 이능 삼키기도 성공하고, 스승님과 연락할 수단도 얻고……!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네요.”
염준열은 내가 만든 불꽃의 주도권을 가져와 자유자재로 모양을 변형시켰다.
처음에는 작은 홍룡.
환몽 경매에서 만든 붉은 벽.
카네이션이 꽃봉오리에서 만개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
마지막으로 내가 쓰고 있는 까마귀 가면.
스타 플레이어다운 세리머니를 감상하고 박수를 보냈다.
“계속 제가 성장하면, 언젠가 스승님과 어깨를 나란히…… 아니, 적어도 뒤에서 싸울 날이 오겠죠? 선상 파티 사건에는 갈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꼭 스승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선상 파티 때 두고 간 게 분하고 섭섭했나 보다.
“이제 다음 목표는, 이번 체스 대회 챔피언인 의신이를 이기는 거예요.”
갑자기 내 얘기가 나오다니.
놀라긴 했지만, 염준열의 향상심에 다시 감탄했다.
“저 말고도 의신이와 대국하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가 많아서 걱정이에요. 작년 챔피언인 동하도 의신이와 둬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제 차례가 너무 늦어질까 봐 걱정이에요.”
은광고 2학년 선도부, 안중지계(眼中之界) 천동하.
그도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한 명이었다.
천동하와는 아직 접점이 없었는데, 조만간 엮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침 선도부 소속 인물 얘기가 나왔으니 그걸 물어볼까.’
괴담 중, 학생회와 선도부가 만들었다는 비밀 결사.
성국언의 말을 따라 염준열이 괴담 자체에 주목하지 않을 정도로 돌려 물어보자.
“선도부와는 많이 친해? 학교 공지를 보면 학생 대표 회의 외에 공동으로 주관하는 행사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학생회와 선도부가 엮일 일이 있어?”
“선도부 애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긴 하지만 딱히…… 아.”
염준열은 무언가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1학년 때, 지금은 졸업한 3학년 선도부 선배 분이 같은 학생회였던 경구한테 무슨 모임에 들어오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모임?”
“네. 학생회 내에도 몇 명이 모여서 스터디 그룹을 짜거나 이계 공략 연구 모임을 하기도 해요. 그런 게 아닐까요?”
선도부의 선배가 학생회의 곽경구에게 모임에 들어오라고 제안을 했다?
어쩌면 이게 단서가 되지 않을까.
나는 염준열의 주의를 돌릴 겸,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나. 기말고사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스터디 파티에 가입할 거야?”
“용족 형 누나들이 공부를 도와주고 싶어 하셔서, 집에서 공부할 예정이에요. 필기는 동하한테 안 되겠지만, 실기로 만회해서 수석을 노릴게요.”
“응원할게.”
“네! 평소에도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시험 기간이라도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안타깝게도 우리 반 아이들과 스터디 모임이 잡혀 있어서 시험 기간에는 만나는 건 힘들었다.
그 이후로도 들떠 있는 염준열의 말을 들어주다, 수업을 마쳤다.
* * *
김유리의 집.
현관문이 열리자 거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환영해 줬다.
“어, 의신이 왔다!”
“야식 먹는 중인데 잘됐네.”
“부반장 몫도 남겨 놨다.”
1학년 0반 기말고사 스터디 모임 첫 야식은 카세리 치즈를 듬뿍 넣은 시카고 딥 디쉬 피자.
토핑으로는 바비큐 소스가 발린 로스트 치킨과 통새우, 치폴레 소스가 올라가 있었다.
한입 베어 문 순간, 입안에서 치즈의 풍미와 부드러운 도우, 토핑의 맛이 어우러졌다.
“맛있다. 어디에서 시킨 거야?”
이 말을 들은 아이들이 입을 다물다 황지호를 바라봤다.
설마 저놈이 또.
“그래, 내가 만들었다. 저번에 먹어 본 게 꽤 맛있어서.”
황지호는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제 몫의 피자를 잘 처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첫 수업 때 시카고 딥 디쉬 피자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었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만드나.
“음, 요리로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왜 지호는 요리도 잘할까요.”
“……분해. 맛있어.”
한이는 분한 얼굴이었지만 피자를 한입 먹을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 정말 잘 맞나 보다.
“맛있으니까 됐다.”
아이들이 의문을 표하는 가운데, 짱돌 맹효돈 선생은 이제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나도 맹효돈을 본받아 생각을 멈추고 피자를 먹을 때.
황지호가 불쑥 물어 왔다.
“어디 갔다 왔냐.”
“그냥 좀.”
신문부 부 활동을 마쳤을 때, 황지호에게는 기숙사에 들러서 간다고 둘러댔었다.
그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피자에 집중했다.
오늘도 학교에서 지급한 디바이스를 두고 가길 잘한 것 같다.
“어.”
피자를 한입 더 먹으려다 그대로 굳었다.
거실 한쪽, 카페에서나 있을 법한 라운드 소파.
그 위에 눈가만 내놓은 채 온몸을 담요로 덮고 잠든 민그린이 있었다.
“……민그린이 아직도 있잖아.”
내 물음에 권레나가 답해 줬다.
“그린이는 공부 중에 잠들었어. 몇 번 깨웠는데 안 일어나더라.”
그 경계심 강한 민그린이 아이들 사이에서 잠들다니.
최근 악플이 없어져서 마음이 놓인 것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기쁜 일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김유리가 말을 걸어왔다.
“하하하, 걱정 안 해도 돼. 우선 용쌤 통해서 그린이 부모님 쪽엔 연락드렸어! 그린이 부모님이 나한테도 직접 전화하셨는데, 아예 자고 와도 된다고 하시더라. 나도 그린이가 자고 갔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부모님이 아니다.
민그린의 부모님이야 그녀에게 친구가 생겼다니 아주 기뻐하겠지.
하지만 지금 눈이 뒤집혀서 민그린을 찾아다닐 놈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깨우자.”
“응? 잘 자고 있는데 깨우기는 좀…….”
내가 민그린을 깨우기 전.
초인종이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딩동, 딩동, 딩동딩동딩동.
“누구냐, 이 시간에.”
“많이 성격이 급하신 분인가 봐요!”
“이 시각에 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분명 그놈이 왔을 거다.
인터폰을 확인한 김유리가 말했다.
“얼굴이 화면에 안 잡혀. 엄청 가까이 서 있나 봐. 음…… 나중에 카메라 각도를 조정해야겠다!”
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
“기척 감지를 해 봤어. 저쪽은 혼자인 것 같아.”
“위험 감지로는 딱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한이와 김유리가 스킬을 발동해 바깥을 감지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의견을 나눴다.
“그래? 한 명이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족이 아닌 한, 우리가 알아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족이 쳐들어온 거면 집을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잖아. 어차피 열어도 닫아도 상관없을 거야.”
“아, 시끄럽다. 일단 열고 생각하자.”
“그렇네요.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죄송하고, 열어 주죠!”
지난 몇 달간, 전투 훈련을 하며 서로의 전력을 파악한 우리 반 아이들.
위의 말은 전부 맞는 말이긴 했다.
우리 반에서 권레나와 사월세음을 제외하면 모두의 공격력은 은광고에서도 상위권에 속했으니까.
‘돌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스킬을 사용하고, 전력 분석을 하는 건 훌륭한 일인데…….’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이 조금 과격해지고 0반스러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거다.
“그래. 열자!”
집주인인 김유리도 아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는 문을 열러 가려는 그녀를 막았다.
대신 혼란 속에서 여전히 피자를 처먹고 있는 황지호를 불렀다.
“야, 황지호. 네가 열어 줘.”
만약을 대비해 우리 반에서 총알받이로 쓰기에 가장 적절한 놈을 방패로 세우기로 했다.
“응? 뭐, 그럴까.”
황지호는 물티슈로 손을 닦고 현관문 개폐 버튼을 눌렀다.
쉬익—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고 보인 건.
시허옇게 질린 얼굴.
핏발이 선 눈.
여기저기 흐트러진 머리.
귀신 같은 꼴을 한 송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