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2)
도원우가 TC 연구소 정문으로 향하자 보안 요원들이 움직였다.
깊게 모자를 눌러쓴 보안 요원들이 모자챙 너머로 도원우를 보고 전용 디바이스로 무전을 주고받았다.
도원우는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에 불과했으나, 은광고의 대표이자 플레이어로서 이계를 전전하며 육체와 정신을 단련해 온 역전(歷戰)의 투사이기도 했다.
사복 차림의 도원우는 딱히 무장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도원우로부터 느껴지는 기백에 조용히 무장하는 보안 요원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도원우의 얼굴을 알아본 인물이 손짓했다.
“도원우 도련님이 오셨다.”
VIP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보안 팀장의 기본 소양 중 하나였고, 이를 통해 트러블을 방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팀장의 말에 보안 요원들이 소리 없이 무장을 해제했다.
처음부터 이명 ‘강철의 쐐기’로 이름난 도원우를 알아본 이들은 대놓고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 팀장의 눈에 거슬리는 이들이 보였다.
‘……VIP의 방문을 알렸는데도 무기 아이템을 손에 들고 있군.’
현재 TC 연구소의 요청으로 보안 팀에 불청객들이 섞여 있었다.
상임 연구원의 강력한 요구로 섭외한 용병이 그 불청객이었는데, 이들은 아직 무장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여전히 도원우를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보안 팀장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TC 그룹 로열패밀리를 대할 때 주의하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TC 그룹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들을 대하기 어찌나 까다로운지 몰랐다.
보안 요원 중 몇몇은 갑질에 견디다 못해 퇴사할 정도였다.
최근 TC 그룹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내부 숙청을 통해 목이 날아가는 이들 대부분이 그 갑질의 주역이었는데, 이를 두고 고소해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비록 도원우는 공정한 편이지만,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물며 도원우는 곧 은광고를 졸업하고 성인이 될 예정이 아닌가.
‘졸업 후에 도원우 도련님도 다른 로열패밀리들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차기 총수의 외아들인 도원우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를 실직자로 만들 수 있었다.
보안 팀장은 초조한 얼굴로 무장한 용병들을 봤다.
다음 분기 계약 연장을 두고 압력을 받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저들의 합류를 거절했을 거다.
보안 팀장은 일부러 저 용병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쪽에서 도원우를 직접 맞이하기로 했다.
“도원우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입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보안 팀장은 도원우에게 약속이 있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거냐 하는 식으로 떠보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저자세로 나갔다.
의례적인 신분 확인 절차를 마친 결과, 이 인물은 진짜 도원우임이 판명되었다.
디바이스를 통해 제시한 신분증은 틀림없는 진품이었고, 주변에 두른 특유의 이능파가 도원우 본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보안 팀장이 도원우가 먼저 움직일 것을 권하며 입구 쪽으로 손을 내밀었으나 도원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
멈춰 선 도원우는 보안 팀장을 한 번 흘끗 본 후, 아직 무장 중인 용병들을 바라봤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도원우의 시선은 기록기기에 멈췄다.
도원우는 기록기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 모습은 기록기기에 찍혔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보안 팀장이 잠시 얼굴을 흐렸으나 곧바로 대처법을 떠올렸다.
기록기기에 찍히는 걸 꺼리는 VIP가 적지 않아 이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존재했다.
보안 팀장은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현재 TC 연구소 정문 앞 기록기기는 실시간으로 영상과 음성을 저장하는 중입니다. 필요하시면 기록 삭제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기록 삭제 절차는 복잡하지만, VIP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보단 나았다.
보안 팀장이 도원우를 기록기기가 없는 장소로 안내하거나, 기록기기를 꺼 둔 곳으로 도원우를 유도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도원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확인하려 했을 뿐입니다.”
확인?
무슨 확인을 한 거지?
단순히 도원우가 기록기기의 작동 여부를 확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뭔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 도원우가 플레이어로서 인터뷰할 때, 이계 공략 소감을 읊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제가 한 짓을 덮어씌우면 곤란하니까, 기록을 남길 겁니다.”
그 말에 보안 팀장의 사고가 일순 정지되었다.
도원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해 보안 팀장이 입을 다물었다.
파박!
그사이, 보안 팀장 뒤에 있던 용병이 급히 몸을 날렸다.
마치 어디론가 급히 도망치기라도 하는 몸짓이었다.
보안 팀장의 당황이 더욱 깊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보안 팀장이 그 용병을 제지하고 물어야 할지, 도원우에게 질문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 순간.
파직, 파지직……!
도원우의 몸 주변에서 스파크가 번져 나갔다.
보안 팀장의 경악한 얼굴이 도원우가 발산한 빛에 반사되어 크게 비쳤다.
보안 팀장이 급히 이능파를 끌어올렸으나, 그의 방어보다 도원우가 전기술을 발동시키는 게 훨씬 빨랐다.
어느 사이엔가 서포터를 착용한 도원우의 팔이 강렬한 이능파를 머금고 하늘로 향했다.
파아아앗!
도원우에게서 뻗어져 나온 벼락이 TC 연구소를 관통했다.
동시에 TC 연구소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갑작스러운 방전 현상에 TC 연구소는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금방 기절했거나 비명을 지를 기운조차 도원우의 전기술이 앗아간 경우가 다반사였다.
빛에 삼켜진 TC 연구소는 전기가 모두 끊긴 건지 곧바로 어둠에 잠겼다.
갑자기 큰 기술을 사용한 바람에 도원우도 무리가 온 건지 숨을 몰아쉬고 비틀거렸다.
“……준비하는 동안 이능파를 응축하고 모아 왔는데도, 어렵군.”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버틴 보안 팀장은 도원우가 괴물로 보였다.
웬만한 플레이어는 평생 이능파를 모아도 이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없으리라.
도원우는 보안 팀장이 기절하지 않은 걸 눈치챈 건지 그를 향해 걸어갔다.
보안 팀장이 흠칫 놀라 엎어진 상태로 꿈틀거리며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도원우는 그의 앞에 선 후였다.
“도…… 도련님…….”
“……당신처럼 관계없는 사람도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숨을 가다듬은 도원우가 다시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도원우가 착용한 전기술 서포터에 다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파지직……!
“그래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도원우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보안 팀장의 정신이 끊겼다.
정문을 완전히 제압한 걸 확인한 도원우는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렸다.
몇 초 후.
일부 구역이 일반 전기가 아닌 이능파를 통해 비상 전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도원우의 온 힘을 다해도 부술 수 없던 전원 장치가 있는 곳이라면 TC 연구소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연구가 진행되는 곳임이 분명했다.
“……역시 안내도에 표시되지 않는 지역이군.”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이능파를 흘려 그 위치를 파악한 도원우가 혀를 찼다.
도원우는 잠시 벽에 기대어 식은땀을 닦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도원우는 TC 연구소의 지하로 향했다.
* * *
황지호의 메시지가 쉬지 않고 날아왔다.
감시 중인 도원우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는 금방 급박한 것으로 바뀌었다.
홀로 TC 연구소에 방문한 도원우는 습격을 시작한 듯했다.
[황지호] 도원우가 TC 연구소 전역을 공격했다.
황당무계한 소리였지만 도원우라면 충분히 가능한 짓이었다.
도원우의 신분과 이능을 생각하면 내부 침입과 광역 공격이 어렵지 않을 거다.
혼자서 연구소 전역을 공격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힘을 모으고 최상급의 서포터를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내 생각이 맞았는지 황지호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황지호] TC 연구소 전 시설이 마비되고 보안 팀이 모두 제압되었다.
……황지호가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제압을 마치다니!
그간 도원우가 보인 추태 탓에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과연 열혈 소년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학생회장다운 행보였다.
역시 추하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활약이라고 감탄할 부분이었지만, 상황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도원우라고 해도 지금 이능파가 상당히 소모된 상태일 텐데, 마족이 대기할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단독 침입이라니.
‘도원우는 도시후와 달리 인맥이 넓고 힘도 있어. 단서를 얻었다면 끝까지 조사했을 거고, 이런 습격을 감행해야 할 이유를 찾아냈겠지.’
그 이유에는 마족이 얽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도원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짐작은 갔지만, 이대로 도원우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황지호의 메시지를 보니 더더욱 그랬다.
[황지호] 도원우를 쫓는 자가 있다.
[황지호] 곧 교전하게 될 것 같군.
그 ‘곧’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나] 알았어, 갈게.
[황지호] ……TC 연구소에 갈 생각이냐? 조의신, 너는 네 친구와 함께 대기해라.
황지호가 그 뒤로 또 뭐라고 메시지를 날리긴 했지만 확인을 제대로 안 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보진 못했다.
내가 홀로그램을 끄자 유상훈이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의신, 무슨 일 있냐?”
“미안,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볼게.”
내가 변명을 늘어놓고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상훈이 문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비켜 줘.”
“…….”
유상훈은 비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유상훈은 어지간한 일은 모르는 척 넘어가거나 묻지 않는 성격이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초조해졌다.
“그 급한 일이라는 거, 나와도 관계있는 거 같은데.”
“…….”
“바로 아니라고 말 못 하는 거 보니 맞네.”
유상훈은 확신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바로 거짓말을 했어야 했나 하고 뒤늦게 후회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나도 데려가라.”
……유상훈을 그 위험한 장소에 데려가라고?
나는 이번엔 곧바로 답했다.
“안 돼.”
“왜?”
“위험해.”
“너는 갈 거잖아.”
유상훈과 나의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유상훈과 말싸움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유상희가 그동안 유상훈과 말싸움할 때마다 얼마나 속이 터졌을지 실감했다.
유상훈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내 이능과 광림을 쓰면, 적어도 내가 다칠 일은 없다. 믿고 데려가라.”
그 말에 머릿속에서 두 개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유상훈과 같이 가는 것.
다른 하나는 유상훈을 여기에서 제압하고 나 혼자 가는 것.
‘두 번째 선택이 현명하지 않을까. 유상훈이 나한테 제압당하지 않을 만큼 강하다면 문제가 없을 거고, 제압당할 정도로 약하다면 데려갔을 때 문제가 될 거니까.’
유상훈을 공격하는 게 합리적일 텐데,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선택을 하면 유상훈과 앞으로 교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전에도 ‘리플레이’로 유상훈을 두 번이나 공격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는 내 무지로 인해 비롯된 사건이고, 유상훈이 용서해 줬다고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유상훈의 말을 믿고 데려갈 것인가.
아니면 처음 생각한 대로 움직여야 할 것인가.
“조의신……!”
고심 끝에 선택을 마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