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90)
89. 선물 (9)
시합 개시 신호와 동시에 검객과 관종들이 무기를 꺼냈다.
쉬이익! 촤르륵!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은 절흑풍림 팀 로고가 박힌 혁대 사이로 연검을 뽑아 들었고, 옹길동은 마술 쇼를 하듯 옷 소매에 숨겨 뒀던 트럼프 카드를 꺼내고, 구슬비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셋 다 무기는 제각각이었으나 공통점이 있었다.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한 게 아니라 들고 있던 무기를 꺼냈다는 것.
셋 다 콘셉트에 충실하기 위해 무기를 카드화하지 않고 소지하는 듯하다.
“이 위대한 일전을 치르기 전, 물어볼 게 있다.”
“말하시오.”
옹길동이 과장된 어조로 묻자 검객이 진지하게 응수했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것처럼 양쪽 다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대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시합을 시작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째서 시합 직전에 2대1로 싸우겠다고 한 거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소.”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건데? 덕분에 여유가 생겨서 위대한 드루이디스의 기술을 보여 줄 수 있는 건 좋았는데, 우리를 얕보는 거야?”
그렇게 거창하게 광림을 쓰면서 여유를 부려 놓고 얕보는 거냐고 물으면 좀 그렇지 않나?
검객은 구슬비를 상대로 정중하게 답했다.
“1대1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오.”
“뭘 확인하려고?”
“직접 확인해 본 후 말씀드리겠소.”
검객은 바로 속내를 밝힐 생각은 없는지 말을 아꼈다.
두 관종이 불만스러워하는 눈치였으나 검객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고 두 분은 재주가 많으나 검에 소양이 없고 싸움에 능하지 않으며 실전 경험이 적소. 비무는 압도적으로 소생에게 유리하오. 그러니 이 정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공정하지 않겠소?”
검객의 말에 관종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검객의 말은 틀린 게 없었고, 언뜻 듣기에 두 관종을 배려하는 듯했으나 듣는 입장에선 열받는 말이었다.
“저 새끼 도발 잘하네.”
“그런데 저분 1인칭으로 ‘소생’이라 칭하지 않았어요?”
“하하하하! 현대에서 저런 1인칭을 쓰는 자는 오랜만에 보는군.”
“……현대 이전부터 산 것처럼 말하네.”
한이가 질린 얼굴로 말했으나 줄곧 기분이 좋아 보이던 황지호는 신나게 처웃었다.
저 셋의 대결이 아주 기대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노친네 티가 줄줄 나고 있는데 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은 나 대신 한이가 지적하고 있으니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말없이 뱅쇼를 한 잔 더 마시고 있는 사이, 관종들은 분노에 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냥 얕보는 게 맞네.”
“검에 소양이 없다니! 신사의 스포츠 중 하나인 펜싱에는 조금 소양이 있다만.”
“소양? 저번에 보니까 펜싱 용어밖에 모르는 수준 같던데…… 스킬도 없잖아.”
“크윽!”
갑자기 같은 편에게서 날아온 묵직한 팩트에 옹길동이 비틀거렸다.
구슬비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플마고 유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저 둘은 분명 범용성 넓은 이능을 가진 유능한 캐릭터라 볼 수 있었으나 결코 강하지는 않았다.
옹길동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그라드는 화려한 모션을 남발하며 적의 눈을 속이고 아이템을 탈취하고 숨고 도망치는 데에는 능했다.
구슬비는 위대한 드루이디스라는 자칭에 어울리는 희귀한 비술을 사용하지만, 희귀한 것과 강한 것은 다른 개념이었다.
즉, 저 둘의 능력은 기믹 수행이나 다른 어태커의 서포트에 유용하지 직접 싸우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걸 가장 잘 아는 건 본인들일 텐데도 저 둘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의 멋짐과 위대함과 훌륭함은 고작 이 정도 시련에 굴하지 않는다!”
“그건 그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지닌 불굴의 정신에는 늘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저 관종들의 목적은 오로지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라는 게 미묘했다.
저 둘은 한없이 진지했다.
검객은 두 관종이 먼저 공격해 오는 걸 기다리는 건지 연검을 겨눈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촤르르륵!
옹길동이 트럼프 카드를 펼쳐 위로 던졌다.
그러자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붉은색, 네온 빛을 띤 트럼프 카드들이 허공에 펼쳐졌다.
이능파를 머금은 카드들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머물렀다.
현재 공중에 뜬 카드는 전부 스페이드로 검을 상징하는 카드들이었다.
“언제든지 오시오.”
“사양 않고 가지!”
쉬이익!
옹길동의 손짓에 카드 비가 쏟아졌다.
검을 상징하는 카드답게 날카롭게 벼려진 카드는 머금은 이능파만으로도 검객의 옷깃을 갈라 버릴 듯했다.
“어지럽지만, 내 검에 미치지는 못하오.”
카앙!
검객이 연검을 유연하게 휘두르자 비처럼 쏟아지던 카드가 튕겨 나갔다.
언뜻 보기에 검객은 몇 번 검을 휘두르지 않았는데도 카드를 정확하게 쳐 내고 있었다.
카드들의 움직임을 꿰뚫고 필요한 만큼만 검을 휘두르고, 연검의 성질을 이용해 전부 받아친 것이다.
“너무 빨라! 검이 이상한 궤도로 움직인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걸까?”
“검이 휘는 것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검은 날이 휘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분의 검은 상당히 유연하군요.”
목우람이 권레나에게 해설을 해 줬다.
옆에서 그 해설을 같이 듣던 민그린이 덧붙였다.
“저 연검, 뭔가 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민그린의 눈이 연검의 손잡이 쪽을 따라 움직였다.
민그린의 말을 듣고 잘 보니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이 착용 중일 때에는 혁대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손잡이에 복잡한 형태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저 검객의 성향상 불필요한 장식은 없애 버릴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긴 했다.
‘혹시 저 연검은 사연이 있는 물건이 아닐까? 검 자체의 희귀도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데.’
회심의 카드 공격이 전부 빗나가자 옹길동이 분한 얼굴로 말했다.
검객은 한차례 공격을 전부 막아 내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연검을 들고 있었다.
“크으, 이능파도 사용하지 않다니. 아직 쇼는 도입부다. 방심하지 말라고!”
옹길동의 카드가 머금은 이능파가 강렬해졌다.
붉은 네온 빛이 강해져 검은 스페이드가 빨갛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출력이 오른 걸 감지한 건지 검객이 연검을 고쳐 쥐었다.
촤르르륵! 카앙!
검을 고쳐 쥐기가 무섭게 불꽃이 튀었다.
연검의 끝이 카드에 밀려 휘어지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군.”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검객은 아직 이능파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힘이 넉넉하게 남아 있을 텐데 왜 저러는 걸까.
다음 순간, 검객이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하늘색? 저게 저 검객의 이능파 색인가.’
짧은 순간이지만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 주변에 연한 하늘빛이 넘실거렸다.
검은색과 대조적으로 밝은 하늘색이라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푸른색 계열의 색 중에서도 파우더 블루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슈우우우…….
검객의 이능파에 반응해 검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스킬의 발현이 아닌가 싶어서 모두가 경계했지만, 저 검은 연기 자체에선 이능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연검 손잡이에 달려 있던 장치가 움직인 것 같아요!”
“이능파에 반응해 검은 연기를 뿌려 주는 건가 봐.”
“대체 왜 저런 번거로운 짓을 하냐. 역시 저놈은 이상…… 그린아, 난 대놓고 말하지 않았어!”
“지금 말했잖아.”
계속 검에 있던 장치를 신경 쓰던 민그린이 연기의 출처를 밝혀내고, 송대석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가 혼이 났다.
그사이 연기의 정체를 두고 반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대체 왜? 상대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인가. 아니, 저러면 본인의 시야도 막히잖아. 눈 쪽에 이능파가 몰리지 않은 걸 보니까 통찰계 스킬을 쓰는 건 아닌데.”
시합이 시작되자 진지하게 셋을 관찰하던 독고미로가 말했다.
싸움에 익숙한 독고미로라서 그런지 그럴싸한 분석이 쏟아졌다.
독고미로의 결론은 ‘저 연기는 싸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였다.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저 연기가 싸우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상대의 시력이 아주 나쁘지 않은 한 눈속임은 불가능한 수준으로 연기가 옅어.’
한편, 이능파를 발산한 검객의 움직임은 더 빨라지고, 정교해졌다.
거기에 더해 검압이 카드를 밀어낼 정도로 커지니 옹길동의 트럼프 카드는 검객의 칼에 닿지도 못한 채 날아가 버리곤 했다.
검은 연기에 가려 검객의 이능파 색은 더는 보이지 않았으나 계속 이능파를 사용하는 건 분명했다.
연기의 용도를 두고 의문이 깊어지고 있을 때, 능력자 반장 김유리가 발언했다.
“어둠의 다…… 검객은 검은색을 아주 좋아하잖아. 자기 이능파 색을 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정답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검은색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저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이 할 법한 짓이었다.
“저 새끼는 이름 대신 그 다크…… 뭐였더라, 영어 단어까지 섞어 말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저도 그럴 것 같아요…….”
“파우더 블루도 예쁜 색인데, 아깝다. 권제인 선배님이 그 색 드레스를 입고 공연한 적도 있어.”
이능파 색을 감추기 위해 저런다 쪽으로 의견이 기울자 반 아이들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로 옹길동의 맹공에 응수하는 검객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진 거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검객은 보면 볼수록 대단한 놈이었다.
검은색 이능파를 사용하는 입장에선 저 집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보여 줄 재주는 없소? 없다면 이번엔 내가 가겠소.”
이능파 소모가 심한 건지 옹길동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게 왜 오프닝 쇼로 광림을 난사해 댄 건가.
하지만 옹길동의 눈에는 조금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객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옹길동을 향해 한 발 나아갔을 때였다.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옹길동의 뒤에 물러나 있던 구슬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줄곧 떡갈나무 지팡이를 쥔 채로 대기 중이었던 구슬비는 놀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쾅!
구슬비가 지팡이를 바닥에 찍자 바닥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구슬비는 계속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물질을 사용해 바닥에 여러 개의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파아아앗!
마법진에 나타난 거대한 덩굴들이 꿈틀거렸다.
“발목을 잡아!”
구슬비의 명령에 덩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검객을 향해 쏟아졌다.
검객은 연검을 휘둘러 덩굴을 베고, 피하느라 다시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덩굴의 생성 속도보다 검객이 칼 놀림이 더 빨랐고, 점차 덩굴의 기세는 줄어들었다.
“이 정도로는 소생을 막을 수는 없소.”
검객의 목소리에서 숨기지 못한 실망감이 묻어났다.
촤아아아악!
그 순간, 검객의 발이 덩굴에 묶였다.
검객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덩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옹길동의 광림, ‘마술사의 비단 모자’가 마법진의 위치를 단숨에 검객의 발밑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검객이 급히 연검을 들어 덩굴을 자르려고 했으나 옹길동의 카드가 이를 막았다.
“이 카드에 그려진 자는 오지에 르 다노아, 원 아이드 잭.”
어느 사이엔가 옹길동이 검객 앞에 달려와 있었다.
옹길동의 손에는 스페이드 J 카드가 들려 있었다.
“와일드 카드로 사용되지.”
옹길동이 쓸데없는 동작이 섞인 화려한 모션을 섞어 연검을 쥔 손을 향해 카드를 날렸다.