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학교 밖 (10)
입장이 시작되기 전, 은광고 출입구 주변.
은광고는 동, 서, 남, 북으로 네 개의 출입구가 존재했다.
네 출입구에서는 입장을 기다리는 일반 관람객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 서 있는 이들, 출입구 너머에서 준비를 하는 자치 기구 학생들 모두가 이벤트를 앞두고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표정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진족들이 있었다.
바로 돈족(豚族), 저강렵의 부하들이었다.
“주변에 눈에 띄는 플레이어는 있었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출입구 너머에 성가신 플레이어들이 꽤 있었습니다만,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는 한 문제없습니다.”
다른 출입구 주변을 둘러보고 온 이들이 보고했다.
그러자 부재중인 저강렵을 대신해 돈족을 이끌고 있는 수하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은 플레이어들이 눈에 띄면 미리 처리하고 움직이려 했는데, 잘됐군.’
아무래도 은광고 축제를 보기 위해 몰려온 이들은 일반인이거나 잔챙이 플레이어인 듯했다.
저강렵의 수하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시각에 맞춰서 예정대로 움직인다.”
“네!”
그 말에 돈족은 각 출입구로 흩어졌다.
동문에 남은 저강렵의 수하는 그 뒷모습을 짧게 응시했다.
호족의 신역에서 일을 벌이는 데도 돈족들은 의욕에 넘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돈족은 그동안 ‘그자’의 계획에서 줄창 실패만 거듭했다.
돈족의 본거지까지 침입한 적호를 놓친 것.
키모폴레이아호에서 주오와 TC 그룹의 차기 총수 암살이 미수에 그친 것.
저강렵이 까마귀 가면을 쓴 자에게 상보심금파를 강탈당한 것.
거기에 더해 붉은 옷차림의 진족 여성에게 큰 부상을 입어 장기간 움직일 수 없었던 것.
돈족이 12지 동맹에게서 등을 돌린 후, 처음 겪는 굴욕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중 가장 큰 실패는 천익산의 지맥을 끊어 놓지 못했다는 거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천익산의 지맥 끊기는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신역의 수호자 황호는 태만했고, 백호와 적호는 서로 서먹하게 지내고 있었다.
천익산의 지맥이 약해지자 신수도 점점 약해져 언제든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지 회담 즈음이었다.
―寅[호랑이님] “본론에 들어가지. 12지 동맹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불가침 조약을 어기고 은광고의 결계와 호족의 후예를 공격한 자가 있다.”
―寅[호랑이님] “물론 당한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예정이다. 배신자가 밝혀지는 즉시, 12지 동맹의 약조에 따라 배신자는 퇴출하고 단죄할 것이다.”
저강렵은 회담 중에는 티를 내지 않았으나 나중에 길길이 날뛰었다.
이게 다 웅족 탓이라며 부하들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였다.
웅족이 호족의 후예를 황호가 알지 못하게 잘 처리했으면 이런 사태로 번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고, 부하들도 다 그 말에 동의했다.
모든 게 웅족 탓이므로 사실상 돈족의 배신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황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 부하들은 오싹한 기분에 휩싸였다.
―寅[호랑이님] “우리 사이에 인사 같은 건 필요 없겠지······ 다음 회담은 배신자를 단죄하는 장이 될 거다. 이상이다.”
돈족들은 그 단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뱃속이 몇 갈래로 찢겨 나간 저강렵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저강렵의 수하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 기회에 호족의 신역을 완전히 짓밟아서, 감히 일어서지 못하게 하면 된다……!’
돈족이 은밀히 제 위치로 이동하고 있을 때, 움직이지 않는 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줄곧 해외 생활을 하다가 최근 저강렵의 요청으로 한반도에 온 돈족이었다.
그의 정체는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의 작품 중 하나 굴린부르스티.
북유럽 신화 속에 등장하는 돈족으로 풍요의 신이자 스웨덴 왕가의 조상신인 프레이의 탈것으로 등장하는 황금의 돼지였다.
금색의 머리카락을 후드티로 가린 굴린부르스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굴린부르스티는 들뜬 분위기의 입구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참, 너도 네 자리로 가라!”
저강렵의 수하가 턱짓을 하며 명령했다.
그러나 굴린부르스티는 그 말을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늘 아침 작전에 관해 들었을 때에도 느꼈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뭐라고?”
“저강렵은 나에게 프레이를 이 세계에서 만날 방법을 알려 준다고 했어. 그래서 기꺼이 여기에 온 거야.”
굴린부르스티가 이능파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저강렵의 수하가 움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능파의 입자가 굴린부르스티 쪽으로 모이자 입장을 기다리던 이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굴린부르스티는 그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 듯 계속 말했다.
“나는 프레이가 그립긴 하지만, 누구를 죽이고 배신하면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아. 프레이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야.”
“너, 설마……!”
굴린부르스티는 임전 태세였다.
광림을 발동한 건지 금색의 갑주를 입은 듯, 온몸이 황금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반인 관람객들은 그걸 보고 감탄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굴린부르스티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도망쳐. 최대한 멀리.”
“네……?”
뜬금없는 소리에 관람객들이 이상하게 여긴 순간, 저강렵의 수하가 착용하고 있던 디바이스에서 알람음이 짧게 울렸다.
‘시간이 되었다!’
굴린부르스티가 갑자기 저렇게 나온 건 예상외였으나 그가 신화 속에 등장했다 해도 돈족 전원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이 일을 홀로 막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방문객으로 위장하고 있던 돈족의 권속들이 일제히 본모습을 드러냈다.
우워어어어……!
“뭐, 뭐야! 에너미로 변했어!”
“알람이 안 오는데? 에너미라고?”
“도망쳐!”
대경실색한 방문객들이 비명 소리를 높였다.
돈족의 권속들은 달아나는 일반인을 노리는 대신, 결계를 향해 돌진했다.
쿠쿵! 쿵! 파지지직!
권속들은 결계의 거부 반응을 무시하고 그 몸이 전부 타들어 갈 때까지 부딪혀 댔다.
에너미의 몸체와 결계가 충돌하는 소리,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스파크와 연기에 동문 앞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충돌에 의해 발산되는 방전음이 마치 결계가 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굴린부르스티는 돈족의 권속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그 수가 많아 대응할 수 없었다.
몸으로 에너미 네다섯 마리를 막아 냈지만, 그것으로는 이 상황을 막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은광고를 위협하는 건 에너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파아아아…….
여전히 결계와 돈족의 권속이 부딪치고 있는 가운데, 이계의 틈이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임의로 이계를 불러온 것처럼 자로 잰 듯한 타이밍이었다.
모든 이계는 하나같이 독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이계까지 불러오다니, 그런……!”
뒤늦게 돈족의 진영에 온 굴린부르스티는 작전의 전모를 듣지 못했다.
그가 저강렵에게 부탁받은 것은 결계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계를 공략하려는 플레이어들을 저지하는 것뿐이었다.
권속들을 부려 결계에 간섭한다는 것도, 이렇게나 많은 이계를 한 번에 불러낼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입을 쩍 벌린 이계의 틈은 뭔가 이상했다.
굴린부르스티가 불러낸 황금의 갑주를 뚫고 파고드는 냉기를 느끼고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두른 갑주는 굴린부르스티의 가죽 그 자체로, 묠니르를 만들어 로키와의 내기에서 이긴 최고의 드베르그가 만든 작품이다.
그걸 뚫고 침입한 냉기가 보통 존재일 리가 없었다.
‘……이능파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어!’
동결형 이계에서 뿜어져 나온 이능독이 피부에 닿아 그의 몸을 중독시키기 시작했으나, 굴린부르스티는 이를 알지 못했다.
한편, 이능독의 사정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그 모습을 관망하던 저강렵의 수하가 외쳤다.
“이제 와서 겁이 나나?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수장님께 잘 얘기해 주마.”
“…….”
“싫은가 보군, 그러면 호랑이 무덤에 같이 묻어 주겠다!”
저강렵의 수하가 그렇게 외치며 권속 몇 마리를 부려 굴린부르스티를 노리도록 지시했다.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권속들을 보며 굴린부르스티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능파를 다루지 못해도 고작 에너미 몇 마리로 나를 어찌할 수는 없어!”
그 기세에 저강렵의 수하가 움찔했으나 권속에게 내린 명령은 거두지 않았다.
권속과 굴린부르스티가 격돌하려는 그 순간.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화르르륵!
권속이 있는 땅은 온통 푸른 불꽃으로 불타올랐다.
굴린부르스티는 푸른 불꽃이 내려온 하늘을 올려다봤다.
허공에는 푸른 불꽃을 두른 사내, 용족의 수장 청룡이 있었다.
청룡을 알아본 저강렵의 수하가 경악했다.
“처, 청룡이 여기 왜!”
“내가 한 선언을 잊었나? 배신자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군.”
어째서 호족의 신역에 용족이 있는가.
그것도 수장인 청룡이 직접 호족의 적을 상대하는 건가.
저강렵의 수하는 의문을 품었으나, 청룡은 12지 회담 당시 이렇게 선언했었다.
―辰[만렙 청룡] “······용족의 수장으로서 선언한다. 용족은 호족에게 전면 협력하여 배신자를 잡아내겠다. 은광고를 노린다는 건 내 동족과 후예를 노린다는 것과 마찬가지.”
돈족의 주요 간부는 회담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저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호족은 웅족의 배신을 경험하여 의심이 깊었고, 용족은 제 가족만 챙길 줄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들이 진정 손을 잡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기랄, 그 용족의 후예 때문인가? 하지만 이능독이 있다. 저 구역으로 유도해 독에 중독되면 저 성가신 청룡의 불을 봉인할 수 있어!’
이능독이 얼어붙어 결계를 삼키기 전까지, 독은 감히 주변에 접근한 이들을 중독시킬 것이다.
하지만 청룡은 마치 이능독의 존재를 경계하는 것처럼 하늘에 높이 떠 멀리서 푸른 불꽃을 쏴 댈 뿐이었다.
결계에 몸을 부딪치던 권속들이 푸른색의 화염에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젠장, 이대로 가면 전멸이다!’
저강렵의 수하가 불꽃을 피하며 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시선 저편, 하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 화색을 띠었다.
청룡이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한 순간.
공기를 매섭게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쐐애애액!
“……!”
허공에 가만히 떠 있던 청룡이 급히 몸을 움직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을 피했다.
창에 실린 이능파는 예삿것이 아니었다.
그 이능파의 주인, 창을 날린 존재를 본 청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강렵!”
저강렵은 중무장하고 있었다.
비록 상보심금파는 없었지만, 투구, 견갑, 갑옷 무엇 하나 격이 떨어지는 게 없었다.
그 모습에 청룡은 저도 모르게 저강렵의 옛 직함을 떠올렸다.
‘천봉원수 시절의 그 모습 같군……!’
천계에서 8만 수군을 이끄는 은하수의 수군대장, 천봉원수.
저강렵이 주색에 눈이 멀어 죄를 범해 천계에서 추방당하기 전, 그의 전성기 시절.
지금의 저강렵은 그때 모습을 연상시키는 기백이 있었다.
그리고 저강렵의 뒤에는 그 수군에 속했던 옛 수하들이 있었다.
8만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1할에 불과한 800 정도의 숫자였다.
그러나 하늘에서 끌고 온 800의 진족은 결코 만만한 수가 아니었다.
어찌 저만한 수를 모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청룡은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용족이 전력을 다해 상대해도 어렵겠군.’
청룡은 뒤에서 대기 중인 용족과 지금 배정된 인력을 떠올렸다.
동문에는 청룡과 용족.
서문에는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남문에는 염방열과 붉은 사자.
북문에는 송만석의 한강 싸이클링 팀 그리고 홍경복과 탁거산이 배치되었다.
그 인원을 모아서 상대하면 모를까, 용족만으로 동결형 이계에 대처하며 저강렵의 수군과 맞붙기는 어려웠다.
청룡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도주하는 관람객 사이에서 이 상황을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눈매가 곱상한 아이가 청룡과 저강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