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처서에 비가 오지 않으면 (2)
심야, 주오 아일랜드의 해변.
우기환 일당이 습격해 온 해안가는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넓게 펼쳐진 해변에는 바비큐 파티의 흔적도 없었고, 산책 중인 사람도 없었다.
유상훈은 파도 앞까지 걸어갔다.
여전히 날씨는 후덥지근했지만, 밤바다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찼다.
“앉자.”
유상훈이 리조트 로비에 비치된 냉장고에서 꺼내 온 페트병 음료수의 뚜껑을 열며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유상희나 장남욱이 저 모습을 봤다면 저렇게 대충 앉으면 모래투성이가 될 거라고 잔소리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지금 잔소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유상훈과 한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두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
“…….”
유상훈은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지만,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악몽을 꾸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 될까?
그럼 악몽의 내용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왜 내가 꾸게 한 악몽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지도 설명해야 하지 않나?
‘게임이나 전용 메뉴 스킬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어……!’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악몽을 꾸게 한 주제에 불성실한 태도인 것 같았다.
그런 태도를 보고 유상훈이나 장남욱이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할 것 같지 않았다.
“뭐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유상훈이 얼굴을 돌려 나를 보다 툭 한 마디 던졌다.
황지호가 모닝 티타임 때 지적한 대로 난 싸울 때가 아니면 표정을 잘 못 숨기는 것 같다.
“나나 장남욱은 그 꿈은 더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어?”
“다시 그 꿈을 볼 것도 아니니까 됐다고.”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유상훈이 피식 웃었다.
“그 개꿈을 너 때문에 꾼 거라 해도 상관없어. 그 개꿈이 현실이 되지 않은 건 너 덕분이잖아.”
상관없다.
그게 장남욱과 유상훈이 내린 결론인가 보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리플레이’ 기능의 정체를 안 이후로 자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숨쉬기도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유상훈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미안해.”
“됐다. 상관없다고 했잖아.”
유상훈은 정말 신경 안 쓰는 말투로 말했다.
손에 들고만 있던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유상훈이 물었다.
“뭐 스킬 같은 거 쓴 거야? 부작용은 없냐. 장남욱이 걱정하던데.”
“부작용은 잘 모르겠는데.”
“넌 악몽 안 꿨어?”
“난 원래 꿈을 안 꿔.”
“부럽네. 뭐 이능파가 뇌파에 영향을 줘서 플레이어는 꿈을 꾸기 쉽다잖아. 가끔 푹 못 자서 아침에 일어나기 짜증 나.”
그 뒤로는 평소에 학교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할 법한 시시한 이야기를 했다.
대화의 주제는 어느샌가 2학기에 있을 군사관학교와의 스포츠 교류전으로 바뀌었다.
군사관학교팀에서 농구부 대표로 뽑힌 1학년 학생 중에 도시후가 있다는 걸 알고 의욕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같은 1학년한테는 안 질 거야.”
“응원하러 갈게.”
“세 경기 다 와서 응원해라.”
두 경기를 연속해서 한 팀이 이기면 두 경기만 할 텐데.
유상훈은 세 경기를 다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나 보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슬슬 리조트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새카만 바다 저편에서 강대한 힘을 가진 무언가가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게 느껴졌다.
번쩍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뭔가 온다.”
“뭐?”
유상훈은 아직 감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나를 따라 무기 아이템 카드를 꺼냈다.
롯드를 꺼내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이능파가 눈에 몰리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훤하게 트였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성능이 향상하는 호족의 눈이 어둠 속에서 이능파의 흐름과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봤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이템을 쓴 건가? 아니면 스킬이나 광림? 그것도 아니면 이능파를 컨트롤해서 발판으로 삼은 건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느껴지는 힘의 위력을 고려해 봤을 때 상대는 진족 급의 힘을 가진 게 분명했다.
내가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황지호를 불러야 하나? ……어? 저 사람은…….’
안광 스킬로 상대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했을 때.
나는 롯드를 카드로 바꿔 아이템창에 집어넣고 디바이스를 켰다.
“뭐 해?”
“연락할 곳이 있어서.”
유상훈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무서운 속도로 접근한 누군가가 해변에 도달했다.
맨발로 바다 위로 달려온 누군가는 한 손에 슬리퍼를 들고 있는 게, 바닷가에 산책 나오기라도 한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여보세요? 함근형 선생님, 통화 가능하신가요?”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찾고 계신 분을 발견해서요.”
야심한 시각에도 수색을 진행 중이던 함근형 선생님은 금방 답했다.
그사이, 방금 등장한 인물이 유상훈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우리 반 애들 못 봤니?”
바다를 넘어오는 강대한 힘의 정체는 강한 담임 임연화였다.
임연화는 야생의 좀비가 된 제자들과 달리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 *
교사진들은 임연화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이계 공략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는 게 마음에 걸린 교사진들은 인근 무인도와 바다를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3학년 0반 학생들과 부트 캠프를 진행했다는 무인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우기환의 증언대로 완파된 식량고만이 남아 있었다.
불상사를 대비해 각 반의 담임과 부담임으로 구성된 2인 1조로 인근의 섬과 바다를 수색하던 교사진들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임연화를 발견했다는 조의신의 전화를 받은 함근형이 비행 스킬로 허공에 떠 있는 용제건에게 말을 걸었다.
“용제건 선생님, 돌아갑시다.”
“응, 갈까.”
밝게 대답하는 용제건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심야에 놀지 못하고 임연화를 찾아 돌아다니는 걸 몹시 귀찮아하는 눈치였는데, 어느 사이엔가 몹시 들뜬 눈치였다.
‘언제부터였지?’
수색을 시작한 지 1시간이 안 됐을 때.
용제건은 무언가 발견한 것 같다며 혼자 어디론가 날아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함근형이 사고하는 사이 용제건이 가볍게 손가락을 튀겼다.
딱! 파아앗!
용제건이 공간술로 사람 한 명이 올라갈 만한 공간을 만든 후 함근형에게 손짓했다.
“이동하자. 공간에 올라타.”
“감사합니다.”
용제건이 만든 발판에 훌쩍 올라간 함근형이 순간 멈칫했다.
용제건이 그 특유의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탓이었다.
‘……용제건 선생님이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지.’
저 황홀해하는 특유의 표정은 교사 사이에서도 악명 높았다.
유희계 용족인 용제건은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지만, 그 논다는 게 가끔 정도가 지나칠 때가 있었다.
용제건이 그 지나친 일을 벌일 때는 늘 저 표정을 짓곤 했다.
근속 년수가 긴 함근형은 이를 잘 알고 있어, 아이들의 안전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다짐했다.
* * *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임연화가 비어 있는 객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옷도 갈아입자 더욱 멀쩡해졌다.
그 모습은 강한 담임이 찾으러 온 줄도 모르고 아직도 뻗어서 자는 중인 3학년 0반 원시인 놈들과 비교되었다.
로비에 비치된 냉장고에서 수박 에이드를 꺼내 마시는 임연화는 여유가 넘쳤다.
“임연화 선생님,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응? 탈주병을 찾느라고 좀.”
“선생님들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하시던데…….”
“이계 공략 중에 태양열 충전 패널이 망가졌나 봐. 배터리가 다 됐어. 사진도 못 찍고 SNS도 못 하고 답답한데 내 귀여운 제자들은 보이지도 않고!”
귀여운 제자?
그 표현은 걸러 듣기로 했다.
교사진 중에선 가장 먼저 도착한 노영미가 물었다.
“……연화가 훈련을 맡은 애들을 놓치다니, 의외네. 우기환 학생도 많이 성장했나 봐.”
그건 나도 신경 쓰였다.
우기환 일당이 어떻게 저 강한 담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 걔들은 아직 한참 멀었어! 내가 놓친 건 그 뭐냐, 이계 공략하고 나니까 묘하게 몸이 무거워서 힘이 잘 안 나더라고. 좀 쉬니까 나았지만!”
동결형 이계를 공략하면서 영향을 받긴 받았나 보다.
임연화도 무적은 아니구나.
그런데 이능독에 중독되어도 그냥 좀 쉬면 저렇게 낫는 거였나?
플레이어나 진족의 재생 능력으로 중독 상태를 해제할 수 있다는 묘사는 있긴 하지만, 임연화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너무 늦게 자면 약해진다. 일찍 자!”
임연화가 담당하는 ‘진족의 이해1’ 수강생으로서 안면을 터서 그런지 임연화가 걱정스럽게 인사해 줬다.
대부분의 인류는 임연화보다는 약한 탓에 더 약해질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나와 유상훈이 각자 배정받은 플로어로 향했다.
등 뒤로 노영미와 임연화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0반 학생들 잡으면 뭐 할 생각이야?”
“응? 예정대로 할 생각인데.”
“예정대로?”
임연화가 밝게 말했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훈련을 계속해야지. 걔들이 이탈하는 동안 빼먹었던 부분까지 더해서.”
꿀잠을 자고 있는 우기환 일당이 들으면 미쳐 날뛸 소리였다.
* * *
리조트는 무사히 아침을 맞이했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 대부분이 노느라 밤을 지새운 가운데,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푹 자고 조식 시간에 정확히 맞춰 일어났다.
굶주린 원시인들이 밥 먹는 시간만 기다린 듯 눈 뜨기 무섭게 식당으로 돌진했고 그곳에서 원시인들의 총대장 강한 담임과 마주했다.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임연화와 눈이 마주치자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탈주를 시도했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임연화가 부트 캠프 속행을 원했기에 원시인 집단은 다시 무인도로 끌려갈 위기에 놓였다.
이를 말린 건 다른 교사진들이었다.
“수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저희 여행 일정 동안에는 쉬게 해 줍시다.”
“애들이 어제 우는 게 많이 불쌍했어요. 힘들었나 봐요.”
“연화야, 너도 좀 놀다 가.”
함근형 선생님, 김신록에 이어 임연화와 친분이 있는 듯한 노영미도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연화도 꺾였다.
“음, 지화 언니도 말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잠깐 쉴까!”
새로 지급받은 디바이스로 임지화와 연락한 임연화가 휴식을 결정하자 3학년 0반 놈들이 안도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런 와중에도 우기환의 눈이 조용히 가라앉은 게 틈을 봐서 탈주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를 눈치챈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대신, 주오 아일랜드 밖으로는 도망치지 말고 놀아. 걸리면 혼나.”
그 혼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도 우기환이 바로 눈을 깔고 강자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저 3학년 0반은 힘의 논리가 집단을 지배하는 원시 사회인가 보다.
“그 부트 캠프라는 걸 하는 동안에는 일정을 파악하기도 어렵고 접선하기 힘들지. 저들이 여기 머무는 동안 말을 잘 맞출 생각이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황지호가 그렇게 덧붙였다.
동결형 이계를 목격하고 공략한 이들의 입을 막는 작업이 필요하긴 할 거다.
‘저 모습을 보니 임연화한테만 말을 잘하면 우기환도 잘 따를 것 같네.’
한편, 일련의 사태를 목격한 우리 반 애들이 심상치 않은 태도를 보였다.
“……3학년 0반 분들은 사이가 좋네, 부럽다.”
“굉장히 힘든 훈련을 하시는 것 같은데 한 사람도 안 빠졌어요!”
“방학 내내 같이 계셨나 봐.”
“다 같이 훈련하면 재밌겠네.”
반 아이들이 3학년 0반 선배놈들을 부러워하다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부러워할 요소라곤 출석률 정도밖에 없는데.
3학년 0반 선배놈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놈들이 있긴 했다.
“……저게 부럽냐?”
“전 지금으로도 만족합니다. 너무나 과분하게 행복한 상태입니다.”
송대석과 목우람이 각각 민그린과 권레나를 흘끗거리는 게 보였다.
저 두 놈은 두 사람만 있으면 만족하는 모양이다.
“다른 애들은 뭐 하는 중일까?”
김유리가 혼잣말을 하듯 말하자, 황지호가 답했다.
“한 명의 행방은 확실히 알고 있다. 너희도 얼굴을 봤을 가능성이 있어.”
“응? 진짜? 누군데? 걔는 뭐 해?”
“알려 주세요!”
권레나와 사월세음이 디저트로 나온 코코넛 팥빙수를 먹다가 멈추고 물었다.
황지호는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플레이어 대상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플레이리스트’ 홈페이지가 떠 있었다.
황지호는 이어서 영상을 하나 재생했다.
“1학년 0반 학생이 심사를 통과해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것 같군. 아직 예선전이 방영되진 않았지만 미리 학교에서의 일상생활 모습은 촬영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
황지호가 재생한 영상 속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의 패왕, 독고미로가 춤을 추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