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3)
황명호 대저택, 은호가 머무는 별채.
초등학생의 모습을 한 황호가 홀로그램 화면을 노려봤다.
몇 초 더 기다려 봤지만, 황호가 보낸 메시지는 읽음 처리조차 되지 않았다.
황호가 메시지를 기다리는 대상, 조의신은 또 그의 메시지를 안 읽고 무시하는 중이었다.
‘은인이 또 안읽씹을 하는군. 하필 이럴 때…….’
디바이스를 만지작거리던 황호가 은호의 눈치를 봤다.
은호는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시며 홀로그램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동하 형이 잔걱정이 많네요.’라고 말하는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TC 연구소 건을 두고 천동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정보 교환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황호가 멀리 위치한 분신을 움직이며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호 님, 손이 멈추셨네요. 의신이 형이 디바이스 메시지 확인을 안 하시나 봐요.”
어느 사이엔가 은호가 황호 쪽을 보고 있었다.
은호는 황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황호는 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뺀 후, 순순히 자백하였다.
“조의신이 대답이 없다. 메시지도 읽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를 보니 TC 연구소 쪽으로 올 것 같군.”
“제가 연락을 해 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 의신이 형은 바쁠 것 같네요. 의신이 형은 유상훈과 대화하고 있었으니까요.”
천동하와 대화를 마쳤는지 은호가 홀로그램을 끄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호는 은호가 천동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신경 쓰였지만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은호가 결론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저는 유상훈의 성격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은 것과 유상훈의 누나인 유상희의 성품을 고려해 봤을 때, 두 분이 싸우게 될 가능성이 있어요.”
“조의신과 유상훈이?”
“네, 유상훈은 의신이 형과 같이 움직이고 싶어 할 거예요. 하지만 의신이 형은 반대하겠죠.”
은호의 말을 듣고 보니 황호의 머릿속에 그 상황이 바로 연상되었다.
은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유상훈은 의신이 형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구하고 친분을 다진 상대예요. 유상훈이 강한 이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런 위험한 곳에 가려는 건 반대할 거예요.”
“그렇군…… 일단 조의신의 위치 추적부터 하겠다.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까.”
황호가 다시 막대 사탕을 물고 디바이스를 조작했다.
문득 디바이스를 조작하던 중,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항목을 이용하면 지금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황호만 이 생각에 미친 게 아닌지, 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황호 님, 디바이스를 배부할 때 긴급 상황에는 디바이스를 통해 은광고 학생들의 위치 추적을 할 수 있다는 항목에 동의하게 했죠?”
“그래.”
“지금 은광고의 학생인 도원우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니, 구실은 충분하네요.”
그리고 몇몇 학생들의 위치 추적을 시행한 결과, 의외의 결과물을 얻었다.
황호에게 말을 전해 듣고, 잠시 자신의 디바이스를 켜 홀로그램을 살피던 은호의 목소리가 조금 흐려졌다.
“……변수가 생겼군요. 서둘러야겠어요.”
* * *
지하로 향할수록 공기가 서늘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면에서 멀어졌기에, 혹은 도원우 자신의 이능파 감소로 인해 신체 기능이 저하됐기에 그렇다고 여겼다.
하지만 기온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내려가고 동시에 이능파 밀도가 증가하자 도원우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냉기를 이용해 무언가 한 건가. 연구 내용에는 그런 게 없던 것 같은데…… 정체를 알 수 없어. 주의해야겠다.’
실제로 TC 연구소의 주변엔 독기와 냉기를 머금은 동결형 이계가 배치되어 있었다.
아직 비활성화 상태이기에 독기가 뿜어져 나오진 않았지만, 지하에는 동결형 이계 특유의 냉기가 넓게 스며든 상태였다.
비록 도원우는 동결형 이계의 존재 여부와 그 정체에 관해선 알지 못했으나, 심상치 않은 것만큼은 느꼈다.
‘무사히 돌아가면 대책을 강구해야겠군.’
‘무사히’라는 전제가 붙자 도원우가 자조했다.
도원우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최소한 다른 사람이 해결할 수 있도록 단서를 남기면 되겠지.’
도원우는 냉기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이능파를 몸에 감고 목표 지점을 묵묵히 향했다.
이능파를 둘러 피부가 얼어붙는 건 막았지만, 여전히 추웠다.
‘그렇게 덥던 게 얼마 전 일 같은데.’
도원우는 문득 학생회 활동을 떠올렸다.
학생회에 소속된 이후로 수많은 일을 해 왔지만, 학생회장으로 보낸 1년은 가장 다망하고도 충실했다.
학생회장으로서 참여한 행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걸 꼽자면, 군사관학교와 치른 교류전이었다.
학생회는 단순히 기획과 진행뿐만 아니라 초대 은광고 응원단 창단 건으로 더욱 바빴다.
교류전이 치러진 건 9월 중순이었지만, 볕이 뜨거워 응원단 연습을 하다 보면 응원복이 금방 땀으로 젖을 만큼 덥게 느껴졌다.
1학년 중에 끝까지 지치지 않고 버틴 건 초인 안다인 정도였다.
2, 3학년은 그나마 낫긴 했지만, 곽경구도 버거워할 정도였다.
유독 더위를 잘 타는 곽경구가 얼음팩과 휴대용 냉방 기구를 들고 다니며 염준열에게 홍룡의 이능파에는 열이 묻어나니 최대한 이능파를 억제해 달라며 당부하곤 했다.
‘나한테는 과분한 임원들이었다…….’
도원우는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고자 덥거나 힘든 티를 안 내고 버텼는데, 한계가 올 때마다 3학년 학생들이 알아채고 배려를 해 줄 때가 있었다.
특히 학생부회장 지명수, 학생회 서기 유상희가 그랬다.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도원우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학생회 활동 중 가장 큰 힘이 돼 준 둘을 떠올리는 게, 마치 지금 기댈 곳을 찾느라 연상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 일은 나 혼자 해야 해! 주마등도 아니고,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 도움이 될 법한 정보를 저도 모르게 떠올리곤 한다.
지금 상황이 딱 그 꼴이라 도원우는 냉정하게 자신을 다잡았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계단의 끝이 보였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은 더 보이지 않았지만, 처음 도원우가 감지한 위치는 더 밑에 있었다.
똑, 똑똑.
도원우가 이능파를 실어 잠시 바닥을 두드렸다.
바닥 밑은 도원우의 예상대로 건물이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강력한 결계로 덮인 탓에 쉽게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도원우의 감각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철쇄연쇄(鐵鎖連鎖)로 길을 열어야겠군.’
파아아앗!
도원우의 손바닥에서 강렬한 이능파가 발산되었다.
이능파는 사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도원우의 광림, 철쇄연쇄(鐵鎖連鎖)는 그의 이능파를 상상하는 형태와 재질의 사슬로 구현해 내고, 실체화하였다.
쉬이익!
도원우가 손을 움직이자 그가 부른 사슬이 촘촘하게 하나로 엮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원우의 몸통만 한 굵기로 사슬이 하나로 뭉쳤을 때, 그가 손짓했다.
“가라!”
콰아아앙!
거대한 사슬이 한 방에 바닥을 관통했다.
굉음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바닥과 결계의 잔해가 폭발했으나, 무엇 하나 도원우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도원우는 완전히 바닥이 뚫린 것을 확인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아아아…….
밑을 관통한 거대한 사슬이 공기 중에 녹아 사라졌다.
도원우는 크게 드러난 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을 보고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대체……!’
TC 연구소의 바닥 아래는 마치 식물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지하 식물원은 전체적으로 자줏빛을 띠고 있었는데, 이는 조명 탓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식물이 두른 이능파 탓이었다.
도원우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형태를 한, 식물로 추정되는 무언가로부터 알싸하고 독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냉기 속에서 저런 힘을 보이는 식물이라니, 정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도원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곳은 유상희가 엮인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이었다.
도원우는 이런 기괴한 광경 속에서 유상희가 어떤 짓을 당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도원우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아래로 뛰어들었다.
‘인공 강림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상위 존재’를 이 세계로 끌어들일 힘의 매개체가 존재한다고 했다.’
도원우는 감각과 이능파를 끌어올려 그 힘의 매개체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독초가 뿜는 이능파에 자꾸 정신이 무뎌지려 했다.
도원우는 정신을 다잡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TC 연구소의 지도를 그리며, 중앙으로 향하려 했다.
‘정당한 절차를 밟으면 그 힘의 매개체라는 걸 빼돌리겠지. 급습해서 내가 직접 파괴하는 수밖에 없어!’
도원우가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크르르르…….
그그극…….
기긱…… 기기긱!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도원우가 몸을 굳혔다.
도원우는 이 온실과 이 안에 존재하는 독초의 정체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저 소리 만큼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계 공략을 해 온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알아챌 법한 소리였다.
‘에너미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야!’
도원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TC의 이름을 건 연구소 밑에 에너미가 존재하다니!’
지하에 존재하는 결계의 역할 중 하나는 플레이어 위성이 에너미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도원우는 서포트를 착용한 손에 힘을 더했다.
플레이어의 사명 중 하나는 에너미의 토벌.
플레이어로서 에너미를 방치할 수 없었다.
“손님이 오셨군요.”
그 순간, 도원우의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원우는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상대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제님이 부재중인 사이, 이곳을 맡기로 한 몸. 그 상대가 TC의 도련님이라고 한들 그냥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딱! 따악!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손을 튀기자 허공에 씨앗이 솟아올랐다.
불길한 자줏빛의 이능파를 머금은 무언가는 척 봐도 멀리서 들리는 에너미의 울음소리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도원우는 저자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 판단했다.
‘설마, 상대는 진족인가! TC 연구소에서 진족과 손을 잡고 있던 건가?’
도원우는 진족과 싸워 본 경험이 얼마 없었다.
심심해하던 용제건이 몇 번 대련을 청한 적이 있어 힘을 겨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대련에 불과했다.
실전에서 진족과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만전이 아닌 상태로, 에너미와 진족을 동시에 상대하라고?’
도원우는 각오를 굳혔다.
승산이 없다고 해서 도망가거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빨리 끝내 드리겠습니다.”
진족이 그렇게 외친 순간, 도원우는 온몸의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서포터 끝에 이능파가 맺히고, 당장이라도 사슬이 소환되려 한 순간.
“……!”
휘익!
로브를 뒤집어쓴 진족이 크게 물러갔다.
동시에 누군가가 도원우의 앞을 가로막듯이 섰다.
도원우는 힘을 모으던 중이기에 그 빠른 움직임을 전부 보진 못했지만, 언뜻 실루엣을 보았다.
‘까마귀 가면……?’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마귀 가면을 쓴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두 명……!’
둘 다 이능파를 두르고 있었는데, 다른 한 명은 몰라도 남은 한쪽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상대였으니까.
‘……상훈이가 왜 여기에?’
도원우의 앞을 가로 막고 선 까마귀 가면을 쓴 인물 두 명.
그중 하나는 유상훈이었다.
“……우리만 온 게 아니야.”
자신을 알아본 걸 눈치챈 듯, 유상훈이 가면 너머로 한마디 했다.
탕! 탕탕!
끼에에에에!
파아아아!
그 말에 이어서 말하는 것처럼, 멀리서 총소리와 함께 이능파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원우는 믿을 수 없는 걸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 이능총을 연사하는 신탄의 사수와 불길한 빛의 식물을 불태우는 홍룡이 보였다.
모두 얼굴을 가렸지만 도원우가 못 알아볼 리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학생회 임원들이 이 자리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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