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4)
꽃가루가 머리에 앉았는데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마족의 핼러윈 파티에 참석해 매물로 올라온 투어허 데 다넌의 신보를 얻은 것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영국까지 황지호가 전용기를 끌고 왔고, 그 안에 우리 반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이 온 이유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고…….
사고의 정리가 잘 안 됐다.
정신을 들게 한 건 착용 중인 이어링에서 들린 디바이스 메시지 수신 알람음이었다.
‘딩동’ 하는 알람음이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메시지를 보내는 중인 듯했다.
“부반장 디바이스 울린다.”
“의신아, 받아 봐!”
근처에 서 있던 맹효돈이 알람 소리를 들었나 보다.
김유리는 마치 내가 무슨 메시지를 받았는지 아는 것처럼 나를 재촉했다.
떠밀리듯 홀로그램을 전개하자 계속 쌓여 가는 메시지가 보였다.
전부 내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들이었다.
[유상훈] ㅊㅋ
유상훈의 짧은 축하 메시지.
[장남욱] 의신아, 생일 축하한다. 참고로 지금 나는 자는 중이고, 이건 예약 메시지야. 새벽 훈련에 참가하려면 일찍 자야 해서 간략하게 마무리할게. 훈련이 끝나면 다시 축하 인사를 할 예정이야.
아, 시후도 축하한다고 전해 달래. 축하 인사는 직접 말하는 거라고 했더니 시후 말로는 의신이는 자기 메시지 확인 잘 안 한다고 하던데? 의신이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시후가 불쌍하니까 가끔은 받아 주면 어떨까. 아마 지금 메시지 보냈을 거야.
장남욱의 길고 긴 축하 메시지.
그 뒤로 도시후가 보낸 듯한 축하 메시지도 있긴 했는데 일단은 넘어갔다.
[박승현] 생일 축하해.
[성시완] 의신아, 생일 축하해. 국언이 형하고 해외에 나갔던 일은 잘 마무리됐어? 기숙사에서 보자.
[금찬솔] 수상한 부반장님, 님네 반 애들 사이 좋더라? 생일 ㅊㅋ
[왕찬솔] 생일 추카염ㅊㅊㅊ
그 외에도 문새론을 비롯한 신문부의 부원들, 동급생과 선후배 가릴 것 없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 인사를 한 건 대부분 은광고 사람들이었지만, 홍규빈처럼 은광고 밖에서 만난 사람도 존재했다.
방금 막 헤어졌던 성국언, 전무영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또 인간이 아닌 이들로부터 온 축하 메시지도 있었다.
수험 준비로 바쁠 은서호, 은이호와 막내 은재호가 보낸 축하 메시지였다.
[은서호] 의신이 형, 생일 축하해요!
[은이호] 생일 축하드려요! 같이 생일 파티 하고 싶었는데 바쁘시다고 들었어요ㅠㅠ 다음 주말에 놀러 오시면 안 돼요?
[은서호] 예습 복습 열심히 해서 시간 비워 둘게요 ㅠㅠ
[은재호] 의신이 형, 생일 축하해요. 기다릴게요.
[은재호] (사진)
은재호가 보낸 사진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진에는 여러 빛깔의 색이 담긴 고깔모자를 쓴 천재? 아니, 천사가 찍혀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우리 올무가 사진 속에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내가 생일이라는 게 느껴졌다.
사진 정보에 떠 있는 날짜와 시각은 11월 1일 0시로 되어 있었다.
‘지금 전용기는 날짜 변경선을 넘지 못했지만, 한국은 이제 막 11월 1일이 됐지.’
다들 11월 1일, 내 생일이 되자마자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하는 잠시 동안, 우리 반 아이들이 들뜬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반 아이들이 착한 아이들이긴 했지만, 다들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고맙다고 인사하자 반 아이들은 쑥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또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반 아이들이 안내해 주는 대로 생일상 정중앙에 앉자 아이들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가 잘 보였다.
초콜릿 시럽으로 체스판을 그린 케이크였는데, 초콜릿을 제외한 부분은 전부 오렌지 베이스였는지 오렌지 향이 물씬 났다.
내가 자리에 앉자 황지호가 캔들 라이터로 체스 피스 모양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초는 총 여덟 개로, 큰 초 한 개와 작은 초 일곱 개.
17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숫자였다.
‘열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받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 세계의 오기 전, 17세였던 나는 생일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11월에 이르자 언론의 관심은 다소 식었지만, 입학 초에 나 때문에 홍역을 치른 같은 반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체스 대회 상금, 방송 출연료 등을 노리고 나를 맡았던 친척들이 체스를 그만둔 나를 위해 생일을 챙겨 줄 리도 없었다.
그런 경험이 있던 탓일까, 17세의 생일을 축하받을 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까지 오는 거 힘들지 않았어?”
“의신이는 여태까지 우리 생일 다 챙겨 줬잖아.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네, 의신이가 더 먼 곳에 있어도 왔을 거예요!”
김유리와 사월세음의 말에 이어 권레나가 덧붙였다.
“하하, 의신이 생일은 디폴트 닉네임만 봐도 알겠더라. 유리가 말해 줄 때까진 사실 몰랐지만.”
“jo2god111이 뭐냐. 혹시 초딩 때 만든 아이디 아니냐? 완전 유치…….”
“대석이 아이디는 더 유치하잖아.”
송대석이 신랄한 말을 끝마치기 전에 민그린이 내 편을 들어 줬다.
……나도 송대석 말대로 그 ID는 유치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손에 익은 걸 바꾸긴 은근히 힘들었다.
예전 세계에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쓰던 ID다 보니 어쩐지 바꾸기 힘들었다.
“나도 부반장 생일 파티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저번 버스킹 때 쟤가 힘써 준 것도 있고, 이런 자리가 있으면 꼭 축하 인사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 이곳은 엄밀히 따지면 10월 31일이 아닙니까? 아직 시간선을 넘지 않았으니까요.”
“기국주의(旗國主義)에 근거하면 그렇지도 않지. 항공기, 선박에도 소속국이 존재해. 이 비행기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그러니 여기도 한국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그건 국내법 적용 여부를 가릴 때 쓰는 법칙 아닌가?
하여튼 황지호는 지금 상공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내 생일인 11월 1일이라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다.
“또 조의신의 국적은 한국인이니 한국의 날짜와 시간을 기준으로 축하하면 문제가 없어. 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자. 조의신, 끝나면 잊지 말고 촛불을 끄도록.”
황지호는 마치 생일 파티를 처음 하는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조언하듯 말했다.
그 뒤로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 생일 축하 노래에는 무려 생음악 반주도 있었다.
권레나가 이능 바이올린을, 목우람은 초등학교 준비물로 가져갈 법한 멜로디언을 꺼내 반주를 했는데 그 짧은 곡에 애드립을 넣어 멋진 연주로 승화했다.
노래를 마친 후, 내가 촛불을 불어서 끄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쩐지 겸연쩍은 기분이 계속 들었지만, 우리 반 아이들의 마음이 고맙고 기뻤다.
“그러면 케이크 자를게.”
“응! 아, 저기 화이트 초콜릿 플레이트에 의신이 이름 쓰여 있어. 저 부분은 의신이가 먹어.”
반 아이들의 요청대로 케이크를 자르고 하나하나 접시에 올려 아이들에게 건넸다.
초콜릿이 가장 많이 올라가 달 것 같은 부분을 유독 조용했던 한이한테 건네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케이크 분배를 마쳤다.
아이들이 직접 골랐다는 오렌지맛 케이크를 두 조각째 먹으며 잡담을 하다 보니 문득 아이템창 안에 있는 어느 UR급 아이템 카드의 존재를 떠올렸다.
‘……우리 반 아이들도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말하는 게 좋겠지.’
입수 경로가 복잡한 만큼 이 자리에서 그걸 공개해도 괜찮을지 잠시 망설여졌지만, 결국 그걸 이 자리에서 꺼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게다가 여기는 황명 그룹의 전용기 안 아닌가.
보안 상태는 완벽했고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믿었다.
‘허투루 말을 퍼뜨릴 아이들이 아니야.’
아이들의 말소리가 잦아들 때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영국에 온 이유 말인데.”
운을 떼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반 아이들이 그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는데 궁금했었나 보다.
황지호가 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대로 하라는 듯 케이크를 말없이 먹기만 하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나는 아이템창을 열어 UR급 아이템 카드, ‘이무기의 귀천’을 꺼냈다.
‘이무기의 귀천’은 세관에 걸리지 않고 통과하는 방법이 있으니 사전에 맡겨 달라고 부탁한 상태였다.
카드를 꺼낼 땐 그냥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보던 민그린이 카드의 표면을 보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그린이 자신의 작품을 알아본 것이다.
“……‘이무기의 귀천’!”
“이걸 어디에서 찾은 거지?”
“잠깐, 저거 아이템 카드잖아?”
“그것도 UR급 아이템이에요! 와……!”
“아, TV에서 도난당한 작품이라고 보도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작품이니 카드화가 돼도 이상하지 않죠.”
민그린의 반응을 보고 이게 진품인 걸 확신했는지 아이들이 다 놀라워했다.
“이걸 되찾으려고 영국에 간 거구나, 말해 줬으면 나도 도왔을 텐데!”
“저도요!”
“부반장 저 새끼는 왜 말을 안 하냐.”
반 아이들은 기쁨 반, 아쉬움 반 섞인 얼굴로 말했다.
민그린은 감격에 찬 얼굴로 연신 ‘이무기의 귀천’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송대석은 기뻐했지만 민그린이 지나치게 기뻐하고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 걸 보고 기쁨이 다소 가신 듯했다.
‘……지금 돌려주긴 어렵겠지만.’
당장이라도 민그린에게 ‘이무기의 귀천’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그림에는 플레이어 협회의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가 남아 있었고, 아직 나는 그걸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아직 이 그림에 관해 얽힌 일이 있는데 잠깐만 내가 이 그림을 맡고 있으면 안 될까?”
“어……?”
내 말에 민그린은 당혹스러워하다 고민에 잠겼다.
민그린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이 그림에 얽힌 일이 뭔지 나와 사부님한테 알려 줘. 그럼 너한테 맡길게.”
“……괜찮겠어?”
“응. 미술관에 맡기는 거보다 너한테 맡기는 게 안전할 것 같기도 하고.”
이번 건은 흑막과 마족이 얽힌 일이니 안전하지 않다.
그래도 이무기의 귀천의 작가인 민그린에게 알 권리가 있지 않을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그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사부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릴게.”
민그린의 허락하에 ‘이무기의 귀천’을 살필 기회를 얻었다.
* * *
공항에 도착해 우리는 월요일을 대비해 일찌감치 해산했다.
그렇게 표현은 했지만 비행하는 내내 함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생일 파티를 했으니 일찍 해산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난 곧바로 기숙사생들과 기숙사로 향하려 했는데, 황지호의 말에 발을 멈췄다.
“은호가 널 기다리고 있다.”
“……은호가?”
은호를 떠올리니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내 생일을 매번 챙겨 주던 천성헌 시절의 은호가 떠올랐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본신이 한반도 밖으로 나오면 분신을 정밀히 다루는 게 힘들지. 그래서 은호가 내 일을 도왔다.”
황지호의 덧붙인 설명에 은호가 걱정되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호족의 수장이 하는 일을 돕는다고?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황지호가 한마디 했다.
“은호가 걱정되나? 네 걱정이나 하는 게 나을 텐데.”
내 걱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황지호는 이 의문에는 답을 주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지호가 한 말의 의미는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의신이 형, 생일 축하해요.”
긴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해 묶은 은호가 황명호 대저택 별채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괴도 활동은 즐거우셨나요, 의신이 형? 의신이 형을 걱정하는 이들을 두고 무정하게 갔으니 의신이 형이라도 즐거웠어야죠.”
말투는 다정한데 그 내용에 온 세포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니, 의신이 형이라고 부르는 대신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게 좋을까요? 적벽괴도 형.”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