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80화 (180/925)

38. 청소년 수련회 (10)

황명호 대저택.

은호의 후예들이 잠든 지 오래인 늦은 밤.

백호는 거실에 앉아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은광고의 학생들과 제 친우들이 위기에 맞서 싸우고 있었지만 백호는 여기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계 충돌이 일어난 직후 백호가 진명을 잃어버렸다고 천신에게 고한 순간, 천신은 크게 노하며 그에게 ‘신역의 수인’의 낙인을 찍어 그를 이 신역에 가뒀다.

그는 은호의 후예의 경호와 신역의 수비를 맡는 명목으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저 신역 밖으로 나갈 수 없기에 저택에 남게 된 것이었다.

……왕!

백호의 발치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주변을 맴돌던 신수가 백호의 다리에 매달렸다.

신수는 새로 들어온 소식이 없는지 궁금해 보였다.

하지만 아직 어떤 보고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므로 백호가 신수의 마음을 달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걱정할 것이면서 왜 배웅도 하지 않았지?”

끄응…….

신수는 위험을 앞에 둔 조의신을 배웅도 못 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 끙끙거렸다.

백호는 냉정하게 말했다.

“조의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하루빨리 힘을 회복해라. 지금 네 상태로는 신역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신수가 고민하다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종종 뛰어갔다.

신수는 조의신이 방문하고 간 날, 응접실에 그대로 방치되었던 녹족이 만든 영약 파우치를 하나 물고 왔다.

“마실 결심이 섰나?”

왕!

신수의 대답을 들은 백호가 파우치를 개봉해 영약을 그릇에 붓자 독한 향이 코를 찔렀다.

신수는 한순간 비틀거렸지만, 비장한 얼굴로 코를 박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 전부 마시도록.”

영약의 맛을 견디기 힘든지 신수는 마시는 중간중간 멈춰서 길게 울고 귀를 쫑긋거리거나 꼬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떨었다.

백호는 재촉도, 격려도 없이 신수의 분투를 지켜보기만 했다.

신수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영약을 전부 마셨을 때, 백호는 신수가 좋아하는 간식을 하나 내어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    *    *

플레이어의 궤적에 기록된 캐릭터 중 가장 강력한 캐릭터는 최종장 버전의 백호군이다.

강한 만큼 리스크도 있었다.

‘천신의 진노’ 디버프가 사라진 최종장 버전의 백호군의 사용 시간은 3초에 불과했다.

그러나 디버프가 걸린 통상 모드의 경우 사용 가능한 시간이 길었다.

적어도 저 웅족을 상대할 정도로 충분할 만큼.

파아아아!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았지만, 찬란한 광채의 빛은 달빛을 지워 버릴 정도로 눈부셨다.

천신이 내린 허락의 빛이 주변을 잠식했다.

“이, 이 빛은 천신……!”

웅족 수장의 오른팔이 경악했다.

쉬지 않고 무거운 공격을 날려 대던 그가 처음으로 멈춘 순간이었다.

“천신이 인간에게도 가호를 내렸나, 그럴 리가, 천신에게 그럴 여유가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잠깐, 진족? 방금까지 인간이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진족의 힘을 보이는 것이냐!”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니, ‘그런 일’도 있었으니 ‘그 반대의 일’도 있을 법하지.”

‘그런 일’? ‘그 반대의 일’?

해석할 수 없는 말이 들렸지만, 한가하게 그걸 묻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의 정체는 나중에 들으면 되겠지!’

카아앙!

상보심금파의 검은 이빨과 웅족의 오른팔이 위로 올려 든 대검이 맞닿아 충격파가 뿜어져 나왔다.

하나 그의 대검이 뿜던 충격파는 백호군의 이능파에 눌려 더 이상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드득, 기기긱……!

상보심금파와 대검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물린 상태로 금속음이 새어 나왔다.

나와 저자의 이능파의 질과 완력이 호각인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호각이라고는 하나 지금 나는 사월세음을 지지하기 위해 한 손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은련관에서 상보심금파의 목소리를 듣고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 대련할 당시, 백호군은 봐주신답시고 한 손으로 나를 상대했었다.

한 손으로 싸우는 방법이라면 질리도록 봐 왔다.

완력에서 밀리지 않는다면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카아아앙!

먼저 대검을 휘둘러 거리를 벌린 건 웅족 수장의 오른손 쪽이었다.

그가 대검을 놀려 맹공을 가했지만, 되려 대검의 날을 쳐낸 상보심금파에서 뿜어져 나온 칼바람에 뺨이 긁혔다.

쉬익!

마치 면도날로 그은 듯한 가는 상처에서 흐른 핏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피를 본 웅족이 혼란과 분노가 뒤섞인 눈을 하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상보심금파를 고쳐 잡고 비스듬하게 든 쇠스랑으로 가볍게 응수했다.

카아앙! 캉! 카앙!

날카롭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다시 날이 몇 번이나 부딪혔다.

평소보다 몇 배는 가볍게 느껴지는 상보심금파를 회전시키고, 휘두르고, 쳐내며 점점 거리를 좁혀 갔다.

두 날붙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불꽃 사이에서 시야가 교차했다.

“……대검이 아니라 알아보는 게 늦었군. 백호가 네 놈에게 사사했구나!”

백호군과 마주친 적이 있었나.

5천 년이나 되는 세월 속에서 웅족 수장의 오른팔이 백호군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게 더 이상하긴 하겠지만.

“호족 중에 여기에 온 놈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어째서 대검이 아니라 쇠스랑을 들고 있는 거냐!”

아무래도 이자는 나를 백호군의 제자인 호족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비록 내가 목소리를 듣게 되며 상보심금파가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고 하나 태상노군의 신물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 주지 않기로 했다.

“대답할 이유가 없는데.”

“……그 건방진 입을 열게 해 주마.”

내 도발에 넘어간 웅족이 이능파를 모으는 게 보였다.

검술의 파생 스킬, 필살기를 발동해 단숨에 대미지를 입히려 하는 것 같았다.

은밀 행동을 포기하는 대신 나를 완전히 잡을 생각인 셈이다.

사아아아……!

바람과 이능파가 소용돌이치며 웅족의 대검에 집중되었다.

나는 상보심금파를 들어 보이긴 했지만, 적극적인 방어 자세는 취하지 않았다.

“이빨 빠진 흰 범의 애송이가 내 기술을 받아칠 수 있겠느냐!”

이능파의 격류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백호군의 스킬을 발동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안광’을 사용합니다.〉

조의신으로서 ‘안광’을 사용할 때 뜨는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메시지와 다른 문구가 떠오르고, 내 눈에 이능파가 모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순백으로 바뀌는 시야 속, 사냥감을 똑똑히 포착할 수 있었다.

변한 시야에서 유난히 내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게 레벨 10의 안광이구나……!’

저레벨인 내 안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출력이었다.

방심한 웅족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것에 이어 상대의 급소도 훤히 보였다.

“어, 어째서 이 정도의 안광을!”

몸을 보호하기 위해 기본으로 두르고 있는 이능파도 대검에 실은 탓에 웅족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호족과 싸웠다면 안광의 존재 유무는 염두에 뒀을 테지만, 신화계 호족 수준의 안광을 구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윽……!”

안광을 한 몸에 받은 웅족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제 선택지가 생겼다.

이대로 급소를 노려 갈래를 발동시키거나.

백호군의 광림을 사용해 웅족 사냥에 특화된 무기, ‘웅렵조(熊獵爪)’를 소환하거나.

웅렵조를 소환하면 플레이어의 궤적 사용 가능 시간은 크게 깎이겠지만, 이자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들어야 할 게 많아. 전투 불능으로 만들되 입을 열 때까지 죽여서는 안 돼.’

상보심금파의 날을 웅족의 목 앞에 가져갔다.

갈래를 발동시킬 준비를 하자 상보심금파가 웅웅거리며 응했다.

이빨에 맺히는 고밀도의 이능파를 감지한 웅족이 이를 으득 무는 게 보였다.

“무기를 버려.”

“크, 으윽, 크하하! 그 흰 범의 눈만 닮은 게 아니라 물러 터진 것까지 닮았구나……!”

그는 안광의 범위에 놓이는 바람에 잘 돌아가지 않는 입을 놀렸다.

웅족의 수장의 오른팔이라는 자리는 그냥 얻은 게 아닌지, 그는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았다.

되려 관절에 힘이 들어간 게 보여 안광이 풀린 순간, 중상을 입더라도 공격하겠다는 의지가 절절히 보였다.

“크흐, 자,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나는 무기를 버리지 않을 거다!”

어떻게 하긴, 갈래를 쏴서 반 죽여 놔야지.

저강렵도 갈래를 맞고 버텼으니 이 자도 아마 갈래를 맞아도 죽진 않을 거다.

내가 갈래를 발동하려 할 때였다.

눈에 섬광이 스치고.

우드득!

황금빛의 마력이 사납게 굽이치며 웅족의 오른팔을 삼켰다.

“……!”

옷 소매는 멀쩡했지만 그 내용물은 그렇지 않은지 피와 짓이겨진 살이 긴 소매 사이로 보였다.

웅족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비명을 삼켰다.

오른팔이 으스러지는 바람에 대검이 떨어져 땅바닥을 구르고, 대검에 응축된 이능파가 산개되었다.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팔을 없애면 되겠군.”

어둠 속에서 황금빛의 눈과 머리카락이 빛나는 게 보였다.

황지호였다.

“너, 너는……!”

“오랜만이다, 흉내꾼. 수치도 모르고 파렴치한 줄만 알았더니 겁도 없었구나. 아직도 백호의 흉내를 내서 대검을 쥐고 있었나? 그 어설픈 흉내질로 신역의 학생을 노려?”

입을 떡 벌리는 걸 보니 황지호가 이 수련회에 온다는 건 몰랐었나 보다.

하긴, 세상사에 무심해 태만하던 호족의 수장이 학생 신분으로 처놀고 있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긴 했다.

“그는 백호의 정식 제자가 아니다. 너는 백호에게 미치기는커녕, 그와 대련을 몇 번 했을 뿐인 인간에게 당한 거다.”

“인간? 이게 인간이라고!”

“곰이 짖는 소리는 불쾌하군.”

우드드득!

황금의 마력이 웅족의 왼발을 뭉개 버렸다.

황지호가 의도한 대로 웅족은 입을 다물었다.

맨정신으로 팔과 다리가 저 꼴이 되더라도 호족의 앞에서 비명을 참을 저 흉내꾼의 허세를 간파한 거다.

웅족은 더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증오 어린 눈으로 황지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흉내꾼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나!’

백호군의 흉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웅족 수장의 오른팔이라는 놈의 대검술은 스마트폰 너머로, 은련관에서 직접 마주한 백호군의 절기에 비해 형편없었다.

비슷한 점이라곤 대검을 들었다는 점밖에 없었다.

백호군에게 신역의 수인이라는 낙인만 없었어도 여기로 와서 참교육을 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황지호가 오기 전에 패 줬어야 했는데.’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마력으로 목을 옥죄어 숨통을 틀어막는 과격한 방법을 써서 웅족을 기절시켰다.

웅족이 완전히 기절한 걸 보고 광림을 해제해 회복 아이템으로 지혈하는 중,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피가 멎은 내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확인한 황지호가 말했다.

“……적호와 김신록 그리고 유희의 용과 합류하도록 하지.”

황지호가 마력으로 웅족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가며 앞서 걸었다.

“조의신, 이번 일이 끝나면 나와 나눠야 할 대화가 많을 거다.”

“……어떤 대화?”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물었다.

“하늘에서 천신의 빛이 내려 온 연유와 네가 사용한 백호의 힘에 대해서 말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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