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감시 (8)
내가 탐욕의 마신 아바리티아의 문양을 본 건 플마고에서 제갈재걸이 제자를 대신에 저주를 짊어진 이후였다.
제갈재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으스러지고 짓물러 본래의 형태를 잃었지만, 상위 존재 토트의 배려로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얻었다.
제갈재걸은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말썽꾸러기 제자들은 좀처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갈재걸은 결국 끈질기게 자신을 찾아오는 2학년 0반 아이들을 단념시키기 위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싫어, 말도 안 돼······.]
[선생님 거짓말쟁이······ 우리 졸업할 때까지 담임 해 준다고 했으면서······.]
액정 화면 너머로 보이는 건 사람의 형체가 아닌 듯한 제갈재걸의 실루엣과 2학년 0반 학생들이 뱉는 절망 어린 텍스트뿐.
이때, 제갈재걸을 본 건 2학년 0반 학생만 있던 게 아니었다.
[남옥시인(藍玉詩人)의 모습을 확인했다.]
제갈재걸이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직후, 화면은 다른 곳을 비춘다.
어둠 속, 로브를 착용한 이들이 회합하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이들은 줄곧 제갈재걸을 감시한 듯했다.
[남옥시인은 어떻습니까?]
[언령을 사용할 여지가 있나?]
[단순히 거동을 하지 못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 남옥시인의 진정한 힘은 그가 쓰는 글귀에서 발휘되니까.]
[회생 가능성은? 그에게는 우수한 제자가 많지 않나.]
제갈재걸을 경계하는 이들의 정체는 마족.
언령이 약점인 존재들로, 제갈재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이들이었다.
마족 중 제갈재걸을 감시하고 있던 이가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토트가 억지로 숨을 붙여 두고 있으나 그뿐이다. 더 이상 손을 쓸 필요도 없다. 기다리면 문제없이 처리될 거다.]
[정말인가?]
[그렇다. 그가 숨이 멎을 때까지 확실히 감시하도록 하지. 걱정 마라.]
마족은 그 말대로 제갈재걸의 생이 끝날 때까지 집요하게 감시했다.
시간이 흘러 제갈재걸의 죽음이 확인되었을 때, 이들은 축배를 들며 기뻐한다.
[남옥시인의 사망과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건배!]
[그 지긋지긋한 언령술사를 보냈군요!]
[그래, 한반도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언령술사가 죽었어.]
마족의 약점은 언령.
마족들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시스템인 소리와 문자에 얽매였다.
마족의 언어라면 모를까, 이들은 인간의 언어에 더더욱 약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들은 인간이 직접 창제한 한반도의 언어에 자신들이 지배당하는 걸 굴욕으로 여겼다.
그들은 한반도의 지력을 차지하는 것보다 한반도의 언령술사를 배제하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제갈재걸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갈재걸의 죽음에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은광고에는 제갈재걸 외에도 우수한 언령술사가 하나 더 존재했으니까.
[또 은광고인가! 아직도 언령술사가 있다니!]
[이제 은광고에 남아 있는 언령술사는 정음(正音) 공청훤 하나입니다.]
[그자는 아직 젊고 은광고 내의 입지도 시원치 않다. 남옥시인보다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
마족들은 불쾌해하면서도 제갈재걸의 죽음에 더 기뻐하기로 했다.
은광고에는 이미 마족의 손이 닿은 이들이 많이 있어 공청훤의 처리엔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었다.
마족들은 승리를 자축하다가 한구석에 앉아 있는 마족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플레이어 협회의 방식을 빌려 표현하자면, 최대 공헌자는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되겠군.]
[그래, 그 저주의 씨앗이 제대로 먹혔지.]
[인질을 이용한 계책도 훌륭했다.]
[언령술사가 저주를 짊어진 순간 어찌나 후련했는지!]
그러자 지목당한 아바리티아의 사제의 주변에서 자주색의 독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를 본 마족들이 한 발 뒤로 물러나거나 급히 이능파를 발산해 독기를 차단했다.
[최대 공헌자라니요. 인간의 방식으로 절 지칭하다니, 불쾌합니다.]
그렇게 마족이 착용한 로브에는 마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액정 화면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 새겼다.
플마고의 2학년 0반 학생들은 스승의 복수보다 유지를 받드는 걸 우선시했지만, 화면 밖 플레이어인 나는 제갈재걸의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세계에 와서 몇 번이나 아바리티아의 문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제갈재걸에게만 손을 댄 게 아니었어……. 마족(魔族)은 오래전부터 유상희, 유상훈과도 엮여 있었나!’
아니, 불로(不老)의 종족, 진족들에게 있어 10년 정도는 옛날 일도 아니겠지만.
도시후 건을 캐면서 마족이 TC 그룹과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유상희와 유상훈의 과거와도 연관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이 세계에서 아바리티아의 문양을 발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번이 세 번째인가.’
첫 번째는 도시후의 개인 물품에 벽사 의식을 치렀을 때.
두 번째는 사관학교 교류전에서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포획했을 때.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이다.
유상훈의 기억이 불분명한 탓일까.
유상훈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내가 알고 있는 아바리티아의 문양과 일치하진 않았지만, 지나치게 흡사했다.
거기에 심증도 있었다.
‘도시후를 노린 건 TC 그룹 내부의 인물이었고, 유상훈은 TC 연구소의 로고를 봤다고 했지.’
TC 그룹은 현재 크게 3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TC 그룹의 계열 분리 찬성파.
TC 그룹의 차기 총수와 선박왕이 여기에 해당된다.
‘도원우와 도시후의 아버지가 각각 여기 속해. 이쪽은 문제가 없어. 문제가 되는 건 남은 두 파벌이야.’
둘째는 TC 그룹의 계열 분리 반대파.
이 파벌은 현재 플레이어 협회의 집행부에 의해 초토화되는 중이다.
사관학교 교류전 사건 당시, 김신록이 간호 장교를 직접 심문해 받아 낸 자백과 증거를 통해 이들을 무너뜨릴 단서를 잡아 냈다.
이들은 도시후의 정신을 무너뜨려 도시후가 교류전 개회식 당일, 도원우를 암살하도록 조종할 계획을 세웠다.
유력한 플레이어 자제 둘을 동시에 해치우고, 차기 총수와 선박왕을 이간질하려는 악랄한 책략이었다.
이들은 현재 법에 의해서, 또 아들을 잃을 뻔한 아버지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씩 처리되고 있었다.
‘이쪽은 협회가 나서고 있고 차기 총수와 선박왕도 이 사건을 인지했을 테니 괜찮겠지. 이들에게는 지금 TC 연구소를 통해 유상희에게 압력을 가할 여력이 없을 거야.’
이 두 번째 파벌은 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족과 손을 잡았다 한들, 다들 감옥에 가거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의심스럽게 여겨지는 파벌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세 번째다. 이들도 마족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어.’
TC 그룹의 파벌 셋째, 천씨 파벌.
한때 한국 제일의 그룹으로 꼽히던 TC 그룹이 4대 그룹 중 하나로 내려앉게 된 계기가 된 ‘T와 C의 이혼 사건’.
그 사건으로 인해 도씨 파벌과 갈라진 이들이었다.
‘홍규빈이 남궁규빈이던 시절, 이 천씨 파벌 사람들과 도시후 사건에 연루된 임원 다수가 교류했던 걸 봤다고 했어.’
홍규빈은 이 천씨 파벌을 의뭉스럽게 여겼으나, 결국 이번 사건과 연관점을 찾지 못해 이들까지 엮는 데에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단서가 끊긴 건 아니었다.
‘황지호가 이혼 사건 당시 천씨 파벌에 힘을 실었다고 했지. 그때 얻은 연줄이 남아 있어 내부 정보를 얻기 쉽다고 했으니까 그걸 이용하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말없이 나를 보고 있는 유상훈과 눈이 마주쳤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라는 단서에 너무 깊게 몰두한 것 같다.
아차 싶었는데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알아냈나 보네.”
유상훈은 씨익 웃고는 내 눈앞에 떠 있던 일그러진 홀로그램을 지워 버렸다.
유상훈에게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그림이 뭐랑 연관되어 있는 거냐.”
유상훈의 질문에 답하는 건 간단했다.
마족의 존재는 일반인은 물론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건 쉽지 않았다.
‘마족에 관해 이야기하면 유상훈도 끌어들이는 꼴이 돼.’
도시후 건으로 엮였던 장남욱보다 더 위험하게 엮일지도 모른다.
장남욱은 도시후의 수많은 사관학교 동기 생도 중 하나지만, 유상훈은 유상희의 하나뿐인 남동생 아닌가.
나중에 보복당하거나 내가 실패했을 때의 여파가 유상훈에게도 미칠지도 모른다.
마족이 뿌리는 저주의 씨앗의 위용과 마족이 사용하는 ‘눈’의 범위를 알고 있는 나로선 입을 열기 꺼려졌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일과 엮여 있나 본데.”
유상훈은 말수가 적은 편이다.
내가 수상한 행보를 보여도 깊게 묻지 않는다.
하지만 유상훈은 여기에선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
“…….”
우리는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유상훈이 한 수 접고 대화의 화제를 돌리거나 자리를 비켰을 텐데, 그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입을 먼저 연 건 유상훈 쪽이었다.
“……내 병은 내 이능이랑 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이 이능을 각성해서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애초에 이 이능과 연이 없었다면 그렇게 아플 필요도 없었다고 들었어.”
유상훈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나를 봤다.
‘유상훈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상훈의 각성 과정은 어딘가 이상하다.
각성 직전 유상희가 보인 행보.
그 과정에 등장한 TC 연구소와 마족.
또 유상훈을 괴롭힌 기병(奇病)도.
그 각성 과정에 숨은 비밀을 밝힐 열쇠가 있다면, 유상훈의 이능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내 이능에 관해 말할게. 스킬도, 광림도, 가호도 전부 다. 그러니 네가 알아낸 걸 말해 줘.”
자신의 이능에 관해 자세히 밝히는 건, 카드 게임 도중 자신의 카드 패를 보여 주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래서 은광고에서도 전투 교육을 위해 전투 스킬 하나를 확인할 뿐, 광림이나 다른 스킬의 공개 여부는 학생 자율에 맡긴다.
그런데 유상훈은 지금 내게 자신의 이능 전부를 공개하겠다고 한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유상훈이 나를 신뢰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만큼 유상희의 안부가 걱정되어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상훈의 이능을 알게 되면 추리 과정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딩동.
그때, 디바이스가 메시지 수신을 알렸다.
유상훈을 앞에 두고 메시지를 볼 수 없어 무시하는데, 알람은 계속해서 울렸다.
시야 한 근처에 떠오른 팝업 홀로그램을 보니, 황지호가 보낸 메시지였다.
‘황지호는 지금 내가 여기에서 유상훈과 대화 중인 걸 알 텐데…….’
황지호가 쓸데없는 메시지를 자주 보내긴 하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유상훈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시지 확인을 하기로 했다.
유상훈은 내가 시간을 끌려 한다고 생각한 건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황지호] 조의신.
[황지호] 친구와 대화 중일 텐데 미안하군.
[황지호] 당장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
무슨 일이기에 당장 나한테 알려야 한다는 거지?
황지호의 짧은 메시지에서 묘한 긴박감이 느껴졌다.
제일 밑 줄, 본론이 보였다.
[황지호] 감시 중이던 도원우가 움직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