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7)
89. 선물 (6)
무림인들이 입은 옷은 제각각이었으나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무협물에 나올 법한 무복을 입고 있다는 점.
둘째, 옷감에 반드시 검은색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셋째, 검과 숲을 이미지한 팀 로고가 박힌 혁대를 착용한 것.
무림 문파를 콘셉트로 한 프로 플레이어 팀은 여럿 있었으나 저런 차림을 하고, 저 로고를 사용하는 팀은 하나뿐이었다.
‘한국 4대 프로 플레이어 팀 중 하나, 절흑풍림이다! 여기 온 관객들 대부분은 절흑풍림을 보러 온 건가.’
절흑풍림은 이계 충돌 이후 창단된 수많은 프로 플레이어 팀 중 가장 설정에 충실한 곳으로 꼽혔다.
이능, 신체 능력, 정신 모두 진짜 무림인만을 선별하는 빡빡한 입문 시험.
마신을 섬기는 마족들을 마교로 규정해 싸우는 대담함.
소수정예임에도 불구하고 4대 프로 플레이어 팀으로 꼽힐 만한 실적.
이런저런 이유로 절흑풍림은 꽤 인기가 좋았는데, 지나치게 콘셉트에 몰두한 나머지 언론 노출이 적었다.
그래서 가끔 외부 활동을 하는 게 목격되는 것만으로도 기삿거리가 되곤 했다.
그들이 왔다면 사람이 이렇게 몰리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특히, 맨 앞에 선 검은 죽립의 남자를 보니 더 납득이 갔다.
‘절흑풍림 소속 플레이어들이 몇 명 온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텐데, 팀 마스터까지 오다니.’
무림인들을 선도하는 인물의 정체는 절흑풍림의 팀 마스터 흑림의 검성이었다.
흑림의 검성은 4대 프로 플레이어 팀 마스터 중 유일한 20대로 전도유망한 플레이어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젊은 나이에 현재 진행형으로 수많은 흑역사를 축적 중인 것으로도 유명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무림인 행세를 하고 다녀 은광고 면접장 입장과 동시에 0반행이 결정되었다는 일화는 몹시 유명했다.
이처럼 흑림의 검성은 온갖 기인들이 모인 절흑풍림 내에서도 독보적인 콘셉트력으로 충만한 팀 마스터, 장문인이었다.
하지만 흑림의 검성은 그 콘셉트를 감당할 만한 힘을 지녔기에 모든 것이 용서되었고, 그를 동경해 기꺼이 무림인이 되고자 하는 플레이어가 넘쳤다.
검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온 흑림의 검성이 함근형 선생님 앞에 멈춰 섰다.
척!
흑림의 검성이 포권지례를 취하자 뒤에 서 있던 무림인들도 뒤따라 손바닥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도 있는 모습과 딱딱 맞는 동작에 감탄이 나왔으나 무림인들과 학교 풍경 사이에 느껴지는 괴리감 탓에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흑림의 검성이 한마디 했을 뿐인데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흑림의 검성은 하오체를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존댓말을 입에 댔으니 놀랄 법하다.
0반 출신 국제급 콘셉트 플레이어라 해도 우리 함근형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창천명궁’이라는 말이 띄엄띄엄 들리는 걸로 보니 사람들이 우리 담임 선생님의 훌륭함을 다 알아주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그 아이는 역시 네 제자였나?”
“수제자의 비무를 보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가…… 너와 닮은 구석이 많더군.”
“그렇습니까? 아직 배움이 짧은 아이라 제 검의 반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함근형 선생님은 검을 다루는 모습이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무림인 콘셉트가 닮았다고 한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리 반 소속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이 저 흑림의 검성의 제자인 건 확실한 사실인가 보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말고사 당시 구슬비와 옹길동의 소식을 듣던 김유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새까만 옷을 입은 무림인들이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을 습격하고, 기말고사 공부를 시켰다고.
검은색 무복을 입은 무림인들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절흑풍림을 떠올리긴 했다.
하지만 저 검객이 쓰는 영어 단어 때문에 쉽게 연관 짓지 못했다.
저 무림인들이 자신을 ‘어둠의 다크니스’라 칭하는 10대 청소년을 절흑풍림에 받아 줬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흑림의 검성이 직접 찾아와 제자 운운하고 있으니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쟤도 플마고에선 절흑풍림과 함께 마계 시나리오에서 싸우다가 끝을 맞이했을까.’
플마고의 1학년 시절 주요 이벤트 대부분은 은광고의 붕괴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2학년 때 발생하는 시나리오에서는 은광고뿐만이 아니라 플레이어 사회가 무너지는 모습도 보여 준다.
대표적인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플레이어 국회의원, 성국언 암살 시나리오.
두 번째는 붉은 사자와 용족의 파멸로 이어지는 염준열의 폭주 시나리오.
세 번째는 마계 시나리오였다.
‘마계 시나리오의 주역은 주수혁과 안다인, 절흑풍림이었지.’
염방열이 사망하고 청룡이 깊이 잠든 후.
4대 프로 플레이어 팀 중 가장 활발하게 이계 공략을 하던 붉은 사자를 잃은 한반도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한편, 7대 죄악의 마신들은 광신도를 모아 한반도의 지력을 탐하기 위해 침공을 시도한다.
한반도의 일부를 마계와 융합시켜 그 지역의 지력을 전부 삼키려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막기 위해 주인공들이 나섰다.
주수혁과 안다인을 필두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마계로 향해 융합 계획을 막고, 절흑풍림은 한반도에서 마족들을 저지하였다.
‘얼핏 듣기에는 절흑풍림이 쉬운 역을 맡은 것 같지만, 절흑풍림 소속 플레이어들은 전멸했지.’
마계와의 원활한 융합을 위해 마신의 광신도들은 융합 예정지에 있는 인류를 전부 죽이려 했다.
절멸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그만한 수준의 전력을 보냈다.
7대 마신 광신도 연합군 소속의 마족들은 머릿수와 이능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게 없었다.
광신도 연합군의 선전포고에 정부는 그 지역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피난 권고를 내렸다.
정부의 피난 권고에 플레이어 협회와 해당 지역의 지방자치단체,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의용군을 모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진 않았어. 마족의 힘이 어떤지 다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선전포고 전 마족들은 힘을 과시했고 언론은 이를 빠짐없이 보도했기에 사회 전체에 마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한반도에선 염방열이라는 거물을 잃은 직후였기에 사기가 바닥을 쳤다.
다른 4대 플레이어 팀, 아니, 3대 플레이어 중 영원의 호수는 입국할 기미가 없었고, 수국향기는 붉은 사자의 빈 자리를 커버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 했다.
유일하게 광신도 연합군과 싸우겠다고 의사를 밝힌 게 절흑풍림이었다.
흑림의 검성은 결사 항전을 선언했고, 이에 감화된 플레이어들이 모여 일명 ‘마교 절멸 결사대’를 구성했다.
주인공 일행은 마계에서 마신들의 석상을 부수어 융합 계획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마지막까지 싸운 마교 절멸 결사대는 궤멸했다.
흑림의 검성은 불세지재의 콘셉트 플레이어였으나 그 설정을 죽을 때까지 관철한 위대한 플레이어였다.
‘한반도의 일부가 마계에 삼켜지는 건 막았지만, 그 사건으로 뜻있는 플레이어들을 너무 많이 잃었어.’
플마고에서의 결말을 생각한 탓일까.
검은 옷차림의 무림인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차올랐다.
생각을 돌리기 위해 반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검객은 팀 마스터를 닮은 거군요. 하지만 흑림의 검성은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요.”
“저분들이 서 있는 곳은 분위기가 달라. 그림을 그린다면 저쪽만 수묵화로 그려야 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우리 반에 4대 팀 마스터의 제자가 두 분이나 계시는군요.”
“아, 드, 듣고 보니 그렇네. 4대 팀 마스터의 제자라는 말을 들으니까 부끄럽다.”
“그런데 저 팀 마스터는 우리 담임 제자인 거 같은데. 그럼 제자의 제자가 제자…… 에이씨, 어떻게 되는 거야.”
흑림의 검성과 함근형 선생님이 대화하는 사이, 우리 반 아이들은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우리 반 아이뿐만 아니라 함근형 선생님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제자를 만난 덕도 있는 것 같지만, 가끔 함근형 선생님이 눈으로 우리의 머릿수를 훑는 게 출석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1학년 0반 역대 최고 출석률을 경신해서 그런가.’
지금 관종 둘과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은 대기실에서 몸을 푸는 중이지만, 어쨌든 승부를 위해 학교에 왔으니 등교한 셈이다.
그러니 반 아이들과 함근형 선생님이 저렇게 들떠도 이상하진 않다.
‘이대로 저 셋이 등교하면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텐데.’
현재 검객과 관종들의 승부 성적은 1승 1패.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승부를 낸 건지 모르겠으나, 흑림의 검성이 비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아 마지막은 정면 승부로 결말을 낼 예정 같다.
나는 냉정하게 구슬비와 옹길동의 능력을 따져 보았다.
흑림의 검성이 수제자라고 칭할 만한 절흑풍림 소속 검객과의 승부 결과를 예측해 보았는데, 긍정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우수하지만, 저 검객만큼 전투에 능하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 절실히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 강해지는 것보다는 눈에 띄는 걸 우선시해 왔겠지.’
그에 반해 저 검객은 절흑풍림의 제자로서 마족을 소탕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수련을 거듭했을 것이다.
등교하지 않는 이유가 애초에 강해지기 위해서였을 테니 웬만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은 상대가 안 될 거다.
그렇다면 다른 수를 쓸 수밖에 없다.
플마고에서 파악한 절흑풍림과 흑림의 검성에 관한 정보.
마족이 이 세계에서 벌인 일과 플마고에서 벌였던 일들.
김유리를 통해 들은 관종과 검객의 승부 양상.
이 세계에서 검객이 보인 행보.
이 모든 것을 종합해 어떤 수를 둘지 정했다.
‘승부가 시작되기 전에 흑림의 검성과 접촉하는 게 좋겠어.’
당연히 이번에는 마계 시나리오처럼 흘러가게 하지 않기 위해 준비는 하고 있었다.
절흑풍림은 용궁 건이 마무리되는 대로 염방열을 경유해 접촉하려 했는데 그 시기가 좀 당겨질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하지만, 이 시기를 놓치면 검객이 또 해외에 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침 내 수에 필요한 동의와 협력을 구할 상대가 옆에 있었다.
“야.”
아이들 말에 가끔 맞장구를 치거나 처웃던 황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황지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게 부탁할 게 있나 보군. 네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 아니라면 들어줄 테니 바로 말해 보도록.”
황지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부탁이라는 둥, 들어주겠다는 둥의 소리를 하는 건가.
그야 부탁을 할 생각이긴 한데 황지호가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흑림의 검성과 이야기를 하려 해.”
“그렇군. 이 몸은 무엇을 하면 되지?”
황지호는 기꺼이 들어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도 좀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으니 설명은 해 두기로 했다.
“나와 같이 절흑풍림의 팀 마스터와 만나 줘.”
“겨우 그것을 부탁하려 했나? 물론 들어주겠다. 지금 만나러 갈 생각이라면 준비하지.”
나는 목소리를 낮춰 중요한 조건을 덧붙였다.
“황지호가 아니라 호족의 수장으로서 움직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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