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5)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뱉는 ‘그 단어’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형까지 붙이니 위력이 증가한 것 같았다.
‘……‘그 단어+님’보다 더 충격적이다.’
괴도 네온에게 괴도 공격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단어’의 진화 형태로 불려야 하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호에게 ‘그 단어’로 공격당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플마고 속의 괴인, 괴도 네온이 얼마나 오그라드는 행보를 보였는지 기억하고 있을 테니 아마 은호에게 추리할 소재는 충분했을 거다.
보아하니 은호는 내가 ‘그 단어’에 과민 반응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적벽괴도 형이 이번에 향하셨던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아시죠? 당연히 모르시진 않겠죠. 적벽괴도 형이 총명하고 신중한 분이라는 건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중간부터 칭찬 비슷한 말도 섞인 듯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은호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얼굴에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했는데, ‘그 단어’의 연호 덕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은호에게 손목을 잡혔다.
맥을 짚고 이능파를 흘려보내는 게 내가 방심한 사이 진맥을 하는 것 같았다.
플레이어의 정신이 흐트러지면 이능파의 가드가 약해지는데, 은호는 그걸 노렸을지도 모르겠다.
“적벽괴도 형, 그곳에서 무엇을 봤죠?”
진맥을 하다가 내 뇌리에 깊이 남은 죽음의 공포를 읽은 걸까.
은호는 내가 무언가를 봤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은호는 금방 무언가를 간파해 버렸다.
“포모르 마족은 체면을 중시하니 마왕이 직접 나서서 괴도 네온을 잡으려 했을 거예요. 또, 괴도 네온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적벽괴도 형이 이렇게 태연하진 않았겠죠.”
은호는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아닌데 훤히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읊었다.
은호는 추리하는 도중에도 ‘그 단어+형’의 연호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의 적벽괴도 형은 태연하시죠.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요.”
오그라드는 단어가 섞인 말에 뼈가 있었다.
은호는 이 세계에 오기 직전의 일을 말하는 건가 보다.
줄곧 은호의 말을 잠자코 듣던 황지호가 물었다.
“마치 경험담을 말하는 것 같은 말투로군.”
“네, 직접 옆에서 몇 번이나 경험했죠.”
“조의신…….”
몇 번이나?
시한부인 걸 밝히지 않았던 걸 지적한 게 아니었나.
황지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과거의 일은 나중에 묻도록 하지. 지금 은호 네 말을 들었을 때, 마치 조의신이 영국에서 무슨 일을 겪었다는 것 같군. 설마…….”
노친네도, 은호도 눈치가 빨랐다.
‘그 단어+형’만 아니었으면 이능파를 잘 다스려서 어떻게든 숨겼을 텐데!
결국 은호가 내가 숨기려 했던 그 사실을 밝혀냈다.
“네, 적벽괴도 형은 발로르의 눈을 보고 오셨을 거예요.”
“발로르라고? 조의신, 설마 ‘죽음의 눈’을 마주하고 온 건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황지호가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사이엔가 은호의 얼굴에서 온화함이 가셔 있었다.
“발로르의 사안(死眼)은 눈을 보는 대상의 죽음을 보여 주고, 그것을 실현시켜 죽음을 선사한다고 하죠.”
“그것을 보다니…… 조의신…….”
황호가 탄식하고 은호가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은호가 죽음에 관해 입에 담을 때마다 천성헌에게 내 뒤처리를 떠맡기고 온 게 떠올라 면목이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호랑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심하다가 두 호랑이들이 납득할 만한 변명을 입에 담았다.
“투어허 데 다넌의 신보, ‘루의 창’을 들고 있었어. 그래서 발로르의 눈과 마주쳐도 괜찮…….”
“양귀비로 재우지 않으면 피에 미쳐 날뛰는 그 신보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걸 손에 들었다고요?”
“그런 전승이 있는 무기를 손에 들었나? 아무리 만물 사용이 있다 한들 그런 무모한 짓을……!”
루의 창에 관해 언급한 건 실책이었다.
은호와 황지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루의 창에 켈트의 상위 존재가 건 축복이 걸려 있었으니 괜찮았다고 설명했지만 두 호랑이들의 심기는 계속 불편해 보였다.
겨우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나 했는데, 이번에는 황지호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죽음의 눈만큼은 아니지만 걱정 많은 두 호랑이 앞에서 꺼내긴 어려운 화제였다.
“조의신, 네가 연락을 계속 피하는 바람에 계속 방송국 사건 때 있던 일을 얘기하지 못했지.”
“저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었어요. 황호 님, 용제건에게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그래, 분신을 통해 이야기를 전부 듣고 왔다.”
간신히 발로르와 루의 창 이야기에서 벗어났나 했더니 그 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용제건이 이야기를 전부 했다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한 거지……?’
아마 황지호는 그가 모르는 부분에 관해 물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용제건은 묻지 않은 자잘한 것까지 전부 이야기하고도 남을 용이었다.
황지호가 어떤 반응을 할지 기대하며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조의신이 용제건에게 옷을 바꿔 입고 적의 눈을 속이자고 제안했다더군. 조의신의 제안은 성공했다. 문제는 그 제안이 용제건도 속였다는 거지만.”
“그랬을 거라고 예상은 했어요. 그래서요?”
예상대로 용제건은 그날 있었던 일을 아주 생생하게 전달한 것 같다.
용제건이 교사다운 면모보다는 유희계 용으로서의 면모가 더 유명하고 실제로도 그쪽에 더 기울어져 있으나, 일단은 교사답게 상황 전달력, 설명 능력이 매우 우수했다.
마치 황지호가 그날 있었던 일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묘사했는데, 용제건이 얼마나 설명을 잘했는지 감탄이 터졌다.
그런 내 감탄과는 반대로 설명이 이어질수록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졌다.
“등과 어깨가 꿰뚫리신 다음 날에 출국하셨다는 거네요?”
“…….”
황지호의 설명이 끝난 후.
은호와 백호군이 내 쪽을 가만히 봤다.
둘은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저렇게 나란히 앉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형제답다고 느껴졌다.
백색과 은색은 잘 보지 않으면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적벽괴도 형, 왜 자꾸 다른 생각을 하세요. 저희는 형 몸 걱정하느라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는데요.”
현실 도피는 금방 끝났다.
은호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가 한눈파는 것도 금방 눈치챘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그 점에 관해서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걱정을 하는 건 각자의 자유니까요.”
그러면 어떤 말을 하면 좋지?
목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은호가 내 앞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찻잔 안에 담긴 건 오렌지청이었다.
“사과를 듣고 싶어서 저와 황호 님이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한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들으니 호랑이들이 어떤 말을 기다리는지 깨달았다.
저 호랑이들은 ‘앞으로 이런 일은 삼가겠다.’라는 말이 듣고 싶은 것 같았다.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아냈으니 대답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긴 어려웠다.
그걸 입에 담으면 거짓말이 될 테니까.
“앞으로는 더 안전한 방법을 찾도록 노력할게.”
절충안을 제시했는데, 호랑이들 마음에는 영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다시 조용해졌다.
간혹 호랑이들이 번갈아 가며 찻잔을 기울였지만 조용했다.
입을 가장 먼저 연 건 은호였다.
“의신이 형이 거짓말을 못 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이런 대답을 할 거라는 것도요. 실제로 들으니 답답하지만요.”
‘그 단어+형’을 연호한 이후 처음으로 ‘의신이 형’이라고 불러 줬다.
은호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다시 온화함을 되찾았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긴 했지만.
“생일상 준비가 끝난 것 같군. 이만 가자.”
백호군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의 식당으로 향했다.
* * *
은광고 교문 앞.
전용기 안에서의 생일 파티를 마친 후, 맹효돈은 다시 훈련하러 갔다.
‘훈련해야지.’
맹효돈은 조의신의 생일 파티를 해외, 비행기 안에서 한다는 말을 듣고 주말 시간을 전부 빼 두었다.
조의신은 맹효돈을 지옥에서 구출해 학교로 데려온 은인 아닌가.
그래서 주중에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주말은 전부 조의신 생일 파티에서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조의신이 학교를 빠진 사이 한 일에 관해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조의신이 반 친구인 민그린의 첫 작품을 찾기 위해 움직인 듯했다.
‘그냥 찾진 못했을 거다. 또 부반장이 수상한 짓을 했겠지.’
그림에 관해 잘 모르지만, 맹효돈은 그 민그린의 그림 도난 소식이 뉴스에서 몇 번 다뤄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맹효돈의 머리로는 잘 상상이 안 갔지만 하여튼 조의신이 고생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차피 뭔가를 생각하는 건 특기가 아니었기에 맹효돈은 몸을 단련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 훈련을 마쳤을 때다.
맹효돈은 중앙 구역에서 주수혁과 마주쳤다.
“효돈아, 안녕.”
“어. 일요일인데 여기에서 뭐 하냐?”
“선도부에서 할 일이 있어서. 요새 동하 형이 바빠 보여서 돕고 있었어. 혹시 의신이 기숙사에 있어?”
“없을걸. 왜?”
주수혁은 선물이 들어 있는 걸로 추정되는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오늘 의신이 생일이잖아. 마침 선도부 일로 학교에 왔으니까 선물 주려고 했어.”
“부반장 저녁에는 약속 있다는데.”
황지호의 말에 의하면 조의신은 황지호의 가족과도 연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생일 파티를 황지호의 집에서 또 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황지호의 일방적인 약속인 듯했지만, 하여튼 그랬다.
맹효돈의 말에 주수혁이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약속 잡고 올 걸 그랬다. 놀라게 주려고 말 안 했는데.”
“어, 그래…… 아.”
주수혁과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맹효돈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집과 학교 양쪽에서 고립되어 있던 맹효돈이 사람다운 교류를 하던 장소가 하나 있었다.
청소년 스포츠 대회가 이루어지던 체육관.
그곳에서 주수혁과 자주 만나다가 라이벌 취급을 받고 친해졌으니까.
‘맞아. 거기에서 주수혁 말고 다른 애들하고도 얘기한 적 있는데.’
주수혁은 중학생 시절부터 학생들의 우상이었고 친구들과 팬들이 많았다.
맹효돈과 달리 주수혁은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응원하러 오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매번 빠짐없이 제일 앞줄에서 주수혁을 응원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대기 시간이 긴 시합이 있던 날이었던가?’
주수혁이 자신의 몫으로 선물 받은 간식을 맹효돈과 나눠 먹어도 되냐고 어떤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 여학생은 흔쾌히 승낙하며 맹효돈에게도 잘 먹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이…….
“엑.”
그때, 중앙 구역 도서관에서 막 나온 남학생과 여학생과 마주쳤다.
방윤섭과 그때 맹효돈과 마주쳤던 어딘가 봤던 여학생이었다.
맹효돈은 새삼 반가운 기분에 그 여학생에게 인사했다.
“……야. 그땐 고마웠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방윤섭이 경계심 어린 얼굴을 했다.
그에 반해 주수혁은 몹시 반가워하는 얼굴을 했다.
“효돈이가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 바로 알아봤어야 했는데 기억을 못 했네. 미안하다.”
여학생은 어딘가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윤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네가 얘를 언제 봐서 아냐고!”
맹효돈은 방윤섭의 초조함을 읽지 못했다.
그냥 방윤섭은 매번 맹효돈 앞에서 저런 말투와 태도를 보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중학생 시절 체육관에서 자주 봤다. 쟤는 매번 주수혁을 응원 왔으니까.”
이 여학생은 맹효돈이 기억할 정도로 스포츠 시합을 보러 와 응원했고, 부정 사건이 없었다면 입학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은광고에 지원했다.
방윤섭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봤다.
그 여학생은 주수혁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한 거다.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방윤섭은 속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주수혁을 보는 방윤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