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89화 (68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9)

89. 선물 (8)

1학년 건물 운동장.

대화를 마친 후, 나는 절흑풍림 일행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짧게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꽤 흐른 건지 관중 수가 더 늘고, 시합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다.

“부반장이 왔습니다. 시간에 맞춰서 오셨군요.”

“어디 갔다 왔냐? 돌아이 새끼한테 물어봐도 처웃기만 하고 말을 안 한다.”

“하하하하!”

황지호는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노친네가 분신을 쓸 수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위화감이 느껴졌다.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와 계속 함께 행동해서 그런지 맹효돈의 입을 통해 저런 말을 들으니 어색했다.

‘이번엔 어느 쪽이 본신이었을까?’

보통 황지호 쪽이 본신일 때가 많은 것 같은데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다.

사건 뒷수습을 위해 20대나 30대 모습의 황지호가 본신으로 힘을 쓰고, 저 둘은 분신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내가 민그린이 선물한 순록 머리띠를 잘 착용하고 있는지 확인하던 송대석이 물었다.

“체육관 쪽으로 가던데. 관종 보고 왔냐?”

현재 1학년 구역 체육관에 관종이 워낙 많아서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그중 몇몇 사람들은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기만족을 위한 콘셉트 유지를 위해 저러는 거긴 하다.

어쨌든 미리 준비한 변명을 댔다.

“검객한테 머리띠 전해 주고 왔어.”

“아, 그래서 하나 더 달라고 했구나, 내가 전해 줄걸…….”

“그 이상한 놈이랑 직접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네.”

“대석이도 좀 이상한데.”

“어?”

민그린에게 이상한 놈 취급을 받자 송대석이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송대석은 면전에서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 배운 듯하다.

그렇긴 해도 그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은 이상한 놈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순록 머리띠를 내밀자 검객 놈은 몇 번 고사했다.

흑림의 검성이 ‘학우와 우애를 다지는 것도 무림인의 소양’이라는 묘한 논리를 펼친 후에야 머리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검은색이 아니라서 착용할 수 없다고 했지.’

이게 다 흑림의 검성이 처음 읽은 무협지 때문이다.

하필 그 무협지의 주인공이 늘 검은 무복을 즐겨 입는 바람에 흑림의 검성이 저렇게 되고, 그를 존경하는 무림인들도 그 영향을 받았다.

덕분에 이능파가 검은색이라는 이유만으로 흑림의 검성에게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왔구나.”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함근형 선생님이 있었다.

함근형 선생님의 험상궂은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제 일로 이능파 소모가 심해서 피곤하신 걸까.

아니, 피곤해 보인다기보다는 근심이 많아 보였다.

“또 어디로 가는 줄 알았다.”

함근형 선생님의 ‘또’라는 말에 죄송한 마음이 울컥 솟았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시작 전, 나는 아피스의 화신에 대항하기 위해 함근형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갑자기 해외 출장이 취소되고 천익산에 대기하다가 진족을 상대하라는 말을 들었으니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한데 함근형 선생님은 말없이 나를 믿었다.

‘그런데 학교는 난리가 나 있고, 나는 눈을 그치게 한답시고 사라지고. 갑자기 내 이능파가 섞인 검은 눈이 내리고…….’

게다가 함근형 선생님은 나를 찾으러 간 맹효돈의 상태를 보고 뭔가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맹효돈은 비밀을 만들 수 있는 타입이 아니고, 학기 초에 구해 준 일로 많이 고마워하고 있었기에 나를 염려하는 티를 많이 냈을 거다.

제자를 아끼는 함근형 선생님은 덩달아 많이 걱정하셨을 거다.

‘언젠가 함근형 선생님께도 설명을 해야 할 텐데.’

함근형 선생님은 여태까지 말없이 나를 도와주셨다.

사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믿고 부탁을 들어주셨기에 나도 설명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사정 설명도 없이 함근형 선생님을 걱정시키는 건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선생님, 시합 같이 봐요! 미로랑 한이가 가져온 팝콘도 있어요.”

“보육원 애들이랑 나눠 먹었는데 평판이 좋았어요. 같이 먹어요”

“하하하! 마침 이 몸이 준비한 뱅쇼와 궁합이 잘 맞겠군.”

함근형 선생님을 발견한 김유리가 밝게 인사한 데에 이어 독고미로가 딸기향, 민트향 캐러멜로 코팅된 팝콘을 내밀었다.

황지호는 언제 준비한 건지 얇게 썰린 오렌지를 띄운 뱅쇼가 담긴 텀블러를 들고 있었다.

준비된 간식의 색깔이나 배합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함근형 선생님은 내민 간식들을 한 입씩 먹고 칭찬의 말을 던졌으나, 반 아이들이 앉으라고 권한 자리는 거절했다.

“가 봐야 한다. 부심을 맡을 예정이다.”

“아…….”

반 아이들이 아쉬움에 탄식했다.

이번 시합에서는 형평성을 고려해 0반 판독기로 이름난 학생회 고문이 주심을 맡지만, 함근형 선생님은 부심을 맡는 듯했다.

‘말이 부심이지 안전 요원 역할을 맡으신 거 같은데.’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은 절흑풍림 장문인의 수제자로서 당연히 진검을 다루고, 그만한 힘을 선보일 것이다.

또, 우리 반의 관종 구슬비와 옹길동은 교무실에 쳐들어가 출석부를 탈취한 경력이 있는 위험한 놈들이다.

함근형 선생님은 모르겠지만, 저 둘은 포모르 마족의 경매장에서 깽판을 치기도 했다.

안전 요원이 여럿 있어도 시합이 무사히 끝날지 의문이었다.

함근형 선생님이 관객석을 떠나 경기장으로 향할 즈음, 학생회 고문이 등장했다.

학생회 고문은 이번 사건 뒤처리에 고생 중인 건지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바쁜 날에 정체불명의 등교 대결의 주심까지 맡게 되었으니 고생이 많다.’

하지만 0반 판독기 학생회 고문은 직업 정신이 투철하기로 이름나 있다.

학생회 고문은 아무리 바쁠 때라도 0반과 연관된 안건이면 적극적으로 나선다.

본인이 직접 0반으로 보낸 아이들인 만큼, 학교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힘쓰는 듯하다.

‘부장 교사들에 비해 무력이 부족해서 0반 담임을 맡지 않는다곤 하지만, 0반을 맡을 만한 재목이시지.’

저런 교사분들이 있었기에 은광고가 쉽게 망하지 않고 버텼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 고생하셨으니 이제 황지호한테 다 떠넘기고 쉬라고 하고 싶지만, 아직은 부탁드릴 일이 많다.

속으로 응원하고 있을 때, 학생회 고문이 외쳤다.

“선수 입장이 있겠습니다. 먼저 청 코너, 아니, 흑 코너.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 입장.”

소개가 엉망진창이었다.

보통 청 코너는 도전자, 홍 코너는 챔피언 쪽이 선다.

그런데 도전하는 입장인 관종들이 아니라 검객 쪽이 청 코너를 맡았다.

보통 홍 코너가 나중에 소개되니 더 주목받기 위해 일부러 그쪽을 택한 걸까?

거기에 더해 검객은 청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흑색으로 바꾼 듯하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태클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소개를 듣고도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은 한 점의 부끄럼도 느끼지 않는지 당당하게 시합장에 등장했다.

쉬익!

전신을 검은 옷감과 죽립으로 가린 검객이 바람처럼 등장했다.

지나치게 빠르게 움직인 탓에 검객의 검은 옷자락이 펄펄 휘날렸다.

무복 자락을 고정하는 혁대에 검과 숲을 이미지한 팀 로고가 보이자 관객석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절흑풍림의 팀 로고가 보여요! 그런데 저분은 우리 반이잖아요. 학교 다니는 중에도 프로 팀에 가입할 수 있나요?”

“프로 팀에 17세 이상의 미성년자를 가입시킬 수도 있긴 한데, 절차가 까다로워서 보통 안 할걸?”

사월세음의 질문에 김유리가 답했다.

김유리의 말대로 협회의 가이드라인 상, 미성년자의 팀 가입 절차는 상당히 까다롭다.

법적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고 팀 내에서 후견인을 지정해 협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등, 번거로운 일이 많다.

그렇기에 현재 지명수는 수국향기의 공개 채용을 통과했으나 정식 팀 멤버는 아닌 상태다.

하지만 절흑풍림에서는 저 귀찮은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검객을 팀원으로 받았다.

그냥 평범한 팀도 아닌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고, 국내에서는 4대 프로 플레이어 팀으로 꼽히는 곳에서 말이다.

그때, 목우람이 말했다.

“레나도 영원의 호수 측에서 가입을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4대 프로 플레이어 팀이 청소년 플레이어를 스카우트하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건 절흑풍림과 영원의 호수가 이상한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목우람도 스카우트당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잠깐, 생각해 보니 목우람도 세계 10대 프로 플레이어 팀 중 하나인 세 기사의 맹세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오지 않았나?’

비록 세 기사의 맹세에서는 미심쩍은 짓을 꾸미고 있고, 목우람이 이를 거절하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반에는 비범한 인물이 많은 듯하다.

“아하하, 그렇긴 한데…… 플레이어로서 1인분을 하기 전까지는 사양하려고…….”

권레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겸허함과 겸손함에 흐뭇해진 사이, 검객이 시합장 중앙까지 도달했다.

막 뛰어든 검객이 죽립 사이로 내 쪽을 본 것 같았다.

나와 대화를 마친 직후에는 계속 생각에 잠겨 복잡한 표정을 지었는데, 지금은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검객은 결론을 내린 듯하다.

‘수는 전부 두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검객은 내게서 시선을 거둔 후, 죽립을 한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검은 눈이 내리는 비무장이라니, 운치가 있군. 한 수 배워 가겠소.”

검객의 말이 끝나자 흑림의 검성을 필두로 절흑풍림의 무림인들이 손바닥을 위아래로 부딪쳐 박수를 보냈다.

무림인들의 박수와 어둠의 다크니스의 10대답지 않은 말투에 관중석이 술렁였다.

옷차림이나 말투가 완전히 절흑풍림스러웠기에 주목도가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를 고깝게 여기는 이들이 이어서 등장했다.

“이어서 홍 코너, 아니, 오로라 코너. 대체 언제 대본을 바꿔치기한 거지…… 아직은 밝힐 수 없는 칭호를 가진 루이스 페레나와 위대한 드루이디스 구슬비 입장.”

짧은 소개문에서 관종과 무림인의 대결에 끼인 학생회 고문의 피로도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소개문이 끝나자 이어서 큰 울림이 운동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두둥!

한이가 진동을 느끼고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독고미로가 운동장 구석에 놓인 앰프들을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포터블 앰프에서 나는 소리야. 웬만한 콘서트홀에 있는 것보다 성능이 좋아 보여.”

그때, 북소리로 주목을 끈 데에 이어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아앗!”

시합장 중앙에 구슬비가 서 있었다.

앰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시합장에 뛰어든 모양이다.

구슬비는 오로라빛이 도는 산타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오로라 사이로 반짝이는 검은 눈송이가 보였다.

대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쉬이이익!

기합을 내지른 구슬비의 손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이 머금고 있는 빛을 보자 구슬비가 무엇을 하려는지 파악했다.

‘설마 광림을 쓰려는 건가!’

구슬비의 광림은 ‘녹색 손의 은혜’.

그 손길이 닿은 식물을 성장시키는 광림으로, 드루이디스다운 광림이었다.

이는 마진승의 광림과 비슷했으나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도 초원을 불러내는 ‘초원을 부르는 함성’과 달리 구슬비의 광림은 씨앗 등의 매개가 필요했다.

하지만 사전에 씨앗을 준비할 수 있다면 범용성이나 효율은 구슬비 쪽이 더 좋았다.

파아앗!

구슬비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러자 지팡이의 끝에서 녹색의 빛이 시합장의 경계로 퍼져 나가 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

구상나무가 사람 키 정도의 크기로 자랐을 때, 옹길동이 등장했다.

“마무리는 내가 하겠다!”

파아아!

옹길동이 화려하게 손짓을 하자 구상나무 위에 트리 장식이 덧씌워졌다.

오로라에 집착하는 건지 트리는 온통 오로라빛 장식으로 덮여 있었다.

옹길동의 광림, ‘마술사의 비단 모자’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옮긴 것 같았다.

와아아아아!

마법처럼 완성된 트리를 보고 관객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관객들의 관심이 트리와 관종들에게 쏠리자 두 사람은 만족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멋진 등장이었으나 어이가 없었다.

‘다음은 저 관종들에게 달려 있는데.’

내 다음 수는 저 관종들이 어떤 시합을 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정해졌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믿지만, 광림으로 힘을 낭비한 꼴을 보니 걱정은 되었다.

오프닝 쇼가 벌어진 사이에 기운이 빠진 듯한 학생회 고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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