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3)
황호가 청룡에게서 디바이스를 건네받고 조의신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한 직후.
조의신에게 다시 연락해 보았으나 예상대로 받지 않았다.
‘영국이라고……?’
그 단어 하나에 황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스쳐 갔다.
용제건과 함께 용족의 영역으로 향한 조의신.
황호 자신이 날렸던 무수한 메시지들.
자신의 분신 앞에 앉아 무언의 압박을 주며 차를 마시는 은호.
조의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며 몰래 파티를 준비하는 1학년 0반 아이들.
여러 생각으로 복잡한 기분이 들었으나 황호는 표정을 숨겼다.
눈앞에는 12지 동맹의 일각 용족의 수장이 있으니까.
‘동맹 관계라고 하고 용족이 뒤에서 수작을 부리더라도 틈을 보일 수 없다.’
힘의 균형 관계는 서로 대등할 때 유지되는 법이다.
후예 팔불출이 되어 그 위엄이 손상되었다고 하나 어쨌든 무수한 신화와 전설을 남긴 청룡을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황호는 청룡이 내민 조의신의 디바이스를 받아들이며 말했다.
“잘 받았다. 호족의 은인이 신세를 졌군. 심부름하느라 수고했다, 청룡.”
황호는 기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대신 다른 것을 생각했다.
조의신이 용족의 은인이 된 계기와 과정에 관해서.
그리고 그 일이 호족과 용족의 관계에 미칠 영향과 자신이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해서도.
“조만간 말이 새어 나갈 테니 미리 말해 두지. 이번 사건으로 우리 준열이와 용제건이 노려졌다.”
“그건 알고 있다.”
“그래, 그러니 네 지시를 받고 은광고의 교사가 그 장소에 제 시각에 왔겠지. 이번 건으로 창천명궁과 무명의 초신성뿐만 아니라 호족에게 빚을 진 셈이다.”
황호는 청룡의 의도를 읽고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청룡은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용족은 우리를 습격한 용살자 카드모스의 신변을 확보했다. 카드모스는 우리와 다른 땅과 신화 체계 속의 존재라고 하나 용족인 데다 용살의 신화를 가지고 있어 취급이 매우 곤란하다.”
“그렇군. 신변을 확보해도 계속 잡아 두는 게 수고스럽겠군.”
용과 상극인 존재를 용이 붙잡아 둔다.
이 행위는 마치 불꽃을 얼음의 벽 안에 가둬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
언제 불꽃이 타올라 얼음을 부수고 녹여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처음에 청룡은 인간인 용왕신의 무녀들에게 카드모스를 맡길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호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하면, 용족 내부의 배신자는 용왕신의 무녀 중에 있다고 했지.’
이번에 황호가 그 자리에 함근형을 파견한 건으로 인해 용족은 호족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용족은 내부에 배신자가 있음을 알아챘을 가능성이 컸다.
‘조의신은 용족의 은인이 된 입장이고 은호가 알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러니 용왕신의 무녀가 카드모스를 맡는 걸 저지했겠지.’
이 사실과 용족과 친한 호족의 구성원을 동시에 떠올렸다.
황호는 청룡이 어떤 제안을 하려는지 예측해 입에 담았다.
“심문 과정에 호족의 후예, 김신록의 힘을 빌려달라는 건가? 또 빚을 질 생각인가 보군.”
김신록이 고문에 능통하다는 건 용족도 잘 아는 사실이다.
거기에 용족은 오랜 기간 김신록을 용제건의 친우로서 알고 지냈기에 더 믿음이 갈 거다.
“그렇다. 말이 잘 통하는군.”
청룡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황호는 호족의 수장으로서 생각을 정리해 신중히 말을 골랐다.
“김신록은 용족이 아니라고 하나 용살자 카드모스는 위협적인 존재다. 김신록을 함부로 파견할 생각은 없어. 김신록이 수락한다 한들, 이렇게 빚을 지면 어떻게 청산할 생각이지?”
“……놀랍군.”
황호의 말에 청룡이 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놀라워했다.
황호는 자신의 말에 이상한 점이 있는지 되짚어 봤지만, 실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청룡이 직접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있기로 했다.
황호의 생각대로 곧 청룡이 놀란 이유를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용족의 은인이 만약 황호 자네가 그런 말을 한다면, 제안해 달라고 한 게 있었네.”
조의신이 황호가 이런 말을 할 것까지 예상했단 말인가?
황호가 캐묻기 전에 청룡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만약 황호 자네가 그럴 생각이 있다면, 나와 황룡이 자네가 지목하는 호족에게 용새(龍璽)를 허락하겠네.”
이번에는 황호가 놀랄 차례였다.
청룡과 황룡의 뼈로 만든 용족의 용새(龍璽)를 허락한다는 것.
그 의미는 용족, 용족의 후예, 용족의 권속, 용왕신의 무녀가 아닌 다른 존재의 용궁 출입을 허가한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 용새(龍璽) 없이 용궁의 출입을 위해선 상위 존재 용왕신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이는 청룡과 황룡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
“……용족이 아닌 다른 진족에게 용궁의 출입 허가를 내릴 생각인가?”
“다른 진족이 아니라 용족이 빚을 진 호족이 아닌가.”
청룡의 말은 평소보다 공손했다.
황호는 용족의 폐쇄적인 성향과 청룡의 오만함을 잘 알기에 지금 이 상황과 청룡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용제건과 우리 준열이의 목숨을 구했고, 어쩌면 용족의 흥망과도 연관된 배신자 색출에 도움이 필요하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떤가?”
“이 자리에서 곧바로 정할 사항은 아닌 것 같군. 김신록의 의사도 확인해 보겠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네.”
황호는 바로 확답을 하지 못했지만, 조의신의 안배를 통해 걸린 제안이니 김신록만 고개를 끄덕이면 결국 수락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공항, 그것도 붉은 사자의 전용기 앞까지 가 조의신을 설득해 보려 했다는 김신록이 돌아왔다.
김신록은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조의신을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군. 용족의 대접이 시원치 않았나?”
“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방문한 탓에 용족과 사이가 좋은 편인 김신록이 바로 당황하며 부정했다.
김신록은 저 바다 밑 용궁까지 가 본 적은 없지만, 용족의 영역 안에 아예 침소가 있을 정도로 그들과 친한 사이였다.
‘또 용제건이 장난질을 했나 보군.’
김신록을 배웅 온 용제건의 얼굴이 몹시 황홀해 보인 걸 보니 상황이 대충 짐작되었다.
조의신을 배웅 갔다가 묵게 된 것도 그렇고, 중간에 용제건이 작당을 부린 게 분명했다.
김신록의 보고를 듣다 보니 확신이 들었다.
“……조의신은 성국언 국회의원과 전무영 수석 보좌관과 영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성국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황호는 혀를 차고 싶어졌다.
용제건이 옛 사제 관계인 성국언과 김신록을 두고 얼마나 재밌어하는지 잘 알았던 탓이다.
황호는 김신록을 배려해 성국언에 관해 깊게 캐묻지 않으며 담담하게 보고를 들었다.
‘조의신은 성국언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직접 나설 정도의 일에 연루되었나 보군. 그래서 쉬지도 못하고 출국하게 된 거겠지.’
성국언은 우수한 플레이어이자 국회의원이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정치가가 아닌 플레이어로서의 행보인 듯했다.
국회의원이 해외 순방을 가는 건 흔한 일이지만, 어떤 언론에서도 성국언의 출장 여부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성국언의 이름이 걸린 SNS 홍보 계정에도 해외로 나간다는 이야기는 한 줄도 없었다.
‘조의신의 생일 즈음에 성국언과 약속이 있다는 게 이번 일이었나 보군.’
그렇다면 이제 파악해야 할 것은 약속의 정체였다.
황호의 의문은 얼마 안 있어 해결되었다.
조의신이 출국한 이후 해외 토픽 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빅 벤에 뜬 거대한 예고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용이 되지 못한 천재의 산물을 대중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마족의 궁전에 왕림하겠다.]
언론은 이 예고장을 보낸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괴도 네온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의신이 형이 괴도 네온과 엮였군요. 적벽괴도라는 별명이 붙었을 때부터 이 아이와 의신이 형이 다소 이르게 엮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괴도 네온이 누구인지 아나?”
“네. 신상은 자세히 모르지만, 어떤 인물인지는 알아요.”
“그 게임에 등장했었나 보군.”
은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삼가는 모습에 황호는 그 인물이 게임 속에서 그리 밝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황호는 그 게임에 관해선 잘 알지 못하나 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괴도 네온의 정체를 추측해 보기로 했다.
“은광고 소속일 가능성이 있다.”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작은 손을 놀려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은광고 신문부 문새론이 작성한 만우절 특집 기사가 떠 있었다.
“신문부의 부원이 취재하는 걸 본 적 있다. 만우절 날 은광고의 정문 시계탑에 한 장난질과 상당히 유사하군.”
“그렇다면 괴도 네온은 은광고 소속 학생이겠군요. 어린 인간이었으니까요.”
“0반 소속이겠군.”
“그렇겠죠.”
은광고 이사장으로서 학교 학생이 해외 토픽의 주인공이 된 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호는 등교하지 않는 중인 0반 학생들의 명단을 떠올려 봤다.
전원 괴도 네온이 날린 예고장 정도는 충분히 만들 괴짜들이라 프로필 만으론 그들 중 누가 괴도일지 추려 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다른 것을 추리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 용이 되지 못한 천재의 산물은…… ‘이무기의 귀천’이겠군.”
“민그린의 첫 작품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조의신이 그 그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의신이 형이 무리해서 영국으로 간 이유로 충분하네요.”
은호는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의신이 형은 이미 계획을 짜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겠죠. 잘못 개입했다가는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지금 가는 건 좀 늦겠군.”
지금 가서 같이 탈환 작전을 수행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두 호랑이는 그렇게 판단했다.
“왜 의신이 형이 황호 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요?”
“…….”
“황호 님, 혹시 의신이 형한테 황호 님의 능력에 관해 설명한 적 있나요?”
은호의 지적에 황호는 예전에 조의신에게 약점 비슷한 걸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진 권능의 한계에 관해서였다.
“맞나 보네요. 의신이 형은 황호 님이 가진 권능의 한계를 배려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거예요.”
황호는 은호가 질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은호는 조금 기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신이 형을 신뢰하시나 보네요.”
은호는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손을 자주 뻗는 다과를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황호 님의 본신이 한반도를 떠나면 분신의 사고에 부하가 걸리기 쉽죠. 제가 그 사고를 대신할게요. 다녀오세요.”
그리고 황호는 조의신을 마중 갈 준비를 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전용기를 준비했다.
또 한반도가 11월 1일이 되는 순간 바로 조의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파티를 준비하던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했다.
조의신이 영국에 있으니 마중 가자는 제안에 0반 아이들이 기꺼이 응했다.
“미로 의신이 생파에 올 수 있대?”
“응! 아까 연락해 봤는데, 괜찮다고 했어. 다음 주부터 원래 등교할 생각이었다더라.”
독고미로에게 플레이리스트의 우승자에게 보장된 꽃길은 닫혔지만, 독고미로는 아직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플레이리스트 종방 후, 독고미로는 신중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연습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반 아이들에게 말한 대로 플레이리스트가 끝났으니 등교도 시작할 예정이라 한다.
“아, 한이야. 금찬 선배님이 보내 주신 이카로스 에어 호텔 베어커리 카탈로그 봤어? 케이크에 미러 글레이즈 추가도 되던데.”
“…….”
“아직 못 봤으면 저랑 같이 봐요!”
“……어? 어.”
한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반 아이들과 카탈로그를 응시했다.
‘한이가 집중하지 못하는군.’
한이는 얼마 전 독고미로의 홈마 정해온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 계속 기운이 없었다.
정해온은 독고미로의 팬이라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황호는 정해온과 한이의 만남을 저지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
황호는 한발 물러나 한이와 독고미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1학년 0반 전원이 모여 조의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용기에 올랐다.
펑! 퍼퍼펑!
“의신아, 생일 축하해!”
“해피 버스데이!
“야, 축하한다.”
조명의 빛과 꽃가루를 뒤집어쓴 조의신이 멍한 얼굴을 했다.
머리 좋은 조의신이니 어쩌면 이 상황을 예상하고 여유롭게 받아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황호의 예상이 빗나간 것 같았다.
조의신이 축하해 줘서 고맙다고 답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