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 번째 시도 (8)
여태까지 차원 이해도가 상승한 적은 총 네 번 있었다.
첫 번째,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초상 우주와 대화했을 때.
두 번째, 12지 동맹의 회담에 동석하였을 때.
세 번째, 스승의 날 즈음 금찬솔과 왕찬솔로부터 이능파 링크를 통한 이계 지배의 원리에 관해 들었을 때.
네 번째, 신인과 청호가 현재 인간이 되어 공청훤과 한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네 경우, 전부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레벨이 상승하였다.
‘지금은 전용 메뉴가 아닌 리플레이의 단계가 상승했지. 리플레이에 관한 단서를 알아내서 그런 건가.’
메뉴의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새로운 기능이 개방되었다.
그렇다면 리플레이 쪽에도 뭔가 달라진 점이 있지 않을까?
그 생각에 미치자 바로 메뉴를 불러 리플레이 기능을 확인했다.
[리플레이]
다른 차원에 게임의 형태로 새겨진 미래, 기록을 꿈으로 재현한다. (2단계)
단계가 올라갔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추가되지 않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한 건 리플레이를 사용해 목록을 열었을 때였다.
‘이름 뒤에 숫자가 추가된 캐릭터가 있어. 리플레이 질문이 떴던 이벤트에 등장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나 NPC들 뒤에 숫자가 추가된 것 같은데.’
체스판처럼 배열된 캐릭터 목록 중, 숫자가 표시된 캐릭터가 있었다.
숫자는 대부분 세 자리였다.
그러나 그중에는 드물게 한 자리도 있었다.
‘제갈재걸은 한 자리고, 용제건을 비롯한 대부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세 자리야. 이게 무슨 차이지?’
‘리플레이’라는 항목과 둘을 엮어서 생각해 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이건 설마…… 리플레이 여부를 묻는 질문이 나오는 이벤트에서 내가 리플레이한 횟수인가!’
제갈재걸의 경우, 리플레이가 뜨는 이벤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벤트는 중앙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발생하는데, 결말은 다르다고 하나 플마고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발생한 사건이었다.
최편득의 추종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교지 편집부 학생들이 중간고사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양심의 얼룩’이 심어졌을 때의 일이었다.
최편득의 추종자들은 교지 편집부 학생들을 인질로 잡고 제갈재걸이 저주를 짊어지라며 협박했다.
제갈재걸은 이에 바로 응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건 제갈재걸을 이동시키는 것뿐이었다.
제갈재걸은 제자 대신 저주를 받기 위해 앞으로 걷는 것밖에 하지 않는다.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 화면을 터치해도 무반응이고, 광림도 스킬도 사용이 불가능했다.
제갈재걸의 팬들이 선생님이 죽는 건 못 보겠다면서 대부분 여기에서 강제 종료하고 게임을 삭제해 버렸다.
헛된 희망을 품고 계속 그 장면을 지켜보면, 제갈재걸이 저주를 뒤집어쓰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게 된다.
그 직후 리플레이를 하겠냐고 묻는 메시지창이 떴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 해 봐도 아무 커맨드가 먹히지 않아서 강제 이벤트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몇 번 밖에 리플레이하지 않았는데…….’
반면, 용제건은 여지가 있었다.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당시, 용제건은 ‘교원 계약’ 제약이 걸린 것 외에는 다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은광고 외곽에 데려다 놔도 용제건은 지금 밖으로 나가기 싫다며 탈출을 거부했다.
‘그럼 탈출이 아니라 버티기나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제갈재걸 때와 달리 이동도 할 수 있고, 제약이 있긴 하지만 스킬이나 광림도 쓸 수 있으니 살릴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연말 내내 플레이했었지.’
리플레이 횟수는 다르지만, 결국 둘 다 구하지 못했다.
제갈재걸과 용제건 뒤에 쓰인 숫자를 보며 멍하니 있을 때, 내 앞으로 불쑥 붉은 차가 담긴 찻잔이 내밀어졌다.
황지호가 김신록과 내 앞에 새로 달여 낸 홍국쌀차를 건네고 있었다.
“조의신, 안색이 나빠졌군. 그 리플레이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김신록이 깨어나고 말을 마칠 때까지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는데.”
황지호의 말에 호랑이들의 시선이 김신록 쪽에서 내 쪽으로 쏠렸다.
“뭐가 있었나? 말해 봐라.”
아직 리플레이의 모든 게 해명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랐다.
리플레이에선 특정 캐릭터를 선택할 때에는 ‘현재 단계에서 선택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떴다.
이 말은 단계가 오른다면 선택할 수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리플레이의 단계가 올랐어. 사용 가능한 대상이 늘었을 거야.”
“……그렇군.”
황지호에게 사용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쓸 수 있을 거다.
당장 시험해 보려 했으나 황지호가 엄포를 놓았다.
“당장 시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적어도 며칠은 사용을 금한다. 정신적인 폐해는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니다.”
리플레이를 사용하면 나는 둘째치고 상대가 영향을 받는다.
손민기 같은 놈에게 사용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상대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김신록한테 쓴 것처럼 준비를 하고 쓰고 싶으니 호족의 도움을 계속 받을 필요가 있었다.
며칠 쉬라는 말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조력자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따를 생각이군. 잘 생각했다.”
왕왕!
노친네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투를 쓰는 건 별로였지만 착한 올무가 나를 칭찬했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뒤로는 잠시 티타임을 가졌다.
나는 올무를 쓰다듬어 주며 마음을 풀고, 적호는 김신록을 상대로 잔소리를 했으며 황지호는 그 옆에서 계속 몇 마디 거들었다.
찻잔이 바닥을 보이고 적포도도 몇 알 남지 않았을 때 황지호가 말했다.
“그럼 긴 꼬리의 단서에 관해 이야기해 주마.”
황지호 앞에 홀로그램이 두 개 전개되었다.
하나는 우족, 하나는 사족을 감시한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였다.
‘……둘 다 묘해.’
우족이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고위직 인사와 접촉했다.
한편, 사족은 TC 그룹과 남궁 그룹과의 접선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보고서에는 우족과 사족의 이러한 움직임이 ‘근 20년간 없었던 일’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누가 배신자인지, 혹은 배신자가 아닌지 걸러 낼 수 없어.’
황지호도 나와 같은 의견인 듯했다.
“둘 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으니 거슬리는군.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네가 알아 두는 게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앞으로의 시나리오상 협회에도, 4대 그룹에도 흑막이 개입한 사건이 터진다.
우족, 사족 양쪽 다 아직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기숙사 내 방.
황명호 대저택에서 저녁을 먹은 후 늦게까지 머물다 왔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수험 스트레스에 지친 은서호와 은이호 그리고 형과 누나가 바빠서 쓸쓸해하던 은재호가 놀아 달라는 걸 거절하고 그냥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던 중에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들었다.
―늦은 시각인데 굳이 기숙사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은호의 후예들을 방에서 재우고 나가려 하니 황지호가 물었다.
‘끄응…….’ 하고 작게 울며 붙잡는 올무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돌아가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하려면 혼자 있는 게 나을 거야.’
기사 시절, 다음 수를 떠올릴 때 항상 정신적으로 민감해져 가족에게 날 선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았다.
또 주변에 누가 있는 것에 익숙해지면 혼자 있는 게 힘들어진다.
그러니 호랑이 저택에 머무는 시간은 가능하면 줄이고 싶었다.
―가 볼게.
―……알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오늘은’이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기숙사로 별문제 없이 돌아왔다.
‘아, 그러고 보니 김신록이 나한테 할 말이 있던 것 같은데.’
적호가 나와 김신록이 대화하는 걸 철저하게 방해해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듣지 못했다.
들으나 마나 또 리플레이를 써 달라느니 그런 내용이었겠지만.
딩동.
자기 직전, 디바이스 메시지가 도착한 게 보였다.
[도시후] 뭐 해?ㅎㅎ
갑자기 이놈은 밤 중에 뭔 소리를 하는 걸까.
장남욱은 오늘도 장문의 메시지로 잔소리를 한 거 보니 딱히 장남욱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급한 용건은 아닌가 보네.’
도시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하기 전에 다른 메시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방금 도착한 메시지 외에도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거의 다 학생 대표 회의 관계자로부터 온 거구나.’
정식으로 취임한 건 아니지만, 학생회장 업무를 시작하게 된 염준열의 포부.
지익회장 성시완이 앞으로 계이담을 잘 부탁한다며 남긴 인사.
선도부장 오혜지와 차기 선도부장 천동하의 인사와 선도부 입부 방법을 간략히 소개한 간접적인 권유.
선배들의 메시지에 답변을 모두 했을 때, 새 메시지 알림이 도착했다.
[이레나] 의신아, 지금 메시지 할 수 있어?
나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답변을 보냈다.
[나] 어, 괜찮아.
[이레나] 그게, 있잖아…… 내일 세음이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같이 있어 줄 수 있어?
[이레나] 권제인 선배님께도 부탁드리긴 했는데, 세음이가 권제인 선배님을 불편해할 것 같아서…….
권레나는 내일 사월세음에게 환몽 경매 건을 이야기할 생각인 것 같았다.
당연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가야 했다.
수업 시간에 불러내더라도 째고 갈 생각이었다.
[나] 내일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돼?
[이레나] 수업은 빠지고 오후 늦게 학교로 갈 생각이야.
권레나는 담담하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얼마나 열심히 생각하고 용기를 냈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권레나가 메시지로 보낸 장소와 시간을 몇 번이나 재확인하고 메시지창을 닫았다.
‘그런데 [이레나]라……. 언제쯤 권레나로 수정할 수 있을까.’
디바이스 주소록에 등록한 이름을 ‘권레나’로 바꿀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 건에 관해선 권제인과 권레나의 가족사가 깊게 얽혀 있으니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한정되어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내일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시뮬레이션해 볼까.’
사월세음과 권레나, 둘 사이를 억지로 화해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두 사람이 오해가 남지 않도록 거들 생각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곱씹는 사이 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에 도착한 메시지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보낸 메시지였다.
[성국언] 후배야.
1 대 1 메시지였다.
성국언은 바쁜 와중에도 나나 성시완에게 가끔 말을 걸곤 했는데, 늘 단체 메시지방을 이용했다.
‘성시완이 있는 단체 메시지 방을 피해 성국언이 말을 걸었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설마 그걸 찾았나!’
저번에도 성국언이 단체 메시지 방 대신 1 대 1 메시지로 말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 성국언은 ‘이무기의 귀천’을 언급했다.
[성국언] ‘이무기의 귀천’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예상대로의 화제가 나왔다.
홍경복이 파문한 제자들과 브로커에 의해 해외로 팔려 간 이무기의 귀천.
그 위치가 드디어 밝혀진 듯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