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7)
김신록은 각오를 굳힌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신록이 더 고민할 줄 알았는데, 내가 영국을 다녀온 짧은 사이에 마음을 잡았나 보다.
‘생각보다 빨리 결론을 내렸네.’
은광고에는 용제건처럼 정체를 숨기지 않는 교사도 있지만, 김신록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
단순히 용제건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게 싫은 건지, 호족과 웅족의 후예라는 걸 드러내기 싫은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김신록이 동료 교사와 학생들에게 거리를 두고 여태까지 정체를 숨기고 교사직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김신록을 몹시 따르는 성국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짜 신분 장례식 때에도 조문 와서 용제건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직도 추모할 정도로 따르는 제자가 나타났어. 그리고 하필 그 제자는…….’
15년 전 은광고 변혁의 중심에 있던 학생회장 성국언.
그에게는 진족과 후예를 꿰뚫어 보는 눈이 있는 데다가 그는 진족과 후예를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특별한 이능이 있고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가 될 게 분명한 성국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켜 호족에게 폐를 끼칠까 봐 우려한 건지도 모른다.
단순히 제자에게 미움을 살까 봐 겁이 났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그런 선택의 결과 김신록은 신분 하나와 제자를 잃고 성국언은 스승을 잃었다.
‘성국언은 그 일로 진족과 후예를 더 꺼리게 됐겠지. 용제건이 스승의 죽음을 방조했다고 생각했다니까.’
한반도를 노리는 흑막 집단에는 저강렵이나 웅족 같은 진족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성국언은 진족과 후예를 경계하고 신중한 움직임을 취했다.
성국언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는 득보다는 실이 컸다.
그가 세운 모든 계획에선 진족과 후예가 배제되어 있었으니까.
‘성국언이 사망한 계기가 되는 시나리오에서 만약 진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성국언은 꼰대 취급을 하던 함근형 선생님과 홍천에서 만난 걸 계기로 생각을 바꾸고 도움을 청했다.
위 사례처럼 진족에 대한 성국언의 생각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 성국언은 어느 진족에게 접근하려 하고 있었다.
그 진족은 지금 이 저택에 있었고, 김신록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나는 어느 제안을 했다.
“어떤 제안을 말하는 거지? 조의신이 ‘리플레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 건 아닐 것 같군.”
“그렇겠죠. 그랬다면 적호 님의 아드님이 이만큼 망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또 그걸 저희 앞에서 말씀하실 리도 없고요.”
은호는 황지호에게 그 리플레이에 관해서 들었는지 바로 내 제안이 리플레이와 관계가 없다는 걸 파악했다.
김신록은 내 제안에 관해 어디에서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바로 입을 열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나는 김신록을 돕기로 했다.
“제가 설명해도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김신록은 안심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그럼 의신이 형이 어떤 제안을 했는지 들어 보죠.”
은호는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차를 한 잔 더 준비하며 말했다.
찻잔을 받아 들며 황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제안하긴 했지만, 황지호 네 허락이 먼저 필요해.”
“내 허락이라고?”
황지호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흔쾌히 답했다.
“은인이 제안하고 후예가 하겠노라고 했는데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다. 너희들에게 위험이 없다면 허락하지.”
내가 무슨 제안을 한 줄 알고 바로 허락한다는 건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들어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말하기로 했다.
“광일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네 분신이랑 관련이 있어.”
“흠, 그 분신과 김신록이 관련이 있나?”
“간접적으로.”
한이와 독고미로의 초등학교 생활을 망친 어느 교사의 처리를 위해 황지호의 분신을 파견한 광일초등학교.
황지호는 그곳에 잠입한 전무영을 상대로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파훼한다는 쓸데없는 짓을 하려다가 능력을 드러냈다.
그러니 전무영이 경계를 하고 성국언도 황지호의 어린 분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접촉을 시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황지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전무영이 이 모습을 한 나의 주소지를 캐더군. 아마 우연을 가장해 집 근처에서 만날 생각인 것 같은데······. 일단 가짜 부모 역을 맡은 부하를 그 주소지에 대기시켜 둔 상태다. 이 몸은 현재 친척 집에 놀러 가 자리를 비운 상태라는 설정이지.
황지호는 일부러 자리를 피하며 성국언을 몇 번 따돌린 모양이었다.
성국언과 마주칠 생각이 없냐는 내 질문에 황지호는 이렇게 답했다.
―당분간은.
저 대답을 해석하면 황지호는 당분간은 성국언과 마주칠 생각이 없지만, 그 당분간이 지나면 만날 생각이 있는 듯했다.
성국언은 아직 초등학생 모습의 황지호가 진족이라는 것까진 알아채지 못했고, 딱히 진족과 만나기 위해 접촉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성국언이 그곳에 전무영을 파견한 이유는 그 실종된 교사 탓이야. 법망을 빠져나간 그 교사를 잡기 위해 계속 주시했겠지. 그걸 황지호가 처리했다는 걸 알면 호의를 품을 수도 있어.’
황명 그룹 측에서 홍경복 화백의 제자를 처리한 건으로 점수를 따 두지 않았던가.
황지호가 뒤에서 암약한 걸 더 알게 되면 진족 전체에 관한 인식은 바꾸지 못해도 호족에 관해선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호족의 후예에게도 호의를 품게 될 가능성이 컸다.
“초등학생 분신으로 성국언 선배님과 언젠가는 만날 생각이지?”
“그럴 생각이다. 계속 피해 다니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도 하고.”
성국언의 이름이 나와서 그런지 황지호는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거의 눈치챈 것 같았다.
황지호는 김신록 쪽을 흘끗 보다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네 제안이 뭔지 대강 알 것 같군.”
“…….”
“……어떤 제안입니까?”
김신록은 황지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적호는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답답해하며 나를 독촉했다.
“황지호의 초등학생 모습의 분신과 성국언 선배님이 만날 때, 김신록 선생님이 동석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이 말에 호랑이들은 전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은호는 전후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성국언이 진족과 후예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파악하고 있었을 거다.
은호와 황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잘 생각했다, 아들아. 그 옛 제자를 늘 염려하지 않았더냐.”
“……호족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 같으면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폐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아, 네 옛 제자가 너한테 싫은 소리를 하면 내가 혼쭐을 내 주겠다!”
적호는 아들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하며 당장이라도 성국언을 공격할 기세로 말했다.
김신록은 벌게진 얼굴로 적호의 과잉보호 발언을 듣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야겠군. 성국언이 내 분신의 신분에 관해 조사를 하긴 했지만, 서류상 4촌 이상의 친척까지 파악한 건 아니다. 적당히 날조해 두도록 하지.”
김신록은 우선 초등학생 황지호의 친척으로서 성국언과 만나게 될 것 같다.
성국언과 김신록은 얼마 전에 공항에서 마주쳤는데, 또 저런 자리에서 마주치면 어떻게 생각할까.
성국언과 전무영이 순진하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텐데.
아니, 전무영은 김신록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으니 우연이라고 해도 믿어 줄 것 같긴 하다.
황명호 대저택의 별채에서 이어진 내 생일 파티와 티타임이 끝난 후.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은호에게 붙잡혔다.
“주무시고 가세요. 오늘 하실 말씀이 많았는데 다 못 하셨잖아요.”
내일은 월요일이라서 등교해야 하는데.
내가 무슨 변명을 할지 아는 것처럼 은호가 말렸다.
“시간을 아껴야죠. 황호 님께서 예비 교복을 많이 준비해 두셨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교복 외에 필요한 짐이 있나? 기숙사에 부하를 파견하마.”
은호에 이어 황지호가 덧붙이고, 내 천사가 결정타를 찍었다.
끄응…….
올무는 어디서 구한 건지 올무와 딱 맞는 사이즈의 베개를 입에 물고 있었다.
올무가 천재라서 저런 베개를 구해서 물고 있는 건가?
어쨌든 나의 천사가 이런 천재성을 발휘한 건 나와 같이 자려고 그런 게 분명했다.
결국 나는 예정에는 없었지만 호랑이 저택에서 묵게 되었다.
황지호와 적호, 김신록은 은호의 후예들을 계속 따로 둘 수 없는지 본채로 돌아갔지만, 은호와 백호군, 올무는 별채에 남았다.
“본채에 의신이 형 침소가 있다고 들었지만 별채에도 하나 마련해 뒀어요. 황호 님의 저택이 넓으니 머물 장소가 많으면 좋죠.”
이 저택 본채에 내 침소가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봤다.
내가 자주 자고 가는 그 게스트룸 말하는 건가?
그냥 이 호랑이 저택에 자고 가는 사람이 없어서 아예 빈방을 내 방으로 정해 둔 건가.
깊은 의도는 없더라도 내 방을 정해 두면 나중에 정리할 때 좀 곤란하지 않을까.
왕왕!
올무가 품에 작은 베개를 등에 지고 내 침소로 지정된 방을 향해 귀엽게 짖었다.
뭐…… 나의 천사가 좋아하니까 됐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내 방은 올무 방으로 해 줬으면 좋겠다.
올무는 나와 백호군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앞장섰다.
“…….”
“백호 형님, 오늘은 별채에 머물고 가시나요?”
“그럴 생각이다.”
은호의 별채에는 백호군의 침소가 있나 보다.
백호군의 대답에 은호가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밤마다 산령 수색에 바쁘셨죠. 단서는 잡았나요?”
백호군은 산령을 쫓고 있었나?
산령은 은호가 일어나기 직전에 아주 수상한 행보를 보였다.
산령은 그날 은휘관의 지하, 은의 관에 누워 있던 은호의 몸 위에 천단수의 가지를 올렸다.
‘……그러자 은호가 눈을 떴지.’
그날뿐만 아니라 처음 산령과 만난 천익산, 호족의 신목(神木) 천단수(天壇樹) 앞에서 내가 수피에 손을 올리도록 유도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산령과 천단수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천단수 외의 것이다.
‘그때마다 ‘운명력’이 발동했어.’
운명력은 다양한 양상으로 발동하지만, 산령과 천단수와 엮여서 발동하는 운명력의 형태는 늘 하나였다.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을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
말 그대로 산령은 우주의 기운과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
‘산령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아주 미심쩍지만 이쪽에 해를 끼치지 않는 데다 매번 다른 중요한 사건과 겹쳐 터지다 보니 산령에게 큰 신경을 쏟지 못했다.
이제 슬슬 산령의 진짜 정체와 의도, 목적 같은 걸 캐 봐야 할지도 모른다.
산령에 관해 사고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계속 네가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해라.”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백호군이 말했다.
‘비슷한 말을 몇 번 들은 것 같은데…….’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저렇게 배려하며 말해 주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은호도 옆에서 함께 덧붙였다.
“네, 의신이 형. 산령 건은 저와 백호 형님이 맡을게요. 오늘은 이만 쉬세요.”
백호군에 이어 은호까지 저렇게 거드니 더 나서기가 어려웠다.
잠들기 전, 조금 더 사고하려고 했지만 올무를 품에 안고 눈을 감으니 곧바로 졸음이 쏟아졌다.
결국 수마에 저항하지 못하고 꿈 없이 잠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