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또 다른 후보 (4)
계이담은 선도부를 그만둘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핑계를 대고 탈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다른 학생이 선도부실로 들어왔다.
새로 등장한 인물은 계이담이 아는 인물이었다.
‘어, 저건…… 수석이잖아!’
입학식 때 본 신입생 대표 천동하가 와 있었다.
반무테 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는데 시선이 아주 냉랭했다.
천동하의 차가운 인상에 계이담이 잠시 졸아든 사이, 오혜지가 천동하에게 말을 붙였다.
“아, 네가 동하지? 어서 와. 입학식 때 굉장하더라.”
“입학식이요?”
“응, 그때 신입생 선서문 딱 한 번 읽고 다 외웠잖아. 입학식 진행 준비 돕느라 리허설도 보고 있었거든.”
“선서문이 길지 않아서 금방 외웠어요.”
계이담은 시큰둥한 기분으로 그 대화를 들었다.
당시 직접 입학식 장면을 본 사람의 입장에선 신입생 선서문이 딱히 짧게 느껴지진 않았다.
머리 좋은 티가 나는 천동하를 보니 갑자기 아니꼽게 느껴졌다.
계이담은 천동하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 독종 새끼도 머리는 좋았는데, 복무신조도 한 번에…… 어?’
그러나 계이담의 생각은 물거품처럼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무의식 너머로 허무하게 사라진 생각을 떠올리려 애써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계이담이 황망하게 서 있을 때, 따가운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안녕하십니까! 마진승입니다! 선도부에는 직접 지원해서 입학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계이담은 마진승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에 고무망치가 있었다면 마진승을 향해 휘둘렀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행히 계이담이 얼굴을 구기기 전에 천동하가 마진승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조언했다.
얘기하는 걸 들으니 두 사람은 같은 반인 것 같았다.
“아, 그 지원 동기가 특이한 애구나.”
오혜지는 마진승과 초면이지만 그에 관해 조금 아는 듯했다.
그런데 오혜지의 말 중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지원 동기? 나한테 그런 거 안 물어보던데…….’
애초에 계이담은 함근형의 권유로 들어온 거니 지원 동기 같은 건 없었고, 지원 동기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정황상 마진승은 추천을 받지 못해 직접 지원 후 면접을 거쳐 입부한 듯했다.
마진승은 묻지도 않은 지원 동기를 술술 읊기 시작했다.
“저는 은광고에서 처음 마주친 화염 계열 능력자를 라이벌로 삼아 쓰러뜨리기로 했습니다! 그 라이벌이 학생회에 들어갔기에 저는 선도부를 택했습니다.”
“그래? 그 라이벌이 누군데?”
“염준열입니다!”
염준열의 이름이 나오자 구경하고 있던 이들 모두가 놀란 기색을 띠었다.
계이담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으론 마진승을 바보 취급 하고 있었다.
‘용족의 후예를 라이벌로 삼아? 제정신인가.’
2학년 학생들이 마진승에게 왜 화염 계열 능력자를 라이벌로 삼은 거냐고 물으니, ‘제 광림이 불에 약해서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계이담은 마진승이 용감한 게 아니라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용족의 후예인 데다가 이능의 상성도 안 맞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머리가 텅텅 비어서 저렇게 목소리가 크게 잘 울리는 건가.’
계이담은 선도부원들이 마진승을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진승을 깔보는 분위기가 되면 기류에 편승해 자신도 한마디 뱉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마진승을 비웃지 않았다.
“하하하, 우리 학교에 용족 교사가 있으니까 조심해. 그냥 재밌어하면서 구경할 것 같긴 한데, 준열이가 다치면 가만있지 않을걸.”
“힘내라! 가세는 안 할 거지만 응원하고 있을게.”
따뜻한 말이 오가는 걸 보니 계이담은 자신이 마진승보다 더 멍청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물러 터졌네.’
계이담은 마진승에게 하려 했던 신랄한 말들을 전부 삼키고 잠자코 있었다.
지금 계이담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과묵한 척하는 것뿐이었다.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마.”
“알았어!”
머리도 좋고 냉정해 보이는 천동하조차 마진승을 비웃지 않았다.
계이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머저리가 아니라, 저놈이 머저리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좀처럼 선도부를 탈퇴하지 못하는 채로 시간이 흘렀다.
매일 아침 탈퇴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0반의 폭주, 0반의 습격, 0반의 난동, 0반의 복수 등등에 대처하다 보면 금방 하루가 끝나곤 했다.
1학년 학생들은 주로 같은 1학년 0반을 상대했는데, 역대 최강, 최악의 악동이라고 꼽힐 만큼 사고가 잦았고 그 내용이 몹시 흉악했다.
2, 3학년 선도부 선배들이 도와주면 다소 빠른 수습이 가능했을 거다.
그러나 2, 3학년 0반도 툭하면 미쳐 날뛰기에 선배들은 바빴다.
결국 1학년 0반이 일으킨 문제는 1학년들끼리 대처해야 할 때가 많았다.
“아니,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가 듣고 싶으면 얌전히 기숙사 방구석에 처박혀서 들을 것이지. 왜 호연관을 점거하고 지랄이야.”
“권제인 선배님이 호연관에서 자주 연주했나 봐. 내한하라는 기원을 담아서 저 짓거리를 한 거래.”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내한 안 한 지는 한참 됐잖아! 거기서 음원을 틀든, 고사를 지내든 안 올 게 뻔한데.”
오늘 2학년 0반은 권제인의 콘서트 영상 관람을 위해 허가 없이 호연관을 점거하며 소동을 피웠다.
호연관 사용 허가는 잘 떨어지지 않았기에 기습적으로 쳐들어가 점거한 듯했다.
“크윽, 오늘도 활약하지 못했어……!”
“진승이 너는 점심시간에 준열이한테 대련 신청 했다가 이능파를 다 소모했잖아. 0반 애들한테 당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천동하의 일침에 마진승이 시들시들한 얼굴을 했다.
마진승이 광림으로 부르는 허접한 풀 쪼가리와 닮은꼴이었다.
천동하 옆에 마진승이 서 있으니 더더욱 한심하게 보였다.
‘염준열의 라이벌을 꼽는다면, 저 천동하 정도는 되어야지.’
천동하는 오늘도 대활약했다.
1학년 0반에 의해 봉쇄된 호연관을 천리안으로 샅샅이 훑은 천동하가 진입 작전을 짜 지휘했는데, 수립된 작전, 명확한 지시 뭐 하나 흠잡을 게 없었다.
그때, 이야기의 중심이 계이담 쪽으로 흘렀다.
“이담아, 오늘도 고생 많았어.”
“이담이 없었으면 제갈재걸 선생님 오시기 전까지 못 버텼을지도 몰라.”
계이담에게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요즘 들어 선도부원들과 부쩍 친해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선도부 활동을 하다 보니 전우애 비슷한 게 싹텄다.
그들은 말수가 적은 계이담에게도 격 없이 잘 대해 줬다.
“내가 광림 조절을 못해서 우리 쪽 이능파도 봉쇄됐잖아.”
계이담은 민망한 기분을 숨기며 말했다.
계이담의 광림, ‘밤정적의 안개’는 안개에 닿은 대상의 이능파 운용을 방해한다.
문제는 이 안개의 효과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계이담의 안개는 계이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이능파 흐름을 저해시켰다.
그래서 계이담의 광림에 의해 2학년 0반은 물론 선도부원들도 이능파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아직 안개를 잘 컨트롤할 수 없어. 급한 김에 쓰긴 했지만…… 위험했다.’
계이담이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금찬솔과 왕찬솔의 이능은 성가셔. 우리 쪽 이능파도 봉인되긴 했지만, 좋은 판단이었어.”
천동하의 말투는 평소대로 냉랭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천동하에 이어 마진승도 큰 목소리로 계이담을 칭찬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울컥해졌다.
단순히 고마워서가 아니었다.
‘친해져 봤자 어차피 쟤들은…….’
갑자기 아주 끔찍한 광경이 떠올랐다.
지금 눈앞의 두 선도부원, 천동하와 마진승이 피투성이가 된 장면이었다.
‘어?’
하지만 그 장면은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계이담은 방금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려고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해…….’
시간이 흐르며 계이담의 증상은 더 심해졌다.
5월에 이르자 1학년 0반이 제갈재걸에게 감화된 덕에 선도부의 일이 크게 줄긴 했지만, 그 외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문제는 계이담의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학교는 뭔가 이상해.’
계이담은 은광고의 어딘가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 기분 나쁜 감각은 잊을 만할 때쯤 일상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요새 것들은 말이야, 예의를 모른다고! 크흠.”
계이담이 느끼는 불쾌감의 근원지 중 하나는 교사 최편득이었다.
최편득은 만만한 학생이나 자신보다 연차가 낮은 교사에게 꼰대짓을 했기에 학생 대부분이 불쾌하게 여겼다.
계이담과 같은 반 여학생인 허채아는 최편득에게 시달려 자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계이담에게 자퇴 건으로 상담을 요청한 허채아가 이렇게 한탄했다.
“왜 이사회는 저런 교사를 내버려 두는 걸까. 며칠 전엔 나를 감싸던 공청훤 선생님께도 심한 소리를 하더라…….”
최근 최편득은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인 공청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타깃이 된 공청훤은 최편득에 비해 이능, 인망, 외모, 성품 전부가 훌륭했기에 학생들의 원성은 더더욱 커졌다.
‘저런 새끼를 역겨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뭔가 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최편득이 떵떵거리는 것 외에도 이상한 일이 많았다.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기사를 써 대고 신문부에 싸움을 거는 듯한 교지편집부가 그랬다.
선도부에서 교지편집부의 부원과 접촉한 적도 있었다.
그 부원은 선도부원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걸 거부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계이담은 교지편집부 부원의 묘하게 겁에 질린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마음에 걸리면 뭐 해. 어차피 금방 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잊을 텐데!’
계이담은 자신이 점점 미쳐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계이담의 정신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계이담이 학기 초에 비해 호전적이고, 신경질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광고에는 대놓고 미친 자들이 많아 계이담은 정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대놓고 미친 자의 대표 사례가 계이담의 눈앞에 있었다.
“어차피 수석과 차석은 도원우기환도원우기환…… 공부를 해도 차석 안 해도 차석…… 히히히.”
한밤중, 천익산.
엑스트라처럼 생긴 2학년 학생이 개소리를 지껄이며 산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정체는 2학년 0반 반장 우기환이었다.
‘입학 초엔 그래도 정상에 가까웠다던데.’
은광고에 입학하기 전까지, 정확히는 도원우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던 우기환.
그는 은광고에 들어와서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다소 괴짜스러운 구석이 있어도 그나마 0반 중에선 정상이라는 평가를 받던 우기환이었으나, 계속된 패배로 맛탱이가 갔다고 한다.
계속 차석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굉장한 실적인데, 본인은 미칠 것 같나 보다.
아니, 저 꼴을 보니 우기환은 이미 미친 것 같았다.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답답한 마음에 밤 산책을 나왔다가 못 볼 걸 본 계이담은 발을 돌렸다.
그러나 산을 내려가기 전, 누군가가 나타났다.
“기환아, 감기 걸린다. 그만 내려가자.”
홀연히 등장한 인물은 2학년 지익회 소속 성시완이었다.
성시완은 기숙사생 전원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고 있어 계이담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걸곤 했다.
‘……오지랖 넓은 놈.’
성시완은 그 넓은 오지랖을 우기환에게도 적용할 모양이었다.
역시나 우기환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래? 그러면 임연화 선생님 부를까?”
“크윽…… 난 담임에게 지지 않을 거다!”
“하하하, 한 번이라도 이기고 그런 소리를 해.”
결국 우기환은 성시완을 따라 산을 내려가게 되었다.
성적은 우기환이 더 좋았지만, 사람 다루는 법은 성시완 쪽이 위였다.
성시완은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계이담에게도 말을 걸었다.
“이담아, 같이 내려가자.”
우기환도 한 수 접어 주는 저 오지랖 넓은 선배에게 찍히면 귀찮다.
계이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두 선배를 따라 하산했다.
하산하는 동안 성시완이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했으나 우기환은 이해하지 못할 헛소리나 해 대고 계이담은 입을 계속 닫고 있었다.
계이담은 하산하는 내내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쩐지 천익산 풀들이 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천익산의 초목들이 모두 말라 죽고 땅이 썩는 광경이 잠깐 머리에 스쳤다.
그러나 계이담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생각해 봐야 소용없어…….’
그리고 그 야밤의 산행 이후, 성시완이 계이담에게 자주 말을 걸게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