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78화 (178/925)

38. 청소년 수련회 (8)

폭풍을 뚫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해안선 위를 타고 뻗어 나갔다.

파아아아!

그러자 두 이능파가 충돌하며 어두운 밤바다를 밝혔다.

섬광과 함께 충격파가 터졌다.

“으윽……!”

반사적으로 이능파를 몸에 감고 김유리와 권레나를 감싼 맹효돈이 신음을 삼켰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가 데미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바다를 마주한 권제인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연주를 이어 갔다.

신과 바다의 광기를 부르는 김유리의 광림.

선율에 닿은 물을 노래하게 만드는 권제인의 광림 ‘수면의 요영(謠詠)’.

두 광림이 충돌해 팽팽하게 맞섰다.

거대한 바다의 벽은 바이올린의 선율에 가로막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아, 안 돼!”

그때, 맹효돈의 뒤에서 몸을 일으킨 권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바다의 벽이 움직이지 못하자, 바다에 삼켜지지 않은 에너미들이 진군을 재개하고 있었다.

연주를 하는 권제인은 에너미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보다 두세 배 큰 몸집의 에너미의 그림자가 그녀를 가렸을 때.

퍼억!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권제인 주변에 접근한 에너미가 일소되었다.

단 한 번의 타격이 거친 바다를 헤치고 선두에 선 높은 희귀도의 에너미를 제거한 것이다.

“……도인 할배?”

맹효돈이 눈을 의심하며 중얼거렸다.

권제인의 앞에 탁거산이 서 있었다.

그는 언제 공격을 했냐는 듯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빈틈이 가득한 자세였지만, 막 상륙한 수백의 에너미를 마주한 그의 주변에 일기당천의 패기가 흐르고 있었다.

촤아아악!

그때, 진격을 방해하는 권제인을 제거하기 위해서인지 거대한 물줄기 수십 개가 그녀를 향해 뿜어졌다.

강대한 이능파를 머금고 있는 물줄기는 하나로 합쳐지다 갈라지기를 반복하며 권제인을 삼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권제인이 연주하는 곡의 가락을 바꾸며 그 거센 움직임을 막아 보려 했지만, 전체 바다의 벽에 비하면 바늘 정도 되는 규모의 물의 움직임까지 제어하는 건 불가능한 듯했다.

바다의 벽에서 떨어져 나온 풍랑들이 권제인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촤아아!

권제인 주변에 접근하던 에너미를 제거하던 탁거산이 자세를 잡았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게 움직이며 여유를 부리던 그가 처음으로 뒷짐을 풀고 한 발을 뒤로 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건 대체 뭐지, 뭘 하려는 거야……! 지금이라도 저 바이올리니스트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

탁거산에게 이능은 있지만 권제인 같은 특수한 타입이 아니었다.

맹효돈은 탁거산이 제자가 되어 달라고 들이대며 자기 자랑을 할 때 수도 없이 그의 신상과 능력에 대해 들었다.

‘저 사이비 도인은 나랑 비슷한 능력을 가졌어. 스킬도, 광림도. 어떻게 저걸 막겠다는 건데!’

그러나 백전노장의 탁거산이 지금 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니, 뭔가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맹효돈은 입을 다물었다.

에너미를 파괴하며 다가온 풍랑이 두 명예 교사의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콰콰콰콰!

탁거산이 이능파를 실은 일격을 내지르자 그의 주먹 끝에서 용오름이 솟았다.

맹렬한 용오름에 휘말린 풍랑들은 안개처럼 분쇄되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물보라 사이에서 탁거산이 다시 뒷짐을 지는 게 보였다.

말 그대로 바람을 찢고 바다를 가르는 세찬 일격에 맹효돈이 숨을 삼켰다.

“해안선을 통과한 에너미가 있어!”

탁거산의 일련의 동작에 눈을 떼지 못하던 맹효돈이 권레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약 1km에 달하는 해안선.

거기에 넓게 걸친 바다의 벽과 권제인과 탁거산이 맞서 싸우는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온 것이다.

“어떡해, 여기서 놓치면 추격이 어려워져……!”

권레나의 말대로였다.

석모도의 면적은 약 42 .84km².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맹효돈과 권레나가 어둠 속에서 에너미를 추격하는 것도 힘들고, 자칫하다간 저쪽에서 잠복해 공격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권레나와 맹효돈이 뛰어가려고 했지만, 그 앞을 누군가가 막았다.

“잠깐, 학생들! 학생들은 거기에 있어!”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의 사내였다.

구형 아이템이었지만, 일단은 이능 무기를 무장하고 있는 게 플레이어처럼 보였다.

“부상자도 있는 것 같은데, 어디를 가려고!”

“하지만 이대로 두면 민가 쪽으로 에너미가 갈 거예요!”

“저 할배…… 아니, 선생님들은 지금 바쁘잖아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쐐애애액!

중년 남성 플레이어의 말을 보충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능파 덩어리가 육지 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끼이이익……!

크오오오오!

모래사장 위로 에너미들이 쓰러지고 소멸하기 시작했다.

목이 꿰뚫린 에너미는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고 빛의 입자로 변하였고, 비명을 토한 에너미도 급소가 꿰뚫려 점차 사라져 갔다.

“저건……!”

에너미들의 급소를 꿰뚫은 이능파 덩어리는 빛의 화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맹효돈은 그 화살의 주인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함근형 선생님……!’

지옥을 빠져나와 은광고를 향해 달리던 그날, 맹효돈을 지켜 준 빛의 화살이었다.

“그 유명한 ‘창천명궁’이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까, 학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중년 남성 플레이어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    *    *

2반 여학생 숙소.

송대석이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난 괜찮은데…… 선생님이랑 다른 애들 상태가 안 좋아……!”

내부를 살피던 황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건물 밖에서 기척을 읽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었는데, 면목이 없군.’

이능독에 쓰러진 1학년 2반 학생들.

중상을 입고 혼절한 노영미.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지만 경상을 입은 송대석.

무사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그, 구해 줘서 고맙, 아, 야, 너…… 그, 지도사들 있는 쪽 가지 않았냐? 여기 지금 독인지 저주인지 뭔가가 있어! 빨리 옮겨야 해! 그 지도사들은 어디에 있어?”

얼빠진 얼굴로 안도하다가, 감사 인사를 하다가, 정신없이 굴던 송대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황호는 송대석을 흘끗 보며 말했다.

“이제 없다.”

“뭐?”

“그들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

황호는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그 정도로 썩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청소년 지도사들의 숙소는 중앙 대피소 근방에 있었다.

황호가 도착했을 때, 지도사들 몇몇이 한창 중앙 대피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치 이 사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던 그들은 중앙 대피소에 도착하자 무언가를 설치했다.

그 정체는 이능파로 발동하는 이능 폭탄 아이템이었다.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군. 무엇을 믿고 이 은광고를 적으로 돌리려 한 거지.’

그 탓에 황호는 이 일에 가담한 지도사들을 제압하는 것 외에도 폭탄을 제거하는 데에 시간을 써야 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결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폭탄을 전부 터뜨리는 무식한 수단을 쓴 데다, 녹족이 준 이능독 해독제로 인해 내장이 녹아 지금도 이능파의 일부를 신체의 수복에 할애하고 있었다.

힘의 소모도 컸던 탓에 이동 속도도 떨어지고 말았다.

‘이 새끼는 못 찾았다는 말을 뭐 이렇게 돌려서 해. 또 말투는 왜 이 모양이야. 어젯밤에 시대극이라도 보고 잤나?’

한편, 지도사가 떠올라 불쾌해하는 얼굴을 한 황호를 보며 송대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잘 생각해 보니 이 돌아이 새끼는 평소에도 말투가 개판이었던 것 같은데. 말할 때보다 처웃을 때가 더 많아서 티가 안 났던 거야!’

송대석은 방금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같은 반 급우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돌아이력에 감탄했다.

파아앗!

송대석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황호는 이능파를 마력으로 전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손짓을 하자 황금색의 마력에 휘감긴 부상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황호의 마력 컨트롤을 본 송대석이 경악했다.

“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이능파를 마력으로 바꿔서 움직였다. 가지. 중앙 대피소까지 엄호하겠다.”

송대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수십 명을 마력으로 들어 올려 옮기면서도 달리는 속도는 송대석에 비해 황호가 훨씬 빨랐다.

‘엄청난 집중력이야! 이 돌아이가 이능이 차고 넘치더라도 이렇게 안정적으로 컨트롤하면서 전력 질주하는 건 어려울 텐데!’

송대석이 앞서 달리는 황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는 거야?”

“마력을 다루는 것 말인가? 나이가 차니까 저절로 되더군.”

이 새끼는 나랑 동갑이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송대석은 그렇게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저 돌아이가 자신을 구해 줬다고 생각하니 입 밖으로 험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생일이 빠른 거야?”

길게는 11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학생과 동급생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나이가 많은 거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송대석에게 황호가 무심하게 답했다.

“생일? 일단 호적상 생일은 10월 3일인데.”

저 돌아이는 생일이 별로 빠르지도 않았다.

송대석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래? 그래서 나이가 많아서 말투가 그런 거야?”

“이 말투 말인가? 하하하하! 원래 나름 이 모습에 맞는 말투를 썼지만, 내 나이를 아는 녀석이 같은 반에 있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송대석의 반어법이 저 돌아이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방금 생사의 위기를 넘었는데도 담대하구나. 독에 당하고 부상을 입었는데도 말이야. 무쇠팔의 젊은 시절과 판박이로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송대석의 귀에 닿았다.

‘……그 대영웅의 젊은 시절과 닮았을 리가. 닮은 건 얼굴뿐인데.’

황호는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봤던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지만, 송대석은 저놈이 돌아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송대석의 시야에 중앙 대피소가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안심한 탓에 힘이 풀리고 급격히 송대석의 눈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능독은 상처가 있으면 독이 더 빨리 흡수된다. 등에 그렇게 부상을 입고도 여기까지 버티다니, 제법 기개가 있군.”

돌아이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렸다.

송대석은 황호에게 방금 뭐라고 한 거냐고 되물으려 했지만, 그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이번 계획을 짤 때는 변수가 생길 거라는 걸 가정하고 있었다.

내 선택의 결과로 게임 속의 스토리는 많이 달라졌으니까.

김신록은 살아남고 최편득은 사라졌다.

플레이어 협회에 숨어 있던 흑막의 간자가 색출되었다.

김유리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광림 봉인술식이 사라졌던 날에 나비령의 손을 잡지 않았다.

1학년 0반에서 참가한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결과물과 나비효과가 산재했다.

‘그 결과물과 이렇게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살기 어린 이능파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지금 내게 인간과 진족을 가릴 스킬은 없지만, 이 세계에서 수많은 진족을 마주한 탓일까.

근거는 없지만 확신했다.

지금 이 살기의 주인은 진족이었다.

진족의 날카로운 음성이 귀를 울렸다.

“뒤에 지고 있는 ‘그것’을 내려놓고 가라.”

내 등에는 잠든 사월세음이 업혀 있었다.

‘김신록을 노릴 웅족 외에도 진족이 있을 거라고는 상정했어. 마주칠 거라고도 생각했는데…….’

이 습격을 주도한 리더와 마주치고 말았다.

계획과 달리 사월세음을 대피시키지도 못하고 적호, 용제건, 김신록, 황지호 중 누구와도 합류하지 못한 채로.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7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