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54화 (452/925)

66. 또 다른 후보 (6)

계이담은 순백의 대검이 남기는 궤적에 시선을 빼앗겼다.

백호는 계이담의 시선을 느끼고 싸늘하게 노려봤다.

등골이 얼어붙는 듯한 섬찟한 기분에 계이담의 몸이 굳은 사이, 백호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넋을 잃었던 계이담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신화계 호족이 왜 여기에 있지? 쟤가 튜토리얼에 나왔던가? 아니, 나왔으면 몰살을 안 당했겠지!’

계이담은 안다인을 비롯한 여캐 몇 명이 나올 때를 제외하면 스크립트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영혼 없이 화면을 두드리며 딴짓을 할 때도 많았다.

계이담은 툭하면 플마고의 튜토리얼에 관해 깠지만, 정작 그 내용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백호군’은 엔딩까지 버티는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으나 튜토리얼에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삐이이이익!

계이담의 디바이스에서 플레이어SAT-K가 보낸 에너미 접근 경보음이 울렸다.

결계가 해제되어 에너미를 인식한 플레이어 협회 위성이 뒤늦게 에너미 근방에 있는 스마트 기기에 알람을 보낸 것이다.

알람에 이어서 토벌 종료 안내문이 업데이트되었다.

―수배 에너미, 리노세론 13호가 토벌되었습니다.

―플레이어SAT-K가 해당 지역의 기록 기기에 성공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플레이어SAT-K가 토벌 과정의 전후 관계를 분석합니다.

계이담은 내부 상황을 전혀 몰랐기에 보나 마나 토벌 최대 공헌자는 백호일 것이라 짐작했다.

백호가 내부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의 실력이라면 리노세론 정도는 한 방에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계이담의 예상은 빗나갔다.

―토벌 최대 공헌자: 조■■(미등록 일반인: 정보 공개가 제한됩니다.)

계이담은 ‘조■■’라는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아무리 봐도 백호의 가명 같지 않았다.

‘진족이 위장 신분을 쓸 때는 보통 플레이어로 등록되지 않나? 17세 미만으로 위장할 때에는 안 되겠지만…… 그럼 백호가 쓰러뜨린 게 아닌가?’

생각을 길게 할 틈이 없었다.

계이담은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났다가 다른 학생들과 섞여 다시 돌아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체육관 안이 어떻게 되었을지 신경 쓰였지만, 우선 덮어 두기로 했다.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자, 의료진은…… 지금 이쪽으로 이동 중이네.’

에너미 알람을 본 교사와 학생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계이담은 체육관을 맴돌다가 군중에 섞였다.

부상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체육관에 있던 이들 전원이 구조되어 계이담도 한시름 놨다.

‘김신록 선생님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수험생들도 살아남았고…… 잘됐다.’

안심하고 나니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간 품어 온 의문과 고통의 답을 알게 되어 의욕이 솟았으나 혼란과 공포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왜 플마고 세계에 있는 거야! 아, 게임도 개 많은데 하필 이 미친 개망겜에……!’

계이담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플마고를 대충 플레이한 계이담이 알고 있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큼직큼직한 사건은 기억하고 있었다.

스토리 진행도에 따라 추가되던 신캐를 포함해 플레이어블 캐릭터 수는 약 세 자리.

그 숫자가 어떻게 0이 되었는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 엔딩을 생각하면 사실상 도망갈 곳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계이담 혼자 살아남기 위해 준비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겁이 나도 도망갈 수 없었다.

‘어떻게 그놈들을 버리고 가! 그게, 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었는데!’

유독 계이담을 혼란스럽게 하던 인물들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었다.

이전 세계에선 안다인 일러스트를 본다고 지른 설정집을 훑어보다 대충 이름만 본 캐릭터에 불과했다.

청춘을 바쳐 악플을 달 정도의 개망겜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계이담의 스승, 선배, 동급생들이 되었다.

계이담을 뒤흔드는 건 플레이어블 캐릭터뿐만이 아니었다.

‘지익회는? 어떻게 됐더라. 게임엔 안 나오는 것 같았는데……?’

기숙사 자치기구가 콘크리트 붕괴 사건을 계기로 없어졌다는 게 생각났다.

지익회 전멸.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계이담은 눈앞이 시커멓게 변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

게임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을 정도로 허무하고 끔찍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때 시완이 형도, 다른 지익회 멤버들도 죽는 거야?’

지익회뿐만이 아니다.

선도부에 있는 이들도 다 죽게 될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계이담은 처음 이 세계에 온 직후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다짐을 하게 되었다.

‘도망가더라도 같이 가야지. 그런데 다들 절대 안 도망칠 것 같은데…… 그러면…… 싸워야지.’

계이담은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이 세계에 오기 직전 층간소음으로 치부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후보 ‘계이담’의 지원 프로그램을 종료합니다.〉

계이담은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를 이 세계에 보낸 무언가다!’

그러고 보니 입학식 직전에 후보, 지원 프로그램 따위의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지원 프로그램 종료 메시지에 이어 다른 메시지도 떴다.

〈‘계이담’의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후보 특전을 사용합니다.〉

후보 특전?

그 특전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계이담은 긴장하며 특전으로 무엇이 등장할지 기다렸다.

〈지원 프로그램 가동으로 인한 리소스 부족.〉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후보 특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메시지는 뚝 끊겼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플마고 유저였던 계이담은 곧바로 상황 파악을 했다.

“개애애애망겜! 특전 어디 갔어! 장비나 스킬은 던져 주고 미션을 줘야 할 거 아냐! 예나 지금이나 운영 개판으로 하네!”

계이담에게 주어졌어야 할 무언가는 그 지원 프로그램이라는 것으로 대체된 듯했다.

지원 프로그램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프로그램조차 종료되었다고 안내받지 않았던가.

계이담은 맨몸으로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이담은 절망했으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직 희망이 있었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13조는 전원 생존 했어.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계이담은 백호가 원작과 다르게 행동한 것 외에도 다른 요인이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 다른 요인이 무엇인지는 금방 판단되었다.

‘조의신? 13조에 조의신이 있었다고?’

플마고에는 조의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NPC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계이담이 잊을 리가 없었다.

‘내가 적합체 후보라고 했지. 그러면 적합체는 조의신인가……?’

계이담은 의문의 시스템 메시지 속에서 언급된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가 조의신이라 추측했다.

계이담과 조의신이 동일한 후보이고, 조의신은 후보 특전이라는 걸 받았을 뿐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조의신이 등장한 곳과 시점을 고려해 봤을 때, 조의신이 후보와는 다른 무언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확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확고해졌다.

‘조의신은 13조가 있는 체육관에서 시작했어.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 속의 ‘이름 없는 조연’이 된 거야.’

조의신이 실기 시험을 치르는 순간 플마고에 관한 기억이 떠오른 것.

염준열과 아주 흡사한 힘을 다루는 ‘적벽괴도’의 존재.

이 둘만 생각해도 조의신은 자신보다 더 특별한 위치인 듯했다.

‘……그 게임 폐인 독종이 이 세계를 바꾸고 있구나.’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조의신은 머리도 좋고 이 세계에 애정도 있다.

거기에 시스템으로부터 특별한 능력까지 받았다면 몹시 든든했다.

그러나 계이담은 안심할 수 없었다.

‘망했다…….’

계이담은 그 똑똑하고 능력 있는 독종을 얼마나 괴롭혔던가!

은광고는 군대처럼 나이와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없다.

절대로, 조의신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근데 얼굴도 바뀌었겠다 못 알아보지 않을까?’

계이담은 갈등하면서도 살얼음을 밟듯이 학교생활을 했다.

드디어 안다인이 입학했는데, 안다인은 조의신이 속한 0반 바로 옆 반인 데다 둘은 개인적인 교류까지 있어서 쉬이 접근할 수 없었다.

성시완이 조의신을 소개했을 때는 식겁했지만, 조의신은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뭔가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안 도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운 좋게 2학기까지 들키지 않았다.

그 운도 오늘 끝나 버렸지만 말이다.

*    *    *

계이담의 1학년 시절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언급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비화를 들을 수 있어 다소 유익했다.

인성 파탄자 계이담이 사실을 말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저 성질머리를 오늘까지 숨긴 걸 보면 기억 상실이 맞는 것 같긴 했다.

계이담은 지원 프로그램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듣는 입장에선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 지원 프로그램이라는 건 분명 계이담이 보낸 1학년 시절 그 자체겠지.’

초상우주는 만능이 아니다.

그러니 저런 악플러도 후보랍시고 데려온 거다.

1년 사이에 계이담을 갱생시키고 이 세계를 위해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

그게 지원 프로그램의 정체일 거다.

‘그 지원 프로그램 때문에 적합체 후보가 쓴다는 특전은 못 쓴다지만, 1학년 시절을 겪지 않았다면 은광고를 버리고 도망쳤겠지.’

특전이 아깝긴 하지만 저런 놈한테 큰 힘이 주어지면 안 된다.

지금 계이담이 사용하는 광림도 지나치게 성능이 좋다.

있으나 마나 한 쓰레기 같은 광림이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얼차려를 실행했다.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좌우, 앞뒤로 구르게 하다가 움직임이 더뎌질 때마다 걷어찼다.

계이담은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내 말대로 굴러다니다가 밸런스가 무너져 드러누웠다.

“왜 안 굴러.”

“컥, 팔을 못 쓰는데 뒤로 어떻게 굴러!”

“그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토 달지 말라고 했잖아.”

“아, 아까는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라고…….”

“토 달지 마.”

퍽! 퍼억!

계이담이 억울해하는 얼굴로 처맞았다.

계이담한테 한 말을 잊어버려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갈굼의 기본은 불합리함이다.

A, B 두 개의 선택지를 주되 어느 쪽을 택하든 욕을 처먹는 결과만을 준비하는 것.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주는 게 진정한 갈굼이다.

나는 계이담을 실컷 패고 갈구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는 것도, 후보로서의 특전도 없으니 써먹을 구석이 없네. 저런 놈을 친구라고 생각해 주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착하다.’

아무리 재 봐도 계이담의 평가는 그 정도였다.

계이담이 억울해하지도 못할 만큼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 슬슬 이놈에게 쓰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백호군을 만나러 갈까.’

계이담이 이 모양이 됐으니 오늘 성시완과 비밀 결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힘들 거다.

성시완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늘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호랑이 저택에 방문하겠다고 미리 약속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지만, 예전에 백호군이 올무 보러 와도 되냐는 말에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계이담을 대련실에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의신이가 이겼나 봐요!”

“오, 수고했다.”

“의신아, 배는 안 고파? 애들이랑 같이 간식 준비해 왔어.”

“컵을 드리겠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 반 아이들 중 현재 기숙사 소속인 아이들이 있었다.

사월세음, 맹효돈, 한이, 권레나, 목우람…….

해는 진작에 졌는데, 기숙사생들은 다 나를 기다려 줬나 보다.

계이담 같은 쓰레기를 상대하다가 우리 반 아이들을 보니 심신이 정화되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반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의신아, 안녕. 다친 데는 없구나. 다행이다.”

염준열이 있었다!

왜 귀가하지 않고 기다린 걸까.

내 제자가 나를 걱정해 준 건가?

“준열이가 이 대련에 관심이 많길래 같이 기다렸어. 대련 기록을 공개할 생각은 없어?”

그 뒤에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제건도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에 진족은 하나가 아니었다.

‘……왜 저 모습으로 있는 거지?’

이사장 황명호 모습을 한 황지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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