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바꿀 수 없는 것 (5)
신화와 신비가 대지에 충만했던 시절.
용왕신은 여의보주(如意寶珠)로 용족과 연이 닿은 존재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어떤 이는 난치병이 씻은 듯 낫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막대한 재물을 얻기도 했다.
물론 소원이 항상 소원을 빈 이들이 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영원한 삶을 소망한 자가 석상이 되어 영원히 땅 위에 서 있게 되거나, 명성을 원하던 이가 악명도 높아져 처형당하는 게 그러했다.
소원이 이루어진 인간들이, 그것을 목격한 산령과 천령들이 이 사실을 널리 퍼뜨려 여의보주의 위상이 점점 높아졌을 때.
용왕신이 아끼던 여의보주가 생(生)을 얻었다.
용왕신은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는 여의보주에게 말을 걸었다.
[눈을 뜨거라.]
용왕신이 흩뿌리는 오색의 채운 속, 눈을 뜬 여의보주는 옥을 깎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의보주의 이목구비는 수려했고 옥빛의 머리카락과 눈은 보석처럼 빛났다.
여의보주는 용왕신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누구의 소원을 들어주면 될까요?
사람의 형태로 화한 여의보주는 감정을 가진 존재들의 희로애락에 관심이 많았다.
여의보주는 삶을 얻은 후에도 다른 이의 소원을 들어주며 그들을 관찰하길 원하는 듯했다.
여의보주의 말과 표정에서 용왕신은 그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여의보주가 타고난 본질은 유희.
삶을 얻은 여의보주는 즐거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용왕신은 여의보주가 제 손에 있는 것보다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게 더 좋으리라 판단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용왕신의 말을 들은 여의보주의 웃음이 짙어졌다.
자유를 얻은 게 몹시 기쁜 듯했다.
용왕신은 제 손을 떠나는 여의보주에게 충고했다.
[네 힘으로도 이룰 수 없는 소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삶을 얻어 용왕신의 손을 떠난 여의보주는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과분한 소원을 빌면 여의보주의 혼이 깎이고 육신이 무너지고,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생을 좌우하는 소원은 당사자가 원해야만 이루어 줄 수 있다.
수많은 제약을 달고도 여의보주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여의보주는 해저에 있는 용궁을 기점으로 유람을 즐겼다.
대륙과 바다 너머를 얼추 둘러본 후, 여의보주는 한반도에 도달했다.
여의보주는 한반도에 머무르던 용과 수다 떨기 좋아하는 산령과 천령으로부터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다.
‘천신과 신인, 호족과 웅족의 반목, 외적의 침입…….’
여의보주가 대륙 너머에서 유희를 즐기는 사이, 한반도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뒤늦게 이야기를 들은 여의보주는 그 자리에 있지 못했던 점을 매우 아쉬워했다.
여의보주는 늦게나마 한반도 사정에 참견을 하기로 했다.
여의보주는 한반도에 자리 잡은 용족의 거점을 중심으로 이 땅을 둘러보고, 호족과 웅족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의보주는 원활한 관찰과 개입을 위해 호족과 웅족에 선을 대 보려 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은 여의보주를 경계했다.
좀처럼 접점을 갖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의보주는 호족의 영역을 빠져나오는 어린 후예와 마주쳤다.
‘저 아이가 소문으로 듣던 호족과 웅족의 후예로군.’
붉은 머리카락의 후예는 아주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정한 인상을 주는 오른쪽 외꺼풀 눈과 그윽한 느낌을 주는 왼쪽 쌍꺼풀 눈이 인상적이었다.
수심이 드리워진 소년의 얼굴에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여의보주는 몹시 기대가 되었다.
여의보주는 호족의 후예가 자신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 주는 걸 기다렸으나 소년은 그를 지나쳐 갔다.
소년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
여의보주는 포기하지 않고 소년을 따라갔다.
소년이 향한 장소는 예상외였다.
소년이 향한 곳은 용족의 거점이었다.
‘용족의 거점으로 오고 있는데, 우리 쪽에 볼일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여의보주가 용족의 일원으로서 소년을 맞이하는 건 어떨까.
그저 소년이 길을 잃어 이곳에 온 것뿐이라도 손님으로 대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소년이 용족의 영역에 들어오기 직전, 누군가가 그를 납치한 것이다.
소년은 매섭게 저항하였으나 상대의 얼굴을 본 소년이 일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그후 바로 제압되었다.
기절한 소년을 납치한 이들은 신중하게 흔적을 지워 가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여의보주는 생각했다.
‘이대로 저 아이가 사라져서 추적을 한다면 용족의 영역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겠지.’
납치된 소년은 호족과 웅족의 후예지만, 호족의 수장 대리 황호가 저 소년을 호족의 후예라 선언했다.
만약 저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황호는 호족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것이다.
만약 호족이 소년의 흔적이 용족의 거점 주변에서 끊긴 걸 발견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불 보듯 뻔했다.
가뜩이나 여의보주가 호족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않았던가.
여의보주는 자신이 의심을 사리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용족과 호족을 이간질하려 한다는 것도.
여의보주는 이 흉계를 두고 크게 환희했다.
‘개입할 이유가 생겼어!’
용족을 끌어들였으니 여의보주가 당당히 움직일 수 있었다.
여의보주는 곧바로 납치된 소년의 뒤를 쫓았다.
소년이 끌려간 곳은 웅족의 숨겨진 부락이었다.
소년의 납치는 호족과 웅족 사이에 벌어진 반목의 연장선인 듯했다.
웅녀와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을 미끼로 소년을 감언이설로 꾀어낸 누군가는 웅족이 아닌 것 같았지만.
―안녕?
여의보주가 무사히 소년을 구해 웅족의 부락을 탈출한 후.
크게 상심해 있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다.
여의보주를 의심하지 않고 따라 나온 것도 자포자기한 결과물인 듯했다.
여의보주는 소년과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아이를 붙잡고 있자니 영 흥이 살지 않았다.
여의보주는 소년과 이야기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래다줄게.
―……어디로요?
소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비록 소년의 음성이 우울하긴 했으나 여의보주는 그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어차피 저를 기다리는 분은 아무도 없어요. 아버지는 형틀에 묶여 계시고, 어머니는 저를 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여의보주보다 한참 키가 작은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면 그 인상적인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친구도 없어.
물기 어린 목소리에 배신감과 슬픔이 강하게 묻어났다.
납치 사건을 주도한 자는 소년이 유일하게 친구로 여기던 이였나 보다.
여의보주는 충동적으로 비애에 젖은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여의보주야. 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소원을 빌어 보는 게 어때?
소년의 아버지는 적호, 어머니는 웅녀다.
이 둘을 어찌하는 건 제아무리 여의보주라 해도 불가능했으나 소년의 친구를 만드는 소원 정도는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의보주의 말을 듣던 소년은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소원은 빌지 않을래요. 아버…… 적호 님은 소원을 빌어서 친구를 만들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에 여의보주는 소년이 제 아버지에게 품은 동경과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여의보주는 소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여태까지 여의보주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이렇게 거절한 이는 없었기에 흥미가 돋았다.
그래서 여의보주가 제안했다.
―그러면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줄게.
―전 당신의 이름도 모르는데요?
―다들 나를 여의보주라고 불러.
―그게 이름이에요?
―진명이 따로 있긴 해.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여의보주의 말에 소년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당신을 그냥 여의보주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그건 저를 그냥 후예나 호족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지상에 존재하는 여의보주는 하나뿐이다.
구분이 어렵지 않으니 딱히 가명을 만들 필요를 못 느꼈지만, 소년이 저리 말하니 여의보주는 이름이 갖고 싶어졌다.
―그럼 이름을 만들까. 난 네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비슷한 이름을 따오고 싶어. 네 아버지 친구들도 아버지와 비슷한 이름을 쓰잖아. 네 이름은 뭐지?
이름을 묻는 말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다소 밝아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호의 친우들인 백호, 황호, 청호는 모두 호랑이 호 자를 사용해서 그런 걸까.
소년은 내심 비슷한 이름을 가진 친구가 부러웠던 것 같았다.
소년은 냉큼 자신이 사용하는 이름을 고했다.
―다들 저를 제호라고 불러요. 붉은 비단, 붉은색을 가리키는 제(緹)에 호랑이 호(虎)를 써요.
제호의 이름을 들은 여의보주가 답했다.
―나는 호랑이가 아니라 용이라서 호 자는 못 쓸 것 같아. 그러니 네 이름의 ‘제’를 빌려 올게. 남은 한 글자는 어떻게 할까.
그냥 호랑이들이 그랬듯이 뒤에 용을 붙일까 생각해 봤지만, 여의보주는 옥색의 용이라 붉은 용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여의보주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제호가 제안했다.
―당신은 하늘에서 왔으니까, 하늘 건(乾)을 넣는 게 어때요?
여의보주는 제호를 구출하기 위해 비행술을 사용했다.
제호의 입장에서는 여의보주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용왕신이 강림하는 용궁은 해저에 있으니 여의보주가 하늘에서 왔다는 말은 맞지 않지만, 여의보주는 친구가 될 예정인 소년이 붙여 준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구해 줘서 고마워.
호족의 본거지에 가까워졌을 때, 제호가 그렇게 말하며 뛰어갔다.
제호의 감사 인사를 받은 여의보주는 저도 모르게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태도를 보니 제호와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날 이후로 여의보주는 스스로를 용제건이라고 칭하였고, 용제건과 제호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제호가 아버지와 같은 ‘붉은색’을 의미하는 이름이 들어간 걸 죄스러워하여 신분을 위장할 겸 가짜 이름을 만들었는데, 이를 용제건이 지어 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붉은 천을 몸에 감은 여성이 용제건을 찾아왔다.
제호의 어머니인 웅녀였다.
―웅족과 접점을 찾고 있다고 들었어.
거래를 제안한 건 웅녀 쪽이었다.
여의보주이자 유희용으로 이름난 용제건이 제 아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행여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되었나 보다.
웅녀는 친구라고 믿었던 이에게 속아 자신 앞으로 끌려온 아들을 봤으니, 몹시 걱정되었을 거다.
그래서 웅녀는 용제건을 거래로 묶어 두고자 했다.
‘그런 거래를 할 필요는 없는데.’
이미 용제건은 제호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웅녀의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웅족이 자랑하는 기재(奇才)와 선을 대 두면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게 틀림없었다.
―알았어. 대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알려 줄래?
용제건과 웅녀 사이에 거래가 성립된 이후에도 용제건과 제호의 교우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제호가 교사가 되고, 그게 재미있어 보였던 용제건이 뒤따라 교사가 되고, 그가 김신록이라는 이름을 쓴 후에도.
‘올해에는 어떤 아이들이 올까. 신록이는 1학년 담임을 맡게 될 텐데.’
김신록은 올해 1학년 1반 담임과 동시에 지익회 고문을 맡게 될 것이다.
살짝 성시완에게 조언을 했더니 바로 김신록을 지익회 고문으로 낙점했다.
성시완은 김신록의 옛 제자였던 성국언의 사촌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를 계기로 성국언과도 연이 닿을지도 모른다.
‘정체가 드러나서 옛 제자들과도 화해하고, 또 다른 계기를 찾아 아버지와 화해하면 좋을 텐데.’
특히 아버지와 화해하면 김신록이 좋아 어쩔 줄 모를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 김신록을 온 힘을 다해 놀려 먹을 생각을 하니 저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저리 아끼니 언젠가는 화해하겠지.’
그러나 용제건이 기다리는 그 언젠가는 올 수 없게 되었다.
은광고의 실기 시험이 치러지던 날, 용제건은 유일한 친우의 부고를 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