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06화 (405/925)

62. 귀갓길 (6)

은호가 머무는 별채의 식당.

식당에 들어서니 적호가 식기를 세팅하고 있었다.

우리의 접근을 알아챈 적호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야기는 마쳤습니까? 예상보다 이르게 끝났군요. 은호가 조의신에게 아주 무른가 봅니다.”

적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 단어+형’을 사용한 은호의 맹공으로 내 정신은 너덜너덜한데 무슨 소리인가.

이야기도 결코 짧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적호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황지호는 이 말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의신에게 꼬박꼬박 형 소리를 하며 따를 때부터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또 오늘이 생일이기도 하니 배려해 준 것 같군.”

“그렇겠죠. 저나 황호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몇 시간은 더 설교했을 텐데요.”

“하하하! 뭐, 그렇다만…… 네가 젊을 때 친 사고들을 생각하면 설교만으로 그친 걸 다행이라고 해야지.”

“황호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에 황지호가 내 걱정이나 하란 소리는 괜한 말이 아니었나 보다.

두 호랑이는 사고를 쳐 은호에게 혼난 경험이 많은지 서로의 옛일을 들추며 웃었다.

은호는 황지호와 적호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뿐 딱히 대화의 내용을 지적하진 않았다.

‘……부정하지 않네.’

천성헌 시절에 보였던 모습이나 황지호한테 들은 은호의 묘사를 고려해 봤을 때, 은호는 지어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다.

호랑이들은 과거에 혼난 경험담을 늘어놓았는데, 은호는 한 건도 부정하지 않고 듣고만 있다가 말했다.

“그래요, 그런 일도 있었죠. 세 분께는 늘 드릴 말씀이 많았어요.”

은호는 저 호랑이들을 상대로 정말 긴 설교를 했나 보다.

……그런데 방금 세 분이라고 하지 않았나?

은호의 시선이 황지호, 적호, 백호군 쪽을 번갈아 향했다.

저 두 호랑이와 백호군이 엮인다니 순간 위화감을 느꼈지만, 곧 얼마 전에 황지호가 한 옛이야기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황지호가 처음 은호를 만난 날, 은호가 백호군에게 설교하고 있었다고 했지.’

적호의 도발에 응한 백호군이 은호와 했던 약속을 어겨 설교를 들었다고 했다.

내가 아는 플마고 속 백호군과 지금의 백호군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호랑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멍하니 있으니 은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의신이 형, 자리에 앉죠.”

은호가 가리킨 곳은 상석이었다.

황명호 대저택에 오면 당연하게 저택의 주인인 황지호가 앉던 위치였다.

은호가 앉으라고 권하긴 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바로 앉지 못하고 황지호 쪽을 봤다.

황지호가 답하기 전에 은호가 입을 열었다.

“생일상의 상석에는 주인공이 앉아야죠. 그렇죠, 황호 님?”

“은호의 말이 맞다. 조의신, 너를 위해 생일상을 준비해 뒀으니 부담 갖지 말고 앉거라.”

그래도 5천 살이 넘는 호랑이들을 제치고 상석에 앉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머뭇거리고 있을 때 백호군이 움직여 상석의 의자를 뺐다.

“…….”

백호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서 앉으라는 뜻이 아주 잘 전해졌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말 없는 배려를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자리에 앉았다.

내가 착석하자 황지호와 은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백호군은 은호 옆에 앉았다.

적호는 자리에 앉지 않고 조리실 쪽으로 향했다.

“제 아들이 마련한 요리는 곧 나올 예정입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김신록도 여기에 와 있었구나.

용족의 신역에서 나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텐데, 임무에 실패해 혼나지 않았을까 뒤늦게 걱정되었다.

“내가 만든 것도 있다. 은인의 생일상에 이 몸의 요리가 빠질 수 없지.”

황지호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답하듯이 말했다.

뭐가 어쨌든 황지호의 메뉴 선택은 탁월하고 직접 만든 음식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으니 살짝 기대되긴 했다.

“황호 님의 요리 솜씨가 긴 세월 사이에 일취월장하셨죠. 기대되네요.”

은호가 덧붙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저 말만 들으면 황지호가 처음부터 요리를 잘했던 건 아니라는 것 같았으니까.

“저희는 열중하는 일이 생기면 식사를 잘 챙기지 않았죠. 황호 님께서 보다못해 저희 몫의 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맛은…… 나쁜 의미로 잊기 힘들었죠.”

“하하하하! 그러니 알아서 잘 챙겨 먹지 그랬나.”

황지호가 만든 첫 요리의 맛은 5천 년의 세월을 넘어 기억할 만큼 맛대가리가 없었나 보다.

은호가 말을 더듬을 정도면 정말 끔찍했을 거다.

내가 호랑이들의 과거사에 흥미를 가진 걸 눈치챈 건지 은호가 과거의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 이후로 백호 형님은 잘 챙겨 드시거나 황호 님이 식사를 준비하면 도망가 버렸어요. 적호 님은 다 드시긴 했지만 맛에 관해 지나치게 솔직하게 표현했죠.”

“적호는 온갖 욕을 하면서도 다 먹었지. 그래서 적호 몫은 가장 맛없게 된 요리를 몰아줬다.”

황지호는 신나게 처웃으며 과거의 비화를 풀었다.

조리실과 식당 사이의 거리 정도면 적호가 다 듣고 있을 게 뻔한데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적호는 지금쯤 아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애써 상스러운 욕을 삼키고 있을 것 같았다.

“황호 님의 요리를 군말 없이 드신 건 청호 님뿐이셨어요.”

“청호는 맛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단 걸 좋아하긴 했지만, 식사량 자체가 적었지. 신인의 목소리만 들어도 배가 부르다고 했으니까.”

청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난 한이의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한이는 매일같이 수업종 정보를 체크하며 ‘듣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청력이 없어서 그런지 식음을 전폐하고 열중할 정도는 아니다.

사월세음과 함께 MITRON의 디저트를 행복한 얼굴로 먹고, 황지호가 고르거나 직접 조리한 음식을 먹고 분해하면서도 맛있게 먹는 한이가 떠올랐다.

“한이가 언젠가 다시 청력을 되찾는 날이 오더라도 예전 같은 식생활로는 못 돌아갈 거다. 이 몸의 요리를 맛보았으니까. 하하하하!”

황지호가 자신이 넘치는 목소리로 처웃었다.

황지호가 너무 처웃긴 했지만, 황지호의 솜씨를 고려하면 자신만만해도 이상하지 않긴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중에 실수를 몇 번 해서 그만…….”

김신록이 면목 없어 하는 얼굴로 등장했다.

김신록과 적호는 황금으로 된 서빙카트를 밀고 있었고, 카트의 각 층에는 호랑이가 음각으로 새겨진 순금의 뷔페 서버가 실려 있었다.

뷔페 서버의 숫자만 봐도 메뉴의 숫자가 두 자릿수는 가뿐히 넘어갈 것 같았다.

적호와 김신록은 테이블 위에 뷔페 서버를 가지런히 올려 두기 시작했는데, 내 앞에 유독 큰 접시 두 개가 놓였다.

덮개 탓에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릇과 덮개의 디자인이 정교하고 소재도 좋아 보이는 게 척 봐도 다른 뷔페 서버와 내용물이 다른 것 같았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특별히 준비했다. 열어 보도록.”

황지호가 말하긴 했지만, 그릇이 두 개라 어느 것부터 열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대충 아무거나 열까 고민했지만 일단은 물어보기로 했다.

“……둘 중 하나만 택해서 여는 거야?”

“아니, 둘 다 네가 열어야 한다.”

“열어 보세요, 의신이 형.”

호랑이들의 격려인지 재촉일지 모를 말에 일단 왼쪽에 있는 덮개를 열었다.

덮개를 열자 등장한 건, 거대한 떡케이크였다.

‘달토끼떡에서 나온 떡케이크인가? 아니, 이건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유자와 귤도 아직 제철이 아니라 메뉴에는 없었고…….’

오렌지와 유자, 귤을 섞어 빚은 떡케이크에선 상큼한 향이 흘렀다.

가끔 옥토연이 달토끼떡 신메뉴가 나왔다느니, 계절 한정 메뉴가 맛있다느니 하면서 카탈로그를 멋대로 보내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떡케이크는 거기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었다.

‘특별히 제작 주문한 거구나.’

호랑이들은 내가 떡케이크를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줬다.

화려한 빛깔의 떡케이크에서 눈을 뗀 후, 다음은 오른쪽에 있는 덮개에 손을 뻗었다.

묵직한 덮개를 열자 등장한 내용물은…….

왕왕!

천사였다!

덮개 너머에서 새하얀 천사가 등장했다.

은호의 후예들이 보내 준 사진으로 보았던 고깔모자를 쓴 올무가 나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설마 내 생일을 축하하려고 이 좁은 곳에서 계속 기다린 건가!

감사와 기쁨, 미안한 마음, 억누르기 힘든 감격이 동시에 휘몰아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올무가 품에 안고 있던 풍선을 터뜨렸다.

팡! 팡팡!

풍선은 이능 아이템이었는지 터진 순간 작은 이능파가 반짝거렸다.

터뜨리는 방식의 이능파 폭죽이었던 것 같은데, 올무의 똑똑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폭죽의 불빛 사이에서 온몸으로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올무는 천사에 천재였다.

“…….”

“……조의신이 정신을 못 차리는군.”

“의신이 형이 기뻐하면 됐죠.”

정신을 차렸을 땐 내 품 안에 올무가 있었고, 올무를 향한 찬사를 잔뜩 늘어놓은 이후였다.

황지호는 내가 정신이 든 타이밍을 노려 잔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 들자 호랑이들이 동시에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조의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

“생일 축하해요, 의신이 형.”

“생일 축하합니다.”

호랑이들이 저마다 축하 인사를 뱉었는데 적호와 김신록은 인사하는 타이밍이나 속도와 인사말이 완전히 동일해 과연 부자관계다웠다.

올무는 잔을 못 드는 대신 작은 앞발을 들어 올려 내 잔을 툭 치는 것으로 건배를 대신했는데, 너무나도 천재적이었다.

“생일 축하한다.”

올무에 이어 다시 건배를 청한 건 백호군이었다.

백호군과 10년 가까이 화면 너머로 플마고를 통해 함께했지만 생일 축하를 받을 날이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고마워.”

호랑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마치고 식사를 시작했다.

황지호가 특별히 준비했다던 음식들은 전부 맛있었다.

예전에 맛있다고 생각한 메뉴들의 총집편 같은 생일상이었는데, 황지호가 어떻게 그걸 알고 메뉴를 골라냈는지 의문이었다.

김신록은 식사 전 말한 대로 실수가 많았는지 플레이팅이 평소 같진 않았는데, 맛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오늘 메뉴는 다 맛있구나.’

그게 그저 기쁘지만은 않았다.

평소 황명호 대저택에 방문해 식사하면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실패작이 하나씩 있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은호의 후예들은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

다음 주말에는 꼭 은호의 후예들과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호랑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할까.’

식사를 마칠 때쯤엔 은호가 직접 차를 대접했는데, 차를 마시며 운을 뗐다.

“내가 영국에 간 이유 말인데…….”

그러나 내 시도는 은호에 의해 순식간에 무산되었다.

“의신이 형, 생일상에서 제가 형을 다른 호칭으로 불렀으면 좋겠어요?”

은호는 여차하면 ‘그 단어+형’을 쓸 생각인가!

곧바로 나는 입을 다물고 차나 마시기로 했다.

그러나 상황이 무탈하게 수습된 것 같진 않았다.

“흐음…….”

황지호가 찻잔을 기울이며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황지호를 외면하고 품 안에 있는 올무를 쓰다듬으며 차 맛을 즐겼다.

황지호가 이미 ‘그 단어’가 내 약점이란 걸 알아챘을 가능성이 컸지만, 끝까지 발악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무사히 티타임이 마무리되려던 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계속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던 김신록이 입을 열었다.

“자리가 파하기 전에 다들 계신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들아?”

적호가 걱정스럽게 묻자 김신록은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김신록이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조의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